이순신은 준비에 만반을 기하고 싶었습니다. 경상 우수영과 좌수영이 보내온 정보로 볼 때 일본 전선의 수는 최소 400척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준비한 병력이 28만명이었습니다. 이중 1차 출진 부대의 규모가 15만8800명이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 부대 1만8700명이 타고 온 선박이 700여척이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 측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개시 당시 일본 전선의 수가 400척, 500척, 1000척이라는 조선의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수군이 수백척 규모라는 사실은
4월 22일 : 선조 임금이 경상도의 장수들과 의논해 전쟁에 대처하라는 글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 함부로 군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순신은 조정의 지시서에 있던 “조정은 멀리 있어 지휘할 수 없으니, 도내의 주장主將에게 일임한다”는 글을 읽은 후 다음과 같이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주장의 한 사람으로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라 겸 관찰사 이광, 방어사 광영, 병마절도사 최원 등에게도 지시문의 내용을 낱낱이 설명해 줬습니다. 경상도 순변사 이일,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무조건 자신의 명을 따르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상명上命이 결정되기까지, 부하들과의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의 첫 출전까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임의로 해석을 더한 부분은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 수록된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 그대로입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간순으로 재배치했습니다.4월 15일 일본군 부산포 도착 2일 후 : 이순신은 영남 우수사 원균과 영남 좌수사 박홍으로부터 각각 통첩을 받았습니다.
이순신은 상을 줄 때도 원칙과 믿음을 지켰지만, 벌을 줄 때도 추상같이 엄격했습니다. 마치 신상필벌의 표본 같습니다. 그의 군령은 서릿발 같았고, 훈련은 실전 같았습니다. 그는 부하의 체력과 사기를 고려해 체계적으로 수군을 운용했습니다. 이순신의 신상필벌은 항상 공평무사했습니다. 지위나 인맥이 끼어 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사상자와 부상자에겐 충분한 예우를 다했습니다. 이순신이 죄를 지은 부하를 처벌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냉정했습니다. 그는 백성民과 군軍을 엄격하게 구분했습니다. 군 혹은 관이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이순신은 장계에서 부하들의 공로를 한명씩 소상히 열거했습니다. 상사가 부하의 공을 이렇게 꼼꼼하게 챙겨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들의 노고가 제대로 보상받길 바랐던 이순신의 인간애가 느껴집니다. 원래 조선군의 전공 기준은 적의 수급 숫자였습니다. 적의 머리를 많이 벨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머릿수로만 전공을 계산하다 보니 폐단이 속출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에 왜병의 머리를 사냥하거나, 적진에 잡혀 있던 무고한 조선 사람의 머리를 베어서 거짓 보고하는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지난호(더스쿠프 348호·이순신과 왜성)에 제기했던 ‘거북선 복원에 필요한 의견’을 이어나가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거북선을 제대로 복원하려면 중심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문화재 복원은 개인의 노력으로 완수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복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완성도 높은 복원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속성은 책임 소재가 분명한 독립적인 기관이 설치됐을 때 가능합니다. 둘째, 판옥선의 연구와 복원작업도 병행해야 합니다. 판옥선도 거북선만큼 가치가 있습
조선 원정을 시작하기 전, 일본 수뇌부는 조선 육군과 명나라 육군과의 전투에만 신경 썼습니다. 일본 수군의 주임무는 전투보다는 군수 물자의 수송이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다를 통한 물자 수송이 불가능해지면 어떻게 할지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시 일본 수뇌부는 바다에서 이렇게 고전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임진왜란 7년 내내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단 한 차례도 승리하지 못할 거라고,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요? 일본은 겨우 마련된 대마도~부산 항로를 통해 군수 물자를 수송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배의 속도가 느려지자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보완했습니다. 첫째, 정보의 질과 양을 늘렸습니다. 적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면 적이 접근하기 전에 전투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탐망선과 척후선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둘째, 노 한개에 붙는 격군의 수를 늘렸습니다. 노의 동력을 증가시켜 배의 속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의 노에 네명이 붙는 것과 다섯명이 붙는 것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셋째, 평저선인 판옥선과 거북선의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전술이 바로 학익진입니다.
임진왜란 해전에서 왜군은 주로 등선육박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등선육박이란 적의 배로 건너가서 백병전을 하는 전술입니다. 100여년 지속된 내전으로 단련된 왜군들은 백병전에서 두려울 게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조총이라는 무기도 있었죠. 사실 등선육박이 왜군의 전유물이었던 건 아닙니다. 서구에서도 당시엔 등선육박이 기존 전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니뎁 주연의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에 나오는 해상전투 장면을 떠올려 볼까요? 이 영화에서도 선박 간 함포전이
이순신은 임진왜란 후반부로 갈수록 숫자에 더 집착했습니다.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져 물자 부족이 첨예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속도의 극복 : 원거리 함포전과 거북선 어쨌거나 이순신은 일본 전함보다 느린 조선 전함의 속도를 극복하고, 일본 수군의 등선육박登船肉薄 전술을 깨뜨려야 했습니다. ‘크고 단단한’ 조선 전함의 강점은 속도 면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겁니다. 조선 전함이 일본 전함보다 뛰어났다고만 알고 있는 이들에겐 이런 말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럼 실제 전투모습은 어땠을까요? 흥미롭게도 이순신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병작하게 하고 관에서는 그 반만 거두어들여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돌산도에 있는 국가 소유의 둔전은 묵은 지 벌써 오래된 곳인데, 그곳을 경작해 군량에 보태야겠다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 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 경작시켜서 토질을 시험해 봤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正租로 5백 섬이나 됐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 창고에 들여놨습니다. - [청설둔전장 1593. 윤 11.17]앞의 글은 둔전 설치를 청하
이순신은 물길과 뱃길에 밝은 어영담을 중용했습니다. 정박할 필요가 있지만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주변에 탐망선을 깔아놓고 배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순신이 그만큼 지형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보고하기를’ ‘…들으니’ ‘…고 했습니다’ ‘…를 상세히 물으니’ 등입니다. 이순신은 정보에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병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역시 병참을 중시했습니다.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
이순신이 적을 붙잡아 효수梟首한 일이 많았던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 시에 적의 머리를 베는 것보다 적선을 깨뜨리는 데 집중하라고 당부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적의 수급首級, 이를테면 머리는 전공을 평가하는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머리를 베는 데만 골몰하는 원균을 비웃기도 하고,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중국 장수들에게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이순신은 침략전이 아니라 방어전의 영웅이었습니다. 백성과 인명을 중시했으며,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부상당한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
세계 최고의 전쟁사학자가 평가한 이순신세계적인 역사학자 배리 스트라우스(Barry Strauss)는 미 육군 계간지 2005년 여름호에 ‘한국의 전설적인 장군(Korea's Legendary Admiral)’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사람(풍신수길)은 역사에 자기 자리를 새겨넣었다. 다른 한 사람(이순신)은 잘 알려지지 않은 수군 장수였다. 그는 시련 많은 경력을 느리게 통과해서, 조선의 한 지방 해안을 담당하는 단순한 사령관이 됐다. 한 사람은 ‘오락관저(Mansion of Ple
불패의 명장 이순신이순신이 직접 해전에 참여해 출동한 것은 16회였습니다. 한번 출동해서 한번만 전투를 한 적도 있고, 두번 이상의 전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이 ‘23전 23승’을 했는지, 아니면 ‘30전 30승’을 했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어쨌든 이순신은 임진왜란 동안 열여섯번 출동해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패배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도, 적에게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반면 원균이 당한 단 한번의 패배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다시피 했습니다. 칠천
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
남해 관음포 : 조선의 별이 지다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