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은 끝내 이순신을 ‘심판대’에 세웠다. 형조좌랑 강항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는데도, 조정 대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한 공정하지 않은 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권력자들은 공정한 심판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이순신이 하옥된 지 하루 만인 1597년 3월 5일부터 국문이 시작됐다.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뒤집어쓴 채 금부 나졸들에게 이끌려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식전 아침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
서애 류성룡은 당쟁을 유발할 만한 언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순신을 두둔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혹자는 “류성룡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는 말까지 남겼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것에 빗댄 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인들은 정쟁 앞에서 말을 조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국 수뇌부가 반간계로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서행장은 조선 재침공에 앞서 일단 이순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탐해봤다. 그 결과, 조선의 삼도 수군의
이순신이 주둔하던 당시에는 제승당制勝堂이 아니라 운주당運籌堂이었습니다. 운주란 ‘계책을 운용하다’는 뜻입니다. 작전 본부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이순신은 좋은 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운주당에 와서 의견을 낼 수 있게 했습니다.그러나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후엔 애첩과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됐습니다. 회의와 협의가 중단됐고, 외부와의 교류와 내부 소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궤멸당하고, 운주당도 불에 전소돼 사라졌습니다. 그로부터 150여년이 흐른 1738년(영조 15년)에야,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일본은 원균의 함대를 전멸시켰다. 이순신에게 그렇게 당했던 일본 제장들은 모두 만세 만세 만만세를 불렀다. 그러면서 경상도는 물론 그렇게 탐을 냈던 전라도를 향해 질풍같이 전진했다. 이순신이 없는 사이, 일본군은 조선의 해상을 조금씩 장악하고 있었다. 단병전의 결과는 처참했다. 포구 안에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가 가득했고, 탄환과 화살 날아다니는 소리가 귀
여러 현인이 이순신을 국문해선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조정은 이 의견을 듣지 않았다. 제1·2차 국문은 윤근수가 맡았다. 이순신은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말이 안 되는 질문엔 아예 답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국문을 맡은 윤근수는 발을 빼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건장한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쓰고 금부나졸
항쇄를 찬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됐다. 백성들이 산야를 덮어 모여 들었다. “대감, 못 가시오. 우리를 버리고 어디를 가시오”라며 울며 길을 막았다. 그중 노인 한명이 금부도사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대감을 잡아 가시면 3~4개월이 못돼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는 적왕敵王 수길의 땅이 될 것이오.”항쇄(죄인의 목에 채우는 형구)를 찬 이순신은 우후
“한산도에서 궁궐 같은 집에서 산다더라.” “유민에게 거처를 주고 해왕 노릇을 한다더라.” “조정의 처분을 듣기도 전에 논공행상을 맘대로 한다더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은 이순신에 대해 이런 말을 들어 왔다. 하지만 한산도에서 만난 순신의 모습은 정반대였다. 이순신이 거제도 동단에 있는 일본군의 소굴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보고를 받은 소서행장은 두려움에 치
의왕 행재소에 있던 선조와 군신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일본 수군이 순신 함대를 멸하고 서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전라도사 최철견이 감사 이광의 명을 받아 좌수사 이순신이 견내량 한산도 사이에서 대승전한 첩서를 갖고 행재소로 왔다. 선조는 그제야 기뻐하며 한시름을 놓았다. 한산도 대첩에서 패전한 일본 수군의 배는 대선
윤근수는 이순신의 영웅적 기백과 전략적 논리에 심취가 되었다. 그 도도유창한 물 흐르듯 하는 웅변에 윤근수의 정신은 출렁이고 의지는 멀리 돌아 꿈꾸는 사람 모양으로 인형과 같이 우두커니 앉았다가 악형할 것을 잊어버렸다. 이날은 그만 하고 말았다. 그 진술기록을 본 대소관리들은 다들 탄복하여 모두 순신 같은 당대 영웅을 한번 대면하기를 원하였다. 제1차 국문
순신은 백성들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상감께오서 잡아들이라는 명이 계시니 아니 갈 수 없소. 여러분들의 정성은 고마우나 이렇게 길을 막으면 왕명을 거역하는 것이니 도리어 옳지 못한 일이오.” 순신이 배에 올라 나갈 때에 바다에 지키고 있던 병선과 민선에서는 일제히 통곡소리가 일어났다. 순신은 우후 이몽구, 거제현령 안위, 고성현령 조응도 등 제장을 불러 울
권율은 순신의 충고하는 말의 진의와 요령을 깨닫지 못하였다. 순신은 자기의 과거의 죄명을 변경하자는 것도 아니요, 또 원균을 두호하자는 것도 아니요, 오직 국방대책의 이해득실만 말한 것으로 광명정대한 사리를 풀어 말한 것이건마는 권율은 처음에는 그 과거의 죄를 변명한다고 듣고 노하였다가 나중에는 원균을 두호하는 줄로 듣고 그래도 순신은 관대하다고 하여 탄복
원균은 순신의 원대한 규모를 반대하여 군관 이외에는 칼을 차기를 금하여 순신이 만든 긴 칼은 쓸데가 없어 되어 한산도 군기고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원균이 이때에야 술이 번쩍 깨고 정신이 돌아와 뱃머리에 나서서 바라보았다. 포구 안에는 군사들의 아우성 소리요 탄환과 화살 나는 소리였다. 조선 병선 몇 척에는 벌써 불이 일어나 화광이 하늘을 찌르고 그 화
[CBS The Scoop] 서인 대관 몇 사람과 북당들 중에도 소위 유식계급이란 작자들은 말하기를 이순신을 잡아오기는 난문제가 아니라 하였다. 그는 순신의 충성만은 속마음으로 잘 아는 바였다. 왕명이라 하면 그는 두말없이 잡혀 올 것을 믿는 까닭이었다. 금부도사 10여인이 건장한 나졸을 많이 데리고 한산도에 들어온 것은 1월 25일이었다. 황신이 위유사로
한산도 승리가 있는 다음날 적군의 시체가 화살에 맞아 죽은 것을 백성들이 베어 가지고 순신의 함대에 찾아왔다. 자신에게 바치는 것을 순신은 타도의 대장으로서 받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며 백성들에게 타일러 해당 지방의 대장인 원균을 주라고 하였다. 얼마는 순신에게 바쳤으나 다수는 원균이 차지하여 졸지에 그 공이 이억기를 능가하게 되었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휘
조선 전국의 힘이 다 무너지고 선조의 좌우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혼이 달아나고 백이 흩어졌다. 오직 명나라 조정에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이때 아랫녘 한구석에서 일개 수군절도사인 이순신이 홀로 삼천리 조국을 두 어깨에 들러 메고 조정에서 잘 알아주지도 않는 수전의 길을 떠났다. 일국의 운명을 자기의 양 어깨에 지기에는 너무도 낮은 직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