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군은 남해안의 한복판인 순천에서 오른쪽 끝인 울산까지 줄줄이 왜성을 지었습니다. 이러한 왜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해안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순천왜성이 가장 유명합니다. 고금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조선 수군 때문에 남해바다 서쪽에는 왜군이 드물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은 여전히 왜군의 영향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군은 남해 섬들의 윗길과 아랫길로 퇴군하려고 했습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음력 11월 19일, 양력으로는 12월 16일이었습니다. 왜군은 겨울이 다가올수록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조선의 겨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
만약 임진왜란이 서양 국가끼리의 전쟁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승전국은 패전한 침략국에 거액의 배상을 요구했을 겁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연합국은 독일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렸습니다. 그 액수와 조건이 어찌나 가혹했던지,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는 원인이 됐습니다. 어쨌든 무장강도가 내 집에 침입해서 재산을 갈취한 뒤 ‘이제 돌아갈 테니 더이상 싸우지 말자’고 하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이순신도 결사반대했습니다. 백성을 짓밟은 왜군을 결코 보내줄 수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온적이던 진린도 이
남해 관음포 : 조선의 별이 지다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은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추격했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와서 보고했다. -무술년 10월 17일, 「난중일기」 중 무술일기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 포함된 「난중일기」가 아니라 후손들이 보관해온 일기는 무술년 10월 12일에 끝납니다. 그 마지막 일기는 단 한 줄이었습니
1583년 11월,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이 73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소식은 2개월 뒤인 1584년 1월 이순신에게 전해졌습니다. 이순신은 즉시 낙향해 3년상을 치렀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입니다.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5년 뒤 이순신의 어머니 초계 변씨는 1597년 4월 11일에 8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순신은 이 사실을 이틀 뒤인 4월 13일에 알게 됩니다. 전쟁 중이다 보니 3년상은 언감생심이었습니다. 일주일이 채 되기 전인 4월 19일에 이순신은 백의종군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의 나이 쉰셋이었습니다.이
이순신 장군의 발길 따라 전국을 누볐다. 그가 태어난 서울 충무로에서 세상을 떠난 남해 관음포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긴 여정을 시작한 건 500년 시간을 뛰어넘어 이순신 장군으로부터 받은 ‘위안’ 때문이었다.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의 여정을 따라가봤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소통에 능한 리더”라고 잘라 말했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이순신 여행」 저자 장정호를 만났다. ✚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몇해 전 사업을 하다가 슬럼프에 빠졌습니다. 일은 잘 풀리지 않고, 주위 사람들과 뜻이
전례 없는 대승첩을 거뒀다. 노량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은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감격에 겨웠다. 승첩을 올린 데다 목숨까지 구했기 때문이다. 모두 순신의 공이었다. 그래서 대첩이 끝나자마자 순신을 찾아갔다. 하지만 순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진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소서행장의 부하 철포대가 쏜 탄환을 맞고 말았다
명나라 제독 진린이 위기에 처하자 순신이 돕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진린이 무모하게 들어간 곳은 ‘관음포’. 적의 탄환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순신은 기어코 진린을 구하겠다며 그곳으로 들어갔고, 진린을 구해냈다. 하지만 순신의 운명은 저물고 있었다. 소서행장을 일부러 놓아준 사실을 딱 걸린 진린 명나라 제독은 순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관음포라는 곳이 있다. 겉에선 ‘바다와 뚫린 곳’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막힌 만이었다. 노량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해전海戰을 벌이던 이순신은 돌연 일본군의 꽁무니를 뒤쫓지 않았다. 그러면서 관음포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일종의 속임수였다. 관음포로 몰아넣어 전멸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던 거다. 천문을 보던 명나라 장수 진린은 깜짝 놀랐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
노량에서의 전투를 앞둔 이순신은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밤에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니 죽기로 싸우자”며 장졸들을 강하게 독려했다. 스스로는 갑판 위에 올라 “이 적들만 소탕한다 하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며 결전의 의지를 스스로 새겼다. 이를 본 진린은 순신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소서행장의 병선 두척
8월 24일 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전라도 조방장 정걸丁傑과 함께 160여척의 연합대함대를 거느리고 좌수영 앞바다에서 출발, 위무당당하게 원정의 길을 나섰다. 하지만 적군은 꼬리를 감추고 부산 어디론가 사라졌다. 풍신수길의 명령을 받들어 험고한 항만으로 물러나 버틸 작정이었던 거다. 일본군과 맞서 싸울 장군이 없는 탓에 순신의 고민은 깊어졌다. 변협·이제신
이완과 진린의 통곡하는 소리에 비로소 순신의 죽음이 알려졌다. 일시에 통곡하여 노량해상에 곡성이 진동하였다. 전에 없는 대승첩을 한 개가는 고사하고 진린 이하 명나라 제장과 조선 제장들이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눈물을 씻었다. 순신의 시체가 누운 대장선의 판옥층루로 들어왔다. 순신의 누운 자리에는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이순신의 전격전술電擊戰術에 놀라
들어누운 순신은 한번 눈을 떠서 장자 회를 보며 “나를 혼자 두고 활을 들고 나가 싸워라. 적을 하나라도 놓아 보내지 말게 하여라”하고 마지막 막을 마쳤다. 다른 유언이라고는 한마디 말이 없어다. 순신은 54세의 혁혁한 일생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났다. 이보다 먼저 진린은 순신의 전영장 이순신李純信을 빌려서 향도장을 삼아 곤양의 죽도에까지 이르렀더니 소서행
이날 밤에 순신은 진린을 찾아보고 오늘이 가장 조수가 깊으니 총공격을 행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적의 뇌물에 취한 진린은 순신의 말대로 움직이지를 아니하였다. 그러고 도리어 진린은 말하되 “나는 아직 행장은 그냥 두고 남해에 있는 적에게 항복한 반민을 먼저 칠까 하오”하고 딴소리를 한다. 명나라 함대를 물려서 행장이 달아날 길을 열어주자는 것이었다. 그 이
이순신 혼자서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에서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해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정은 부하제장의 주장을 물리쳐 말하기를 “울산성에
요시라는 조선정부의 동서당쟁 싸움이 있는 것을 이용해 반간계로써 이순신을 참소해 오자서를 몰아내고 범증을 멀리하게 했다. 요시라는 계책에 따라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에게 밀령했다. 그 당시 일본 제장들이 제일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장수는 이순신 한 사람이었다. 이순신만 없다면 나머지는 별 볼일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양산 김해의 낙동강중과 부산 소굴의 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