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년 병신년. 왜국은 조선을 재침하겠단 계획을 확정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게 혼쭐이 났던 왜국은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그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고, 그 배경엔 조선왕 선조의 우매함이 있었다. 나라든 조직이든 정당이든 지도자가 무능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1596년 9월 초 책봉식을 마친 풍신수길의 왜나라는 외교적으로 국호를 인정받았다. 명·왜 강화조약은 결렬됐지만, 명나라가 ‘왜국 왕 책봉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기록은 전해지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
전쟁터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이순신을 괴롭히는 건 왜적만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도 순신을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이순신이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 그 중심엔 순신에게 질투를 느낀 서인이란 일종의 카르텔과 귀가 얇은 왕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금 정치판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해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던 1594년 4월 9일. 진중에서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합격자를 알리는 방을 붙이고 있는데, 비가 엄청
1594년 봄, 이순신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서 날아온 패문牌文(통지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적을 치지 마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는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어쩔 땐 미국, 또 어쩔 땐 중국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때와 뭐가 다를까. 힘이 없으니 ‘전략적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오랜 외교 전술은 옳은 걸까.이순신은 1594년 2월 13일 선조의 출전 명령서를 받고 경남 창원의 저도에서 소비포 만호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날씨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 연합함대는 거친 날씨 탓에 번번이 바다에서 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공격하라’는 지령만 내리고 있었다. 자고로 지도자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장에 걸맞지 않은 지시나 명령만 주야장천 하달해 지도자가 되레 ‘악당(빌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견내량에 집결한 조선 수군은 2월 8일 칠천도로 이동해 머물고 9일 새벽에 부산포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하려 했다. 이때 폭우가 내리자 이순신은 칠천량과 가덕도에 진을
여기 한 리더가 있다. 아랫사람을 파트너로 여긴다. 아랫사람의 공功은 버리고, 과過는 취한다. 이순신이 이런 유형을 대표하는 리더다. 여기 또다른 리더가 있다. 아랫사람을 부품처럼 여기고 부린다. 공功은 철저하게 자신이 취하고, 과실過失은 떠넘긴다. 이런 리더가 있을까 싶지만 실제론 숱하다. 당신의 리더는 어떤 유형인가.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 연합함대는 9월 1일 새벽, 부산포를 향해 출항했다. 장림포에서 부산포로 가는 첫 길목은 과거에 몰운대라고 일컬어지는 화준구미다. 여기서 발견한 5척의 왜선을 수장시키고 적군 500명을 제거했
이순신은 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전 출전 때보다 전선의 수를 두배가량 늘렸다. 하지만 원균은 3차 출전 때와 똑같은 7척의 판옥선만 갖고 있었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민생경제가 말이 아닌 지금,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준비된 지도자’가 있을까.임진년 7월 13일. 3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아울러 육지의 전투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왜적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했다. 9차례의 승리를 통
# 이순신의 함대는 무적이었다. 왜군과 아홉차례 만나 모두 이겼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왜군이든 패잔병이든 섬멸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진행했다. 휘하 장수들이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육군과의 협조체계, 군졸의 피로 등 복합적인 변수를 감안한 결과였다.# 당신의 리더는 어떤가. 실적에 쫓겨 성급한 결정을 내리진 않는가. 현재의 국가 지도자들은 또 어떨까. 먼 미래를 보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을까.안골포 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9전 9승을 기록한 이순신은 밤이 되자 전함대를 몰고 포구 밖 10리(1
직職에 연연하지 않는 이는 직을 받든 그렇지 않든 ‘제 일’을 해낸다. 반면 직에 연연하는 사람들은 통상 ‘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 ‘직’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명하신 분들은 지금 어떤가. 직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가 그 반대가 많은가.류성룡은 이순신이란 사람이 작위의 진급 여부에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선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인지라 이순신의 작위를 고민할 겨를이 류성룡에겐 없었다. 그는 「징비록」에 한산도 싸움을 이렇게 기록했다. “적은 본래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이순신은 ‘견내량’을 지나 당항포 앞바다에 도착했다. 거제에 있던 왜군이 당항포로 이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였다. 장수들은 “진격하자”는 의견을 냈다. 순신은 신중했다. 당항포의 초입이 1리조차 안 될 정도로 좁은 게 맘에 걸렸다. 순신은 ‘유인작전’을 지시했고, 끝내 승리했다. 순신이 왜 명망을 얻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편에선 순신의 빼어난 자질을 옛 기록 그대로 전해봤다.6월 5일 아침. 순신이 이끄는 조선삼도연합함대가 정박해 있는 통영지역 착량에 거제 지역에 살고 있다는 주민들이 작은 배로 짙은 안개를 헤치고
“가장 효율적인 수비는 공격하는 것이다.” 이기고 싶다면 때론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같은 전략이 필요한 건 비단 운동경기만이 아니다. 경영자도, 상인도, 군인도 ‘역발상’을 통해 경쟁자나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순신이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편에선 순신의 통찰력을 옛 기록 그대로 느껴보자.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은 이순신에게 휘하 장수들이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마다하고 부하들과 함께 술을 나누며 전승을 축하했다. 이튿날인 임진년 6월 2일 오전 8시께, 사방으로 보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은 거북선이란 ‘비책’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고 거북선을 마냥 믿은 건 아니었다. 거북선 위에 ‘쇠못’을 달아서 왜군이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했다. 근접전을 즐기는 왜군의 습성을 미리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조치였다. 이처럼 적을 알면 백전백승이지만, 적을 모르면 백전백패다. 지난 5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을 다녀온 ‘시찰단’은 얼마만큼 준비가 돼 있었을까.거북선이 적진을 헤집고 다니자 왜군은 등선육박전으로 대응했다. 지푸라기와 거적때기로 위장한 거북선의 지붕 위로 일제히 뛰어내렸다. ‘으악! 으아악!’ 거적 아래
“수사기관이 짜놓은 판이다.” 압수수색을 하거나 영장만 발부되면 거대 야당 안팎에서 쏟아지는 말이다. 자신들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수사기관이 온갖 술책을 부리고 있다는 아우성이다. 물론 수사기관이 ‘살아 있는 권력’에도 예봉을 휘두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거대 야당 사람들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순신은 두번째 출정부터 전라우수영과 연합 함대를 꾸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6월 3일까지 전라우수영에 합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같은 계획은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원균의 긴급한 요청 때문이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달라진 건 딱히 없다. 여야 정치권은 여전히 쌈박질 중이고, 경제는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민생을 돌볼 여유도 없다. 어떤 당은 입방정을 떤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고, 어떤 당은 돈봉투에 코인까지 아주 난리다. 이럴 때일수록 진짜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여수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대의 탐보선이 달려와 전라도사 최철견의 서간을 전달했다. “4월 그믐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
검수완박이란 지상과제를 해결하겠다면서 탈당했던 의원이 다시 복당했다. 국민뿐만 아니라 당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그 의원도, 그를 복당시킨 당 사람들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검수완박의 당위성을 인정했으니, 그의 탈당에도 문제가 없다는 궤변만 늘어놓는다. 가뜩이나 돈봉투 때문에 시끄러운데…. 이 당은 과연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노량 근처에 숨어 있던 원균은 판옥선 1척을 타고 순신의 함대가 정박 중인 당포에 도착했다.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가 타고 온 판옥선엔 대포가 하나도 실려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이 불거졌다. 10년 후인 2012년 그 당에서 2008년 전당대회에서 오간 것으로 보이는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우연히 상대적 우위를 점한 반대편 당은 ‘부패한 보수 깨끗한 진보’란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23년 바로 그 당에서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부패한 정치권을 보면서 국민은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체 높은 정치인들은 역사의 무서움을 알기나 할까.선조는 평소에 믿어오던 류성룡을 면직시키기 난처했다. 하지만 동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서인의 주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자 왜국의 공격에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서인’ 세력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류성룡 일파의 세력이 커질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한다는 높으신 양반들의 사고방식이 왜 그 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거북선이 좌수영 앞바다를 몇바퀴 돌자 모여든 구경꾼들이 기뻐하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함성 소리를 유추해 보자면 “거북선 만세! 순신 만세!”일 것이다. 녹도만호 정운과 송희립은 “사또, 이런 배가 20척만 있으면 왜구는커녕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겠소!”라며 취
사물이나 현상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어야 미래 예측이 가능하고, 또 구체적이고도 슬기로운 대응방안을 내놓을 수 있다. 기업인, 공직자, 정치인 할 것 없이 리더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재능이다. 이순신이 보여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지혜는 그의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조선의 남해 바다를 지키는 4곳의 수군 본영은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구별했다. 따라서 가장 오른쪽이 전라우수영(해남)이고, 계속 왼쪽 방향으로 전라좌수영(여수), 경상우수영(거제)이다. 맨 왼쪽이 경상좌수영(동래)이다. 각각 이억기, 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