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어지럽다.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의 탄생을 그토록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의 리더십을 지겹도록 다시 찾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많은 독자의 요구로 시작한 ‘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의 연재를 2년여 만에 마친다. 우리는 오늘도 이순신과 같은 리더를 기다린다. 이순신은 어
“명의 군대는 믿기 어렵다.” “일본은 조선 침략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를 시기하는 이들이 반간계를 쓸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란 중에 남긴 글을 보면 수많은 예측이 담겨 있고, 이들은 대부분 적중했다. 결국 선조대왕이 성웅을 제대로 쓰지 못해 난亂을 피하지 못한 셈이다. 이순신의 정情과 의意를 문사에 표현하는 역량은 상당했다. 여기 이순신의 유
이순신은 문장가였다. 모두가 슬퍼하는 정情과 분개하는 의義를 표현하는 역량과 수완이 대단했다. 한편에선 제갈공명의 출사표 또는 이영백의 진정표에 이순신의 글을 비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문장으로 자부하는 일은 그의 일생에 없었다. 도리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른 사람들의 글이 쏟아졌다. 임진년 이래 7년 전쟁 동안 이순신에게 지우와 은애를 받은 제장
전례 없는 대승첩을 거뒀다. 노량대첩을 끝으로 일본군은 본국으로 돌아가 버렸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감격에 겨웠다. 승첩을 올린 데다 목숨까지 구했기 때문이다. 모두 순신의 공이었다. 그래서 대첩이 끝나자마자 순신을 찾아갔다. 하지만 순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진린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소서행장의 부하 철포대가 쏜 탄환을 맞고 말았다
명나라 제독 진린이 위기에 처하자 순신이 돕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진린이 무모하게 들어간 곳은 ‘관음포’. 적의 탄환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순신은 기어코 진린을 구하겠다며 그곳으로 들어갔고, 진린을 구해냈다. 하지만 순신의 운명은 저물고 있었다. 소서행장을 일부러 놓아준 사실을 딱 걸린 진린 명나라 제독은 순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관음포라는 곳이 있다. 겉에선 ‘바다와 뚫린 곳’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막힌 만이었다. 노량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해전海戰을 벌이던 이순신은 돌연 일본군의 꽁무니를 뒤쫓지 않았다. 그러면서 관음포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일종의 속임수였다. 관음포로 몰아넣어 전멸시키기 위한 전략이었던 거다. 천문을 보던 명나라 장수 진린은 깜짝 놀랐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는
노량에서의 전투를 앞둔 이순신은 불길한 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밤에 큰 싸움이 있을 것이니 죽기로 싸우자”며 장졸들을 강하게 독려했다. 스스로는 갑판 위에 올라 “이 적들만 소탕한다 하오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며 결전의 의지를 스스로 새겼다. 이를 본 진린은 순신의 운명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명나라 제독 진린은 소서행장의 병선 두척
이순신은 달아나려는 소서행장을 완전히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서행장의 뇌물을 받은 진린은 미적거렸다. 도리어 “남해에 있는 반군을 치러 가겠다”면서 이상한 소리만 늘어놨다. 이순신은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남해에 있는 사람은 모두 적에게 포로가 된 조선의 백성들이지, 어디 적이 있소?” 진린은 이순신의 강직함에 숨이 막혔다. 소서행장이 이순신
진린과 순신은 독대를 했다. 진린은 일본 소서행장의 뇌물을 받은 터. 길을 열어달라고 이순신에게 청을 하려던 거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누구이던가. 그는 진린에게 따끔한 일침을 날렸다. “수적불가종견讐敵不可縱譴”. 원수를 그저 놓아 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1598년 11월 13일 소서행장의 군대는 순신과 진린의 수군의 공격에 전멸하고 말았다. 소서행장은
명나라 군사들은 뇌물에 약했다. 뇌물을 너무 많이 받은 유정은 일본군과 아예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특히 소서행장이 유정을 많이 이용했다. 본국으로 가고 싶었던 소서행장은 유정에게 수차례 뇌물을 보내 ‘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다. 유정은 허락했지만 뒤에는 순신이 있었다. 전라도 바다의 조수는 급히 빠지기로 유명해서 주의하지 아니하면 으레 실패할 확률이
이순신은 지금이야말로 소서행장 등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물때가 워낙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순신이 수차례 “출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듣지 않았다. 유정을 통해 소서행장의 뇌물을 받은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출전을 단행하였지만 진린은 또다시 순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진린은 이순신의 조언을 듣고 함대를 장도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과 육군대장 유정은 힘을 합쳐 소서행장 군을 치기로 했다. 진린은 약속을 지켰지만 웬일인지 유정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어 오른 진린은 유정을 나무랐지만 유정은 요지부동이었다. 되레 유정은 퇴각하는 소서행장을 돕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소서행장의 군사는 종의지, 모리민부 등의 군사와 힘을 합쳐 이순신에게
풍신수길이 63세를 일기로 잠이 들었다. 그는 죽기 직전 “조선에서 철병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고, 부전수가(한산도), 가등청정(울산), 흑전장정(양산) 등은 진을 거둬 일본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소서행장은 달랐다. 수로는 이순신이, 육로는 명나라 장수 유정이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든 풍신수길은 관백 자리를 어린 아들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을 존경했다. 자신이 탄 가마가 이순신의 가마를 앞서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 진린은 명나라 황제에게 이순신의 장재와 훈공을 보고하여 ‘이순신은 경천위지經天緯地(천하의 체계를 세워 바르게 경영한다는 의미)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킨다는 뜻)의 공이 있는 장수’라고 상주하였다. 고금도에 정착한 진린
안위는 몸소 선봉이 되어 대포와 화전을 퍼부으면서 맹렬히 쳐들어갔다. 적은 사력을 다하여 격전하였지만 감당해 내지를 못했다. 송여종의 복병선 8척도 적선의 앞뒤를 공격했다. 낭패를 당한 적선은 어지럽게 혈로를 뚫고 빠져 달아났다. 명병은 패하고 조선군은 이기자 명 수군 제독 진린은 분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큰 공을 진린에게 양보했다. 진린의 병선
진린은 이순신의 병위를 보고 크게 놀랐다. 13척의 병선으로 300여척의 적을 격파한 명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병선이 13척이 아니고 온 바다를 덮은 대함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진린은 이순신에게 전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고금도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진린은 ‘나홀로 공격’을 감행했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고금도에서 세력을 회복한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이 이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순신은 그들의 병영을 짓기 시작했다. 명나라 대장인 제독의 아문도 건설했고, 중국 병선의 정박처를 택하여 선창 방파제도 지었다. 하지만 명나라 제독 진린은 이순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인물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근거를 잡고 명장 진린이 남하하면 거처할 관아를 건설할 예정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장졸의 폭행과 약탈은 갈수록 심해졌다. 이들은 군자금이라 하여 날마다 조선 조정에 재물을 내라고 졸랐다. 한번이라도 응하지 못하면 황제에게 아뢰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명나라 졸병들까지도 민가에 무상출입해 부녀를 겁간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명나라 조정의 형부시랑 여곤呂坤이 조선에 관한 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이
울산성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식수는 끊겼고, 먹을거리는 떨어졌다. 더구나 명병이 에워싸고 있어, 돌진할 틈도 없었다. 일본군 참모총장인 흑전효고는 각처로 통지해 구원병을 불러 울산으로 보냈다. 소조천수추, 모리수원, 흑전장정, 협판안치, 과도직무, 가등가명 등의 무리가 언양, 밀양으로부터 길게 달려 울산으로 합류했다. 울산성을 지키던 가등청병위는 명병
가등청정은 울산 도산島山에 성을 쌓아 근거지를 만들고, 서생포로 나가 기장 해안에 머물러 있었다. 울산으로 내려오는 명나라 대군의 목표는 이런 가등청정을 잡는 것이었다. 풍신수길의 양아들로 자란 가등청정을 잡으면 무서워할 일본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날마다 수천명 일꾼을 독려해 병선을 만들고 고쳤다. 아울러 군비를 정비하는 데도 골몰했다. 영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