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란(托卵)에 대한 예의ㅡ아홉 살짜리를 여행가방에 가두어 죽인 의붓에미에게 한상호열흘 남짓 품었던그 정 하나로뱁새는 오늘도애벌레를 물린다아기 뻐꾸기 붉은 입 속에ㅡ『어찌 재가 되고 싶지 않았으리』(책만드는집, 2023) 2020년 6월 천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의붓어미는 3학년인 아이를 가로 50㎝, 세로 70㎝ 여행용 가방에 들어가게 했다가 가방 안에서 용변을 보자 더 작은 가방에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사인은 질식사가 아니라 다장기부전증으로 인한 심폐정지로 추정되었다. 이 땅에서 계모와 계부를 포함해 부모의 손에 의해 살
플래카드들ㅡ서울이은봉튼튼한 거치대를 다리 삼아 제 몸을 주욱, 펼치는 놈들 있다 거치대들 사이사이 종로에도, 여의도에도 제 몸 크게 펄럭이며 ‘나를 보아라’, 소리치는 놈들 있다무엇인가를 자랑하기 위해무엇인가를 홍보하기 위해무엇인가를 선전하기 위해무엇인가를 팔아먹기 위해이놈들, 서울 도심의 이곳저곳 뻔뻔하게 널브러져 있다 바짝바짝 고개를 쳐들고 있다 어쩌다 보니 이놈들, 서울의,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ㅡ『뒤뚱거리는 마을』(서정시학, 2023) KBS였는지 MBC였는지 SBS였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뉴스
Las Vegas의 밤과 낮김송포골 깊은 가슴의 샘을 훔쳐보고 있다광기의 엉덩이는 복숭아를 넘어선 흥분된 불멸,가슴과 힙에 흥분되어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이다광란의 야성과 그랜드 캐니언의 대지가 어떻게 조화되는지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맞추려 하자 밤과 낮이 울부짖는다너희는 광야의 코끼리, 우리는 호랑이의 발걸음거리에 선 그들이 땋은 머리칼의 정체를 묻고 싶다밤에 다니는 불나방처럼 변신의 카멜레온에게 발산의 행위를 물어보고 싶다낯선 거리에서 본능이 드나들다그들의 존재가 명치를 자극했다사암(砂巖)이 그들의 몸을 통해 불끈거린다는 것을세속
가족사진 백옥희격자 장롱 맞은편 벽에뜰채처럼 걸린 잉어 네 마리꼼짝없는 찰나가 형광등 아래 있다왕소금 뻘을 누비던 잔뼈를 부려놓고허기로 잘록한 아내는 머플러를 둘렀다곧 죽어도 대학생이라고 비늘을 번쩍이며낚싯줄쯤이야 얕보던 아들이 그 옆에어부 낚싯바늘에 아가미가 걸린 딸안간힘으로 팔딱팔딱거리다 멍이 들고거친 풍랑과 맹골수에 식솔들 챙기느라풍성하던 지느러미 다 뽑힌 아버지가 중심에 있다저녁 바람이 곱게 다림질한 물 실크 옥색 치마동해 바다가 태곳적 고향이라는데,비린내만 일렁이는 항구 마을은이제 진저리가 난다는 턱걸이 급들 데리고무리를
기도를 위한 기도허영자내가 함부로당신의 이름을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쓰리고 고단한 삶 때문에당신의 이름을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알 수 없는 궁륭穹窿어두운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해 주세요운명의 굴레를 헤치고 헤쳐 나와만신창이 얼굴이 꽃같이 피어날 때신이여비로소 당신의 이름을부르게 해 주세요.ㅡ『허영자 시선집』(동학사, 2023) 오늘은 크리스마스날입니다. 중동지방의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 날을 오늘로 잡아 전 세계에서 축하 행사를 갖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날이 경건한 기도의 날이 아니라 요란한
엄마 쌤께ㅡ스승의 날에이원만말도 느리고행동은 더 느린 저를수업시간도 노는 시간도조용조용친구들 사이에 숨어 있는 저를어떻게 찾아내셨어요?땀 송송 나면서도치렁치렁 긴 머리어쩔 줄 몰랐는데고무줄로 묶어주시니 시원했어요여섯 살 때부터엄마가 없어 슬펐는데머리를 묶어주셔서감사합니다.ㅡ『오랜만에 나하고 놀았다』(모악, 2023)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 아기 예수님이 오시기 전날이다. 아마도 전국의 수많은 교회와 성당에서 연중 가장 큰 행사를 오늘 할 것이다. 성탄절 전날을 더욱 가치있게 여겨 내일보다는 오늘 행사를 하는 것이다. 시내 곳
달빛공장 완월동김소해보름달 첫 문장을 완상하는 달의 동네유곽의 집 나를 헐어 마주한 언덕바지섣불리 손댈 수 없어재건축이 밀다 놓친기미 낀 골목벽화 마른 꽃잎 다시 피워창녀는 아니지만 어쩌면 광녀같이불현듯 잃었던 밤을낡은 꿈을 수선하는수선공장 톱니바퀴 어둠을 잘게 썬다당직근무 달그림자 낮의 뒤를 살핀다녹이 슨돌쩌귀마다기름때를 닦으며ㅡ『서너 백년 기다릴게』(황금알, 2023) ‘달을 감상하는 동네’라는 뜻을 가진 부산 완월동(玩月洞)에 유곽이 형성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다.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부산항에 일본인 집단 거류지가 형성
연길은 영결이다박태일긴 봄 장춘에서마산까지 공부하러 왔던 겨레 학생세무서 공무원에 부동산업까지 겸한다는아버지 뱃심을 닮아선지 활달했던 처녀한족 유학생보다 배달말 못했던 영결이가한국 온 지 석 달 자랑스레 내게 가르쳐준 것은선생님 한국 극에는 세 가지가 있어요 희극 비극 야동……어느 날 전자편지에 나 영결이다라 써 나를 웃기더니졸업하고 고향에 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던가사업하러 북경에 상해에 있다는 소식을 받았건만여섯 해나 더 지난 오늘 연길도십칠 층 아파트 밖 뜨거운 불빛을 내려다보노라니문득 나 영결이다…… 다시 웃으며 편지를 줄
ㄴ의 자세서안나의자가 ㄴ으로 자란다흙에 다리를 묻고 싱싱하다군부독재 시절 학생들은 ㄱ으로 각을 잡아야 했다정치군인들은 탱크를 ㄱ으로 몰아 정권을 탈취했다ㄱ으로 허리를 곧게 펴야 바른 정신이 깃든다는공화국의 표어엔 감정이 없다사람의 목숨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 밖을 떠도는 문장이었다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운동장을 고르고 잔디밭 풀을 뽑고 돌을 치우고 폐휴지를 모았다교련 시간에는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을 했다압박붕대와 삼각건 묶는 법을 배웠다 교련 선생 앞을 지날 때는 손에 날을 세워 ㄱ으로 경례했다교련 선생의 군복에는 퇴역 장교의 계급장
시와 정치문봉선시와 정치는 닮은 점이 많다고?닮은 게 아니라 한 몸이라고?먼저 말만 먹고 산다고?냄새도 피우면 안 된다고?개보다 사람 위하는 일이라고?가장 낮은 곳에서 섬겨야 한다고?가장 높은 곳에서 이상을 가져야 한다고?보편적인 마음을 얻어야지,고루고루 감동을 주어야지.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으로 쓰는 언어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몸으로 비비는 언어몸으로 웃는, 몸으로 우는 언어긍지로 배부르다.수시로 몸을 바꾸어 입는 옷.넣었다 뺐다 조석으로 바꿔입는 사람 맘붙들어 맨 뒤엔 광대짓을 해야 한다.정치에 등불을 거는 직업을 천형으로 알고 쓴다
처녀들의 난 1ㅡ시, 눈총, 잠고명자한 땀 한 땀의 시한 땀 한 땀의 읊조림 졸음은 처녀보다 힘이 세 미싱 바늘에 손가락을 찔렸다 피댓줄에 머리카락이 감겨들어도 잠은 온다, 뒤통수에서 미싱 대가리와 너희는 용량이 같다졸지 마라 다섯 달 치 월급 그 까짓것 쫌 기다려봐라 시간은 바이어스처럼 늘어나 매일매일 새날이니 처녀들아 너희 흰 손가락을 바쳐라 졸음의 특효약 약 종이에 베껴온 詩를 털어 넣고 오물거렸다 무엇과도 섞이지 않으려고 미싱 다이 한쪽에 詩를 감춰놓고 혼자 곱씹는 행복 때문에 미안했다 詩에는 눈총과 소음 먼지와 잠이 없다
공에의 의미ㅡ서정주에게황순원이 사람은 서라벌 한 절간 우물 속에다 용을 기르되 한갓 강고기나 다를 바 없이 기르고이 사람은 송도땅 깊은 산속 한 폭포에다 잉어를 기르되 폭포 위나 밑이 아닌 바로 폭포 줄기 한복판에서 살게 하고이 사람은 한성 한 선비집 사랑방 병풍 속에다 자짜리 붕어를 기르되 먹이 없이도 살찌게 하고이 사람은 서울 변두리 마을 자기 집 뜰 안 연못에다 비단고기를 기르되 있게도 기르고 없게도 기르고ㅡ『황순원전집 11/시선집』(문학과지성사, 1985) 소설가 황순원이 쓴 시인 서정주에 대한 인물론이기도 하고 서정
첫눈이승하 세상에 처음 아기가 태어난 날첫눈이 펑펑 내립니다.세상에 처음 태어난 아기가 우는 날첫눈이 녹아 눈물이 흐릅니다. 눈물이 흘러내려 따뜻한 세상입니다. 눈물이 녹아 낙숫물이 떨어지고눈물에 씻겨 한결 고운 세상입니다. 눈물처럼 가슴 후련케 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에 처음 아기가 태어난 날 눈물을 펑펑 흘립니다. ㅡ『제2회 KBS 방송문학상 수상작품집』(KBS, 1987) 아기가 엄마 뱃속에서 밖으로 나와 처음 하는 일이 펑펑 우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한자로는 고고지성(呱呱之聲)이라고 한단다. 10개월 동안 엄마의 따
쪽이창규쪽방에 든 순간에 길은 다시 열리나쪽창을 열지 않고도 내다보는 서편에쪽달은 반쯤 기울어 생각을 쏟고 있네네 쪽은 거기 있고 내 쪽은 여기라며쪽 진 머리 풀고서 울고 있는 당신은기억의 방에 갇혔나 절반 녹은 반쪽에저 달, 가는 길에 쪽빛으로 나앉아서애저녁에 놓쳐버린 쪽배 다시 부르나쪽물 든 포구를 향해 빈손 펼쳐 흔드네ㅡ『시조21』(2023년 겨울호) 3수로 이뤄진 연(連)시조인데 ‘쪽’이란 글자가 제목을 포함해 11회 나온다. 그런데 쪽방이든 쪽물이든 무리하게 억지로 갖다 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순우리말을 이용
주식 불개미이경옥증권사 객장 전광판에 개미들이 들붙었다 찌라시 ‘카더라 통신’ 시시각각 수신하며 호재성 명품 고르느라 촉각 곤두세운다 눈독 들인 불기둥은 한발 빨라도 이미 늦어붉은 상향 화살표로 쭈욱 쭉쭉 올라가고 잠깐만, 급하게 올라탄다정말 잠깐 멈춘 그새 첫사랑 떠나보낸 듯 놓치고 땅 칠 바엔 무조건 가는 거다, 못 먹어도 Go, Go다 끝 간 데 어디인지는 몰라 너도 나도, 그 아무도 그렇게 잡은 상투 화살표가 뒤집힌다자진한 ‘영끌빚투’ 본전은 어느 천년 불개미 환골탈태가 지척이듯 멀어라 * 영끌빚투: 영혼을 끌어다가 빚을 내
제비꽃 연가(緣家)이심훈창고형 마트 높다란 벽과 보도 블록 맞닿은 가장 낮은 모서리하고도 틈새바람 부는 대로 섭슬려 온 막다른 길 제비꽃들 모여 암팡지게 살림 차렸다.지구촌 난민 1억 명이 넘었다. 세계 인구 80명 중 한 명은 난민으로,* 미성년이나 노인이 절반을 넘는다. 새가 넘나드는 길인데 오가지도 못하고, 폭염 재난문자에 묻어오는 미세먼지도 넘는데. 물고기가 오가는 길인데 넘나들지 못하고, 일회용 페트병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나 봐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기니, 베네즈웰라에서 콜롬비아로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를 통과하여 미국
어름사니 박남희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너의 그림자를 만날까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바람이 두고 온 길을 걷다 보면뜻밖에도 지워진 기억을 만날까노을 위를 걷다 보면 나를 만날까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을 만날까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데기억의 들판이 자꾸 낯선 길을 새로 만들고기억이 버린 것들이 무심히 너를 기다리는데네가 떠나보낸 나를 기다리는데구름아바람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너와 함께 무심히 흘러온 나를 만
아버지를 통과할 때정상미오빠와 나는 줄곧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오랜만에 나타나 잘못을 불라 심문하던 숨어도 매번 찾아내 종아리에 피멍 들게 한, 악마 따위 없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스케치북엔 그가 없고 아.버.지.란 말 지웠다 시커먼 그림자는 쉽게 죽지 않아서 까끌한 수염에 자다가 소스라쳤다 몰래 다가와 딸의 볼을 훔치던 그 사람오래된 내 토막잠은그때부터 시작되었다회초리는 숨겨도 걸어 나왔다 좀비처럼아궁이에 숨었다가 치마 끝단에 끌려 나와 숯검댕이 얼굴로 가슴까지 까매진 남매, 그가 처음 아버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선을 넘나들며
소록도 시편 1최하림살갗을 간질이는 아지랑이 속에서오른쪽 발가락이 또 하나 떨이지고내일이면 왼쪽 발가락도 떨어질 것이다소록도에서는 다들 발가락이 떨어진다저기 지팡이를 짚고 가는 문둥이가 누군지,고향이 어딘지, 뉘 집 자식인지 몰라도여기서는 모두 발가락이 떨어진 문둥이다날마다 아픔을 발가락에 싸서 보내는문둥이들은 오늘도 소록도 남쪽 끝,공적비들이 국한 영문으로 씌어진 중앙공원을지나 어두워지려는 숲길로 의지하며 간다ㅡ『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문학과지성사, 1998) 이 세상에 많고 많은 병이 있는데 왜 한센병(일명 나병)
듣고 싶은 말전자윤놀이공원 늦겠다어서 일어나 씻어또 저번처럼 학교로 새면 안 돼아니, 놀이공원 가는 애가 교과서를 왜 가져가?교과서는 나중에 집에 와서 봐도 되잖아어머, 어머, 얘가 밥도 안 먹고 지금 학습지 푸는 거니?엄마가 몰래 공부하지 말랬지다른 아이들은 열심히 논다는데너는 자꾸 공부만 해서 어떡하니?이러니 회전목마를 타도 어지럽다고 하지롤러코스터 타고 싶지 않아?공부는 나중에 어른 돼서 해도 되잖아놀 때 실컷 놀아야지엄마 말 듣고 열심히 놀 걸나중에 후회하기 싫으면틈틈이 게임도 해참, 잊지 마!놀이공원 마치면 놀이터 가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