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은 별별 모함을 다 당했다. “가등청정 등 왜국 장수에게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받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출정하지 않았다” 등 모함의 내용도 다양했다. 문제는 임금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 대부분을 믿었다. # 자고로 지도자는 좋은 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언眞言과 간언間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공천’으로 시끄럽다. 여야 지도자는 과연 진언과 간언하는 사람을 잘 가려서 총선 무대에 올려놓고 있을까.「난중일기」에는 1596년(병신년) 10월 12일부터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
전쟁터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이순신을 괴롭히는 건 왜적만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도 순신을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이순신이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 그 중심엔 순신에게 질투를 느낀 서인이란 일종의 카르텔과 귀가 얇은 왕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금 정치판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해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던 1594년 4월 9일. 진중에서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합격자를 알리는 방을 붙이고 있는데, 비가 엄청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떠도는 백성이었다. 이런 유민이 가장 안전하게 여긴 곳은 놀랍게도 ‘이순신 군영’이었다. 이순신이 유민을 위해 잠잘 곳뿐만 아니라 농장까지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선조를 따라다니는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자리’가 아닌 ‘마음’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겐 지금 국민을 진짜 위하는 마음을 지닌 리더가 있을까. 선조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1593년 4월 9일.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은 왜군의 수장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심유경은 “한양에서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선 조정은 애먼 결정만 내리고 있었다. 밀실 합의의 폐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대부분 신당 창당 건이고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누굴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왜군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우선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병력도 왜란 초기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
날씨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 연합함대는 거친 날씨 탓에 번번이 바다에서 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공격하라’는 지령만 내리고 있었다. 자고로 지도자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장에 걸맞지 않은 지시나 명령만 주야장천 하달해 지도자가 되레 ‘악당(빌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견내량에 집결한 조선 수군은 2월 8일 칠천도로 이동해 머물고 9일 새벽에 부산포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하려 했다. 이때 폭우가 내리자 이순신은 칠천량과 가덕도에 진을
이순신은 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전 출전 때보다 전선의 수를 두배가량 늘렸다. 하지만 원균은 3차 출전 때와 똑같은 7척의 판옥선만 갖고 있었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민생경제가 말이 아닌 지금,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준비된 지도자’가 있을까.임진년 7월 13일. 3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아울러 육지의 전투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왜적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했다. 9차례의 승리를 통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달라진 건 딱히 없다. 여야 정치권은 여전히 쌈박질 중이고, 경제는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민생을 돌볼 여유도 없다. 어떤 당은 입방정을 떤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고, 어떤 당은 돈봉투에 코인까지 아주 난리다. 이럴 때일수록 진짜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여수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대의 탐보선이 달려와 전라도사 최철견의 서간을 전달했다. “4월 그믐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
2002년 대선자금 차떼기 사건이 불거졌다. 10년 후인 2012년 그 당에서 2008년 전당대회에서 오간 것으로 보이는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우연히 상대적 우위를 점한 반대편 당은 ‘부패한 보수 깨끗한 진보’란 프레임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2023년 바로 그 당에서 ‘돈봉투 사건’이 터졌다. 여기나 저기나 똑같이 부패한 정치권을 보면서 국민은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지체 높은 정치인들은 역사의 무서움을 알기나 할까.선조는 평소에 믿어오던 류성룡을 면직시키기 난처했다. 하지만 동인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이 발발했다는 서인의 주
과거든 지금이든 잘못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은 드물다. 혹자는 꽁무니를 빼거나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아들의 볼썽사나운 학폭 문제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를 둘러싼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문제는 그를 국가수사본부장에 추천했던 경찰청장도, 그의 1차 인사검증을 맡았던 법무부도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거다. 고위 공직자의 태도는 언제쯤 바뀔까. 신임 부산첨사 정발은 부하들과 용감하게 싸우며 대항했으나 왜군 조총 10여발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렇게 부산진의 3000여 장병들은 최후의 1인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
위기의 순간, 지도자에게 필요한 건 결단력이다. 위기를 돌파할 여러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건 지도자의 몫이다. 이런 결단을 위해 필요한 건 측근의 바른 목소리다. 쓴소리를 하는 측근이 많을수록 그 지도자는 합리적인 결단을 내릴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옳은 소리를 늘어놓는 측근을 옆에 두려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조선시대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듯하다. 조정에서 권력싸움을 벌이든 말든, 순신은 제2호 거북선 건조를 밀어붙였다. 한편으론 그동안 수집했던 전쟁의 여러 전조 현상을 정리했다. “동풍이 크게 분 뒤 배 짓는 나뭇조각이
주영국 시인은 전남 신안 어의도에서 태어나 2018년 예편하기까지 35년 동안 공군에 근무하며 기상예보관으로 일했다. 2004년 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회 오월문학상과 2010년 신인상을 받았다. 현재는 한국작가회의 회원과 죽란시사회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 시인: 저는 2004년에 제13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으면서부터 이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때 군인 신분이었는데 군인 신분으로 전태일 정신을 시로 쓴다는 것은 좀 뜻밖이기도 하고 상당히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
한국 정치사에 발을 맞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 이승하(시인ㆍ중앙대 교수) *이 글을 쓰는 데 참고로 한 책은 아래와 같다. 애당초 발표했던 발제문에는 각주를 붙여 일일이 출처를 밝혔지만 각주를 달 수 없는 인터넷 환경이라 책명만 서두에 밝혀둔다. 김근수, 『한국잡지사연구』, 한국학연구소, 1992. 정진석 외, 『한국 잡지 100년』, 사단법인 한국잡지협회, 1995. 최덕교 편저, 『한국잡지백년』 1, 2, 3, 현암사, 2005(재판). 4. 암흑기의 대변인 『국민문학』과 『삼천리』 『인문평론』은 그마나 외국의 작품과 문
군대는 상명하복上命下服을 생명으로 합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무조건 자신의 명을 따르라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상명上命이 결정되기까지, 부하들과의 충분한 의견수렴 과정을 거쳤습니다. 아래는 임진왜란 발발 직후부터 이순신의 첫 출전까지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임의로 해석을 더한 부분은 없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전서에 수록된 이순신의 장계와 「난중일기」 그대로입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간순으로 재배치했습니다.4월 15일 일본군 부산포 도착 2일 후 : 이순신은 영남 우수사 원균과 영남 좌수사 박홍으로부터 각각 통첩을 받았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독서문화 축제인 ‘2019 대한민국 독서대전’(이하 독서대전)이 ‘책을 넘어’란 주제로 8월 30일부터 9월 1일까지 청주예술의전당과 고인쇄박물관 일원에서 열린다.출판사 및 독서단체 100여 곳 참여, ‘책을 넘어’ 하나 되는 최대 독서문화 축제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주최하고 청주시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이번 독서대전에는 주제전시 4개, 출판사 부스 60개, 기관독서·도서관 체험부스 40개 등 단체 100여 곳이 참여한다.올해로 6회째를 맞이한 독서대전이 열리는 기간(8. 30.~9. 1.) 동
농군을 동원할 길이 없으니 백성들에게 나누어 병작하게 하고 관에서는 그 반만 거두어들여도 군량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돌산도에 있는 국가 소유의 둔전은 묵은 지 벌써 오래된 곳인데, 그곳을 경작해 군량에 보태야겠다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습니다 … 그리고 20섬의 종자를 뿌릴 만한 면적의 본영 소유 둔전에 늙은 군사들을 뽑아 경작시켜서 토질을 시험해 봤더니, 수확한 것이 정조正租로 5백 섬이나 됐습니다. 앞으로 종자로 쓰려고 본영 성내 순천 창고에 들여놨습니다. - [청설둔전장 1593. 윤 11.17]앞의 글은 둔전 설치를 청하
이순신은 물길과 뱃길에 밝은 어영담을 중용했습니다. 정박할 필요가 있지만 지리적으로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주변에 탐망선을 깔아놓고 배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이순신이 그만큼 지형 정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겁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보고하기를’ ‘…들으니’ ‘…고 했습니다’ ‘…를 상세히 물으니’ 등입니다. 이순신은 정보에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병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병참으로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순신 역시 병참을 중시했습니다.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
이순신이 적을 붙잡아 효수梟首한 일이 많았던 건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하들에게 전투 시에 적의 머리를 베는 것보다 적선을 깨뜨리는 데 집중하라고 당부했던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적의 수급首級, 이를테면 머리는 전공을 평가하는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적의 머리를 베는 데만 골몰하는 원균을 비웃기도 하고, 자신이 확보한 수급을 중국 장수들에게 양보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이순신은 침략전이 아니라 방어전의 영웅이었습니다. 백성과 인명을 중시했으며,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거나 부상당한 사람을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차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