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은 참이고, 거짓은 거짓이다. 참을 거짓으로 알았든, 거짓을 참으로 알았든, 사실관계를 오인했으면 바로잡으면 된다. 지도자도 예외여선 곤란하다. 부서, 회사, 정당, 더 나아가 국가의 지도자라면 잘못이나 실수를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쉽게도 이순신을 미워했던 선조는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네 지도자는 어떨까.이순신은 결국 ‘잘못된 정보로 인한, 잘못된 발끈에 따른, 잘못된 뒤끝 작렬’의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파직에는 복합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부산의 적 진영에서 일어난 화재를
# 이순신은 별별 모함을 다 당했다. “가등청정 등 왜국 장수에게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받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출정하지 않았다” 등 모함의 내용도 다양했다. 문제는 임금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 대부분을 믿었다. # 자고로 지도자는 좋은 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언眞言과 간언間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공천’으로 시끄럽다. 여야 지도자는 과연 진언과 간언하는 사람을 잘 가려서 총선 무대에 올려놓고 있을까.「난중일기」에는 1596년(병신년) 10월 12일부터
서애 류성룡은 당쟁을 유발할 만한 언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순신을 두둔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혹자는 “류성룡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는 말까지 남겼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것에 빗댄 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인들은 정쟁 앞에서 말을 조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국 수뇌부가 반간계로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서행장은 조선 재침공에 앞서 일단 이순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탐해봤다. 그 결과, 조선의 삼도 수군의
테이블 위에서 치러지는 ‘협상’은 피상적이다. 진짜 싸움은 테이블 밑에서 이뤄진다. 누가 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득을 취하느냐가 싸움의 핵심이다. 명나라와 왜나라는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둘 모두 딴생각뿐이었고, 제3국인 조선은 손해만 봤다. 그만큼 대외 협상은 중요하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외국과 맞닿아 있는 한국은 지금 현명한 외교 전술을 펴고 있을까. 4년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명나라와 왜나라의 강화협상은 외견상으론 풍신수길의 ‘일본 왕 책봉’이 화두였다. 명나라는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떠도는 백성이었다. 이런 유민이 가장 안전하게 여긴 곳은 놀랍게도 ‘이순신 군영’이었다. 이순신이 유민을 위해 잠잘 곳뿐만 아니라 농장까지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선조를 따라다니는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자리’가 아닌 ‘마음’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겐 지금 국민을 진짜 위하는 마음을 지닌 리더가 있을까. 선조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1593년 5월 명나라와 왜국은 물밑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선을 완전히 배제했다. 나라의 절반가량인 하삼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를 왜국에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지만,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대신들은 입으로만 대책 마련을 떠들어댔다. 3고高(고물가·고금리·고환율) 장기화로 민생은 벼랑 끝에 몰렸는데, 여전히 입으로만 ‘국민! 국민’을 외치는 어떤 사람들이 오버랩된다.조선이 이순신을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 전 부터 명군과 왜군은 ‘강화교섭’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명나라의 강화사절이 왜나라를 향해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이순신은 전황의 변화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만, 전제가 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신당을 준비한다. 그들은 과연 누굴 위해 창당하려는 걸까.왜군은 무려 8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펼쳤으나 진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왜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1593년 4월 9일.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은 왜군의 수장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심유경은 “한양에서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선 조정은 애먼 결정만 내리고 있었다. 밀실 합의의 폐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대부분 신당 창당 건이고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누굴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왜군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우선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병력도 왜란 초기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승전보를 올렸다. 이순신은 부산 바다에서 연일 승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의주로 도망쳤던 선조는 평양으로 다시 내려왔다. 이처럼 세상을 이끄는 건 몇몇 소수의 권력자가 아니다.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세상을 리드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우리나라 곳곳엔 그런 리더들이 있는가. 권율이 진을 치고 있는 행주산성에는 전라도 군사 7000명, 방어사 조경이 거느린 군사 3000명, 전라도 처영의 승군 1000명, 행주산성 부근의 민병 1000명 등 총 1만20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
날씨가 좀처럼 받쳐주지 않았다. 부산포로 향하던 조선 연합함대는 거친 날씨 탓에 번번이 바다에서 발이 묶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공격하라’는 지령만 내리고 있었다. 자고로 지도자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현장에 걸맞지 않은 지시나 명령만 주야장천 하달해 지도자가 되레 ‘악당(빌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가. 견내량에 집결한 조선 수군은 2월 8일 칠천도로 이동해 머물고 9일 새벽에 부산포를 목적지로 삼아 출발하려 했다. 이때 폭우가 내리자 이순신은 칠천량과 가덕도에 진을
조선이 요청한 지원군의 제독은 ‘이여송’이란 인물이었다. 그는 몇번의 전쟁에서 왜군을 상대로 승리하자 행동을 가벼이 했다. 하지만 그런 가벼움 뒤에선 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이여송은 왜군의 전략에 걸려들어 대패하고 말았다. 언행이 가벼운 지도자는 십중팔구 실패한다. 지도자라면 말 한마디에도 무게를 실을 줄 알아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내 정치권에서 저급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들은 정말 지도자급일까. 명나라 영하 지역 푸베이(몽골 장수)의 반란은 6개월 만인 1592년 9월 17일에 진압됐다. 진압에 나섰던 이여송은 조선이 요청한
1592년 9월 1일. 명나라와 왜나라가 ‘휴전’에 합의했다. 명나라든 왜나라든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합의 과정에 ‘조선’은 없었다. 요즘 말로 패싱을 당한 셈이었다. 가정이긴 하지만, 이순신의 선전이 없었다면 조선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정은 순신을 두고 분열하기 바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높으신 양반들은 ‘분열’이 습관인 듯하다.이순신은 부산포해전의 승전 보고서를 조정에 올리면서 별도의 장계를 올렸다.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을 이대원李大源의 사당에 함께 모셔달라는 청을 담은 장계였다. 그
여기 한 리더가 있다. 아랫사람을 파트너로 여긴다. 아랫사람의 공功은 버리고, 과過는 취한다. 이순신이 이런 유형을 대표하는 리더다. 여기 또다른 리더가 있다. 아랫사람을 부품처럼 여기고 부린다. 공功은 철저하게 자신이 취하고, 과실過失은 떠넘긴다. 이런 리더가 있을까 싶지만 실제론 숱하다. 당신의 리더는 어떤 유형인가.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 연합함대는 9월 1일 새벽, 부산포를 향해 출항했다. 장림포에서 부산포로 가는 첫 길목은 과거에 몰운대라고 일컬어지는 화준구미다. 여기서 발견한 5척의 왜선을 수장시키고 적군 500명을 제거했
이순신은 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전 출전 때보다 전선의 수를 두배가량 늘렸다. 하지만 원균은 3차 출전 때와 똑같은 7척의 판옥선만 갖고 있었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민생경제가 말이 아닌 지금,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준비된 지도자’가 있을까.임진년 7월 13일. 3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아울러 육지의 전투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왜적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했다. 9차례의 승리를 통
# 이순신의 함대는 무적이었다. 왜군과 아홉차례 만나 모두 이겼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왜군이든 패잔병이든 섬멸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진행했다. 휘하 장수들이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육군과의 협조체계, 군졸의 피로 등 복합적인 변수를 감안한 결과였다.# 당신의 리더는 어떤가. 실적에 쫓겨 성급한 결정을 내리진 않는가. 현재의 국가 지도자들은 또 어떨까. 먼 미래를 보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을까.안골포 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9전 9승을 기록한 이순신은 밤이 되자 전함대를 몰고 포구 밖 10리(1
적막이 흐르던 의주 행재소에 뜻밖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왜군의 진격을 걱정하던 선조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순신을 정1품에 제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서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 동인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든 당파싸움이 문제다. 친윤, 반윤, 친명, 반명…, 공교롭게도 지금 정당도 똑같은 상황이다.한산대첩을 이끈 이순신은 패배하고 도망가는 14척의 왜적 함선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문 데다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견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1592년 어느날, 풍신수길은 한통의 전갈을 받았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연전연승을 벌이고 있지만, 바다에선 7전 7패를 기록 중이란 내용이었다. ‘이순신’이란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챈 풍신수길은 몇몇 지휘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순신을 죽여라!” 풍신수길은 왕이 아닌 이순신을 ‘진짜 리더’로 본 모양이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는 전 현감 박홍춘朴弘春, 전 봉사 김응충金應忠과 더불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울산읍을 회복했다.진사 정세아鄭世雅는 영천에서,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