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는 12월 초,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주말 없이 일하다보니 몸이 삐거덕거립니다. 비영리기관에서 의뢰한 가족캠프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 뿌듯한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좀 쉬고 싶다’며 아우성을 칩니다. 출장길에 동행했던 딸아이도 덩달아 안달복달입니다. 출장 가기 전 제가 약속 하나를 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끝나면 근처에 있는 온천 물놀이장에 가자.” # 몸상태를 보니 과연 물놀이장에 갈 수 있을지,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냥 집에 올라가자 말하고 싶지만 반짝이는 딸아이의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
# 어릴 때 전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유는 두개였던 것 같습니다. 아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산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 그때만 해도 산에서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이었죠. # 막 10살이 됐을 때로 기억됩니다. 등산을 가는 날인데 아빠는 가방에 코펠과 버너를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저에게 아빠는 “이젠 라면을 끓여먹을 수 없다는구나”라면서 기사 한토막을 읽어줬습니다.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계곡이나 정상부 가리지 않는 취사 인파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중략)…이어 1990년 11월 15일
#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을 마쳤습니다. 날도 풀렸겠다 싶어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 봅니다. 밤공기마저 춥지 않은 걸 보니 봄이 동네 문지방을 넘으려나 봅니다. 저 멀리 편의점이 보입니다. 문밖까지 불을 환히 밝히고 가판대에 무언가를 잔뜩 쌓아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 밸런타인데이구나.”# 이벤트를 잘 챙기는 편도 아니고 ‘초콜릿은 몸에 좋지도 않다’는 생각에 가판대 앞을 무심히 지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것이란 걸 편의점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혹시 아내가 초콜릿 하나
# S전자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출시했습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특별한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약정 끝난 지 오래된 제 휴대전화를 자꾸 만지작거립니다. ‘아직 잘되는데 굳이’란 생각과는 달리 눈길이 갑니다. 짬날 때마다 슬쩍슬쩍 검색해 봅니다. 그래서 혜택이 뭐라고? 얼마라고 그랬지?# 아차.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전화를 받다가 손이 미끄러졌을 뿐입니다. 휴대전화는 때마침 정확하게 액정 부분으로 낙하했습니다. 화면을 켜봅니다. 상단에 하얗게 빛나는 한 줄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땅따먹기처럼 조금씩 화면을 점령해 갑니다. 저녁
# 올겨울은 눈이 참 많이 옵니다. 언젠가부턴 ‘눈 내린 후’의 일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눈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어릴 때 ‘눈만 내리면’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비탈길에서 비닐봉지로 만든 썰매를 타느라, 동네 친구들과 눈싸움을 벌이느라, 해가 지는 것도 잊곤 했죠. 깜깜한 밤, 집에 돌아오면 엉망이 돼버린 옷과 빨갛게 변한 얼굴 때문에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지만, ‘내일 또 눈이 오길’ 기도하곤 했죠. 지금 아이들도 그럴까요? 혹시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진 않을까요?# 늦은 저녁. 놀이터 바닥에 눈덩이
# 출근길을 오가며 마주하는 커다란 옥외 광고탑입니다. 어느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가 꽤 오랜 시간 걸려 있던 자리입니다. 어느날 멀리서 보니 광고판 반쪽이 하얗게 변해 있더군요.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광고판 교체 작업중이더군요. # 때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뀝니다. 빠르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확대합니다. 외줄에 매달린 작업자가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페인트통에 롤러 붓을 푹 담근 다음 팔을 크게 휘젓습니다. 외줄 하나에 의지했지만 힘찬 손짓입니다. 그 손짓에
# 출근길입니다. 집을 나오니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립니다. 멀지 않은 주차장을 우산 없이 뛰어갑니다. 허겁지겁 차에 올라타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숨을 고릅니다. 시동을 켜려고 보니 차창에 단풍잎 하나가 붙어있습니다.# 언제부터 비를 맞았는지 흠뻑 젖은 모습입니다. 유리창에 코팅을 해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불가사리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합니다. 빨간빛에 초록도 남아있고 노란 빛깔도 남아있습니다. 잎 하나에 사계절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가는 게 저만 아쉬운 건 아닌 듯합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유리창에
# “외롭지 않아?” 사진기자 초년병 시절. 취재를 다녀온 제게 한 선배가 했던 말입니다. 선배가 싱글이라 그런가? 뚱딴지 같은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현 아내님)도 있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때라 그런지 외로움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 사실 지금은 종종 외롭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진 찍을 때’ 외롭습니다. 사진은 제게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사진이지만 취미와 밥벌이는 확실히 다릅니다. 일로 촬영할 때면 많은 압박을 받곤 합니다. 확실한 목적성을 가지고 독자와 고객을 만족
# 아내랑 제가 처녀 총각이라 불리던 시절, 롯데월드를 함께 갔습니다. 스릴을 즐기는 저와 그렇지 않은 아내. 저는 아내와 꼭 자이로스윙을 타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론 아내를 꼭 태워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배려심이라곤 1도 없는 구 남친인 남편. 안 탄다는 구 여친 아내를 조르고 졸라 자이로스윙에 함께 탔습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웃으며 이런 식의 농담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 다시 생각해 봐도 나란 녀석, 정말 한심한 놈이었네요.#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이로스윙
# 캄캄한 밤. 동네 주차장 자동차들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맞은편 아파트 외벽 조명에서 반사된 빛입니다. 문득 옛 동네의 모습이 스칩니다. # 원래는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동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고 작은 빌라와 주택들이 사라지더니 신형 브랜드 아파트가 우뚝 섰습니다. 동네 주차장 차들이 빛난 건 아마도 그때부터일 겁니다. 아파트 브랜드를 밝히는 조명이 깜깜한 밤을 뚫고 주차장을 비추기 시작했으니까요. # 세상에 반짝이는 게 너무 많아졌습니다. 어쩔 땐 동네 어귀에서 슬쩍슬쩍 보이던 ‘
#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동네가 있는 길목으로 들어섭니다. 아파트 축대를 타고 덩굴식물이 무성히 올라왔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한 초록의 생명입니다. 가만 보니 풀숲에 흰색을 띤 뭔가가 보입니다. 테이크아웃 종이컵입니다. # 진갈색의 액체는 커피 같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여전히 진한 빛깔입니다. 버리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풀숲 깊숙한 곳에 꼿꼿하게 꽂은 건지, 그냥 던진 건데 저렇게 꽂힌 건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초록의 식물은 생명을 키워가지만 쓰임을 다한 흰색 종이컵은
# 빌딩 위로 비둘기 두마리가 날아오릅니다. 겹칠듯 말듯 가까이 붙어 날갯짓을 합니다. 비둘기를 종종 찍어봤지만 이렇게 딱 붙어서 비행하는 모습은 처음인 듯 합니다. 마치 커플이란 걸 과시하듯 말이죠. # 보이시죠? 바로 그 사진입니다. 두마리가 동시에 날아오르는 순간 찍은 몇장의 사진 중 한장입니다. 커플 비행의 ‘실루엣’이 담겼습니다. # 운이 좋았습니다. 고백하자면 노린 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비둘기 커플’이 담겼습니다. 누군가는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네’라면서 핀잔을 줄지 모릅니다. 뭐,
# 여름 하면 생각나는 풀이 있습니다. 강아지풀입니다. 초록색 빛깔에 보송보송한 잔털이 귀여운 풀입니다. 강아지풀은 개꼬리풀이라고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몽실몽실한 귀여운 강아지 꼬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어릴 적 강아지풀은 재미난 장난감이었습니다. 풀을 쭉쭉 뽑아 팔찌로 만들기도 하고, 간지럼 장난을 치느라 친구를 콕콕 찔러대기도 했습니다. 친구 어깨에 슬쩍 올리곤 “앗, 네 어깨에 송충이가 있어”라면서 깜짝 놀래킨 척을 하기도 했지요. 유년 시절을 함께했던 참 고마운 풀입니다. # 언제부터일까요? 그렇게 많던 강아지풀이 눈에
# 얼마전 늦은 퇴근시간, 지친 몸을 핸들에 기댄 채 신호를 기다립니다.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저 멀리 전광판에서 광고가 나옵니다. 생각 없이 눈길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잼버리 광고였습니다. # 광고 속 자막은 쉴 새 없이 흘러갑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전세계 150여 개국에서 5만명이 모이는 세계 최고의 축제!!(꽈광) 새만금에 모입니다!!(두둥) 전 세계인의 축제, 지금 새만금에서 시작합니다!!!(짜짜잔) # 광고 속에선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유토피아 같습니
# “가장 좋은 카메라는 손안에 있는 카메라다.” 누군가 ‘스마트폰 카메라의 가장 큰 장점이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전 단연코 휴대성이라고 답합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는 법이 별로 없으니까요. 어떤 순간에도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건 카메라가 가진 최고의 기능 중 하나입니다.# 어느날 오후, 북한산 자락. 방금 전까지 장대비가 내려서인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잠시 비가 멈춥니다. 이내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등성이마다 불이 난 것처럼 구름이 피어오릅니다. 산을 감쌉니다. 말 그대로 구름산입니다.
# 딸과 집으로 돌아오는 길, 뜬금없이 아이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백합이 어떻게 생긴 꽃이야?” 저는 어~ 하다가 “하얀 꽃” 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딸아이는 그 정도는 이미 잘 안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묻습니다.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달라니까.” 추가 설명을 할 수 없던 전 민망함에 연신 헛기침만 해댑니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해봤습니다. 뜻밖에도 백합의 색은 하얀색만이 아니고, 종류도 100여 종이 넘더군요. 백합百合의 한자가 ‘흰 백白’이 아닌 ‘일백 백百’을 쓴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일백 백, 합할
# 초등학교 시절 장래 희망은 과학자였습니다. 입으면 무릎까지 내려오는 아버지 와이셔츠를 입고 과학자 가운(아마도 실험복)이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에 가선 과학잡지 뉴턴과 과학동아에 심취하곤 했습니다. 특히 우주 분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자동차를 한시간만 타도 멀미를 하던 꼬맹이는 그렇게 우주선을 타는 꿈을 가졌습니다.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을 주문처럼 외우곤 했죠. ‘블랙홀이 태양계로 오면 큰일일 텐데’라고 걱정하고 ‘화이트홀을 찾아서 도망가야겠다’는 공상도 품었습니다. # 음… 머리가 조금 크고 나서 알아차린 듯합니다. 우주인이 되
# 동네 엘리베이터 공사가 한창입니다. 동별로 돌아가면서 공사 시기가 정해졌는데 저희 동은 하필 더위가 한창인 7월에 걸렸습니다. 한달 동안은 반강제로 다리 운동을 하게 생겼네요. 그나마 다행인 건 올라가야 할 층수가 그리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10층 넘게 올라 다니는 분들을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지요. # 계단으로 오가는 일은 그렇게 일상이 됐습니다. 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택배 등등 출퇴근이 아니어도 계단을 사용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집에 들어와 씻고 상쾌하게 있다 보면 외출은 가급적 삼가게 됩니다. 요즘처럼 푹푹 찌고 습
# 어릴 때 게임을 할 때면 캐릭터를 고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럴 땐 캐릭터의 ‘분석도’를 참고합니다. 스피드, 파워, 체력 등의 요소를 오각형 또는 육각형 형태의 그래프로 나타낸 것입니다. 덩치 큰 우락부락 캐릭터는 힘이 세지만 스피드는 느립니다. 예를 들면, 느리지만 압도적인 파워를 보여주는 스트리트파이터의 ‘장기에프’ 같은 경우입니다. 그의 스크류파일드라이버에 걸리면 체력의 반 가까이 사라집니다. 약점이 큰 만큼 강점도 두드러집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입니다. 모든 것이 좋을 수만은 없다는 걸 그 시절 게임에서 배웠습니다.
# 수저 계급론이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가 사회의 계급을 결정한다는 신조어입니다. 모든 걸 갖추고 태어난 금수저,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흙수저까지 부모의 재력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눠 놓은 겁니다. 요즘은 다이아몬드 수저부터 플라스틱 수저, 나무 수저까지 나왔다고 하니, 계급이 좀 더 세밀하게 나눠진 모양입니다. # 문득 이 노래가 귀를 맴돕니다. BTS가 부른 ‘불타오르네’란 노래입니다. 그냥 살아도 돼 우린 젊기에그 말하는 넌 뭔 수저길래수저수저 거려 난 사람인데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꺼야애쓰지 좀 말어 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