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라는 이름에서 묘한 친근감이 느껴진다면 아마도 교과서 때문일 거다. 관공서가 ‘홍길동’을 예시로 써왔다면 교과서는 오랜 시간 ‘철수’를 예시로 사용했다. 철수는 영희와 함께 시험 시간마다 만나는 단골손님이었다. 철수와 영희가 대화를 나누거나 행동하면, 그 모습을 보고 답을 구하는 식이다.철수는 과목을 가리지 않고 활약하는데, 물리 문제에서 유독 고생할 때가 많다. 문제 속 철수는 고속으로 다가오는 열차 앞에 서거나, 수십 미터 높이에서 떨어지거나, 우주선을 탄 채 운석과 충돌한다. 그래서인지 한때 인터넷에는 철수의 처지를 안타까
12일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시 166편이 공개됐다. 박목월의 장남인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어머니가 모아놓은 원고를 가지고 있다가 공개한 작품이다. 박목월 시인이 작고한 건 1978년이니 46년 만에 빛을 본 시들이다.이번 미발표 원고에는 전쟁의 참상, 사회의 아픔 등 그간 보지 못했던 박목월의 시 세계가 있다. 시집이란 비석처럼 자신의 묘지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을 걸어가던 낭만주의 나그네 박목월은 이제 사라졌다.일체형 PC 하나를 중고로 판매하기 위해서 하드디스크를 정리했다.
밥상 이야기 둘째 가졌을 무렵입니다 하루는 장 보러 나갔다가 왜 그리 칼국수가 먹고 싶던지요 층층시하 먹고 싶은 것 따로 챙길 여유 없던 시절 난데없는 칼국수 생각 참 난감했습니다 배 속 아이는 여전히 칭얼대고 좁은 시장통에 서서 한참 머뭇거리다 칼국숫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 시켰습니다 배 속 아이는 얌전히 기다리고 문밖 소음도 저만큼 물러났습니다 무심코 앉았는데 주방에서 호박 써는 소리 마늘 다지는 소리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누군가 내 밥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문득 몇 해 동안 한 번도 밥상
「전홍식 관장의 판타지 도서관」전홍식 지음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펴냄 판타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을 위한 판타지 도서관이 나왔다. 저자인 전홍식 관장은 초등학교 1학년 판타지와 SF에 빠진 후 2009년 SF&판타지 도서관을 세웠다. 이번 책에서는 톨킨을 비롯한 여러 판타지 세계관에 영향을 준 신화들과 전설, 판타지 하위 장르, 환상 생물과 몬스터, 판타지 속 종족, 직업과 스팀펑크 등의 레트로 퓨처를 소개한다. 텀블벅에서 4월 13일까지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한다. 「백조 2024 봄」백조 편집부 | 노작홍사용문학관 펴냄계간 문예
단 하나의 백자가 있는 방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이었다 이곳에 단 하나의 백자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나는 알았다 그것은 하얗고 그것은 둥글다 빛나는 것처럼 아니 빛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있었다 나는 단 하나의 질문을 쥐고 서 있었다 백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많은 여름이 지나갔는데 나는 그것들에 대고 백자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여전했다 조명도 없고, 울림도 없는 방에서 나는 단 하나의 여름을 발견한다 사라지면서 점층적으로 사라지게 되면서 믿을 수 없는 일은 여전히 백자로 남아 있는 그 마음 여름이 지나가면서 나는 사라졌다 빛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결혼과 출산은 선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가족 구성을 인생의 한 과정으로 여기던 시대는 먼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젊은이들은 경쟁·차별·박탈 같은 사회적 불안 요소를 내세우며 가족을 구성하는 일도 출산도 멀리하고 있다. 심각한 건 이로 인해 마주할 인구절벽이다.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한 여자가 가임기간 15~49세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7대로 추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최저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곧 0.6대로 내려앉을지 모른다.정재훈 서
대체역사를 다루는 웹소설에서 국가 건설과 경영은 단골 소재다. 주인공들은 과거로 돌아가 왕이나 귀족이 돼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데 집중한다.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패권국으로 자리 잡는 모습에서 독자는 큰 대리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불안이 생긴다. 소설이 끝난 후 주인공이 세운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서다. 찬란한 문화와 힘을 자랑했던 국가라도 쇠락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무수한 재난, 지도자의 자질 부족, 주변 국가의 발흥 등 수백년에 걸쳐 등장할 위협요소가 가득하다.그래서인지 주인공들은 유훈遺訓을 남겨 후손이 잘못된 역사를
블루칼라(생산직에 종사하는 육체 노동자)와 화이트칼라(사무직에 종사하는 노동자). 일견 상반된 듯하지만, 이는 직업군의 성격을 분류한 것에 불과하다. 일에 대한 자부심과 대가와 성취감은 다를 바 없어야 한다. 하지만 위험한 업무 환경과 고강도의 육체적 노동 등을 놓고 보면, 블루칼라 작업 현장이 훨씬 더 ‘거칠고, 험한 일터’임에 분명하다.남녀 성비에도 차이가 보인다. 실제 남성이 다수인 블루칼라 직종에서 여성이 자리를 잡고 일을 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화물차 기사·용접 노동자·목수·철도차량 정비원·주택 수리 기사 등 ‘힘 좀
조동진세상 사람들 지치고길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나이제슬픔도 지치고그래도 나는 혼자 이 해변에 남아야 했고바람도 지치고10년이 지치고내가 불던 하모니카도 끝나고누가 언제까지 이 지상에 있나나만 홀로 바다에 가고바람만 홀로 세계에 남고그 언젠가 눈물도 메마른 안개 낀 대지이제아픔도 지치고그래도 나는 혼자 이 저녁에 남아야 했다 「21세기 전망 제5집-시의 몰락, 시정신의 부활(1996년)」가수 조동진을 좋아해 카세트테이프가 있던 시절에는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다. CD가 나오자 당연히 구입해 듣고 또 들었다. 행복한 사람, 언제나 그
인류세라는 것이 있다. 인류세는 인류가 지구 지질이나 생태계에 미친 시대를 이야기한다. 인류세의 지질은 인류의 흔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핵실험 이후의 방사능, 플라스틱, 닭뼈가 땅에 묻히면서 생겼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인류가 생겨난 이래의 흔적이 땅에 남는 것. 그것이 바로 인류세다. 보통 인류세는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를 상징한다. 하지만 나는 인류세를 생각할 때마다 거대하고 오래된 역사책의 측면을 떠올린다.누구에게나 지층이 있다. 그것은 경험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다. 레코드가 테이프가 되고 MP3 기기가 스마트폰이 됐듯
「가슴이 먼저 울어버릴 때」박노식 지음 | 삶창 펴냄시인은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는다. 인간이 아닌 것들이 우는 소리. 그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시인의 가슴 역시 울음이 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울음은 자기 감성에 빠져버려 나온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것을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설움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그 설움을 남을 설득하거나 남에게 주장하는 데 쓰지 않는다. 그의 설움은 스스로에게 말하는 ‘독백’으로 완성한다. 「8월에 만나요」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펴냄노벨 문학상 수상
잉여의 시간이곳에서 나는 남아돈다너의 시간 속에 더 이상 내가 살지 않기에오후 네 시의 빛이무너진 집터에 한 살림 차리고 있듯빛이 남아돌고 날아다니는 민들레 씨앗이 남아돌고여기저기 돋아나는 풀이 남아돈다벽 대신 벽이 있던 자리에천장 대신 천장이 있던 자리에바닥 대신 바닥이 있던 자리에지붕 대신 지붕이 있던 자리에알 수 없는 감정의 살림살이가 늘어간다잉여의 시간 속으로예고 없이 흘러드는 기억의 강물 또한 남아돈다기억으로도 한 채의 집을 이룰 수 있음을가뭇없이 물 위에 떠다니는 물새 둥지가 말해준다너무도 많은 내가 강물 위로 떠오르고두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이 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유년은 봄날 같았고, 지나고 나면 모두 지금보다 반짝반짝 빛났을 때였다. 금아琴兒 피천득은 이 시기를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라 했다. “유치원 시절,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박노해 시인은 인간에게 있어 평생 지속되는 ‘결정적 시기’가 있는데, 그 첫번째가 바로 ‘소년 소녀 시절’이라고 말한다. 인생 전체를 비추는 가치관과 인생관과 세계관의 틀이 짜이고, 저 광대한 세상을 걸어 나갈 근원의 힘을 기르는 때. 아
술술은 물이외다, 물이 술이외다.술과 물은 사촌이외다. 한데,물을 마시면 정신을 깨우치지만서도술을 마시면 몸도 정신도 다 태웁니다.술은 부채외다, 술은 풀무외다.풀무는 바람비(風雨)외다, 바람개비는바람과 도깨비의 어우름 자식이외다.술은 부채요 풀무요 바람개비외다.술 마시면 취케 하는 다정한 술,좋은 일에도 풀무가 되고 언짢은 일에도매듭진 맘을 풀어주는 시원스러운 술,나의 혈관 속에 있을 때에 술은 나외다.되어 가는 일에 부채질하고안 되어 가는 일에도 부채질합니다.그대여! 그러면 우리 한잔 듭세, 우리 이 일에일이 되어 가도록만 마시
“저는 설운도와 빅뱅, 르세라핌을 좋아합니다!” 아이돌 지망생이 소속사 면접에서 좋아하는 가수를 말하라고 했을 때 이렇게 답변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음악을 많이 듣지 않아 알고 있는 가수 이름을 모두 댔거나 음악 취향이 오락가락하거나 아예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15살 아니면 16살쯤 됐을까. 날 찾아온 학생은 베이지톤의 스웨터를 말끔하게 입고 있었다. 낯을 가리는지 고개를 숙이고는 자기소개를 했다.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어서 왔어요.” 웅얼거리듯 이야기하는 아이를 보며 난 20년 전 혜화동을 생각했다. 나도 저 나이쯤
쉽게 씌어진 시 부끄럽지 않아도 되지만 부끄럽다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 2」프랭크 허버트 지음 | 황금가지 펴냄개봉일 예매량 31만장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막을 연 영화 ‘듄’. 동명의 원작소설을 쓴 프랭크 허버트의 단편집이다. 「듄」 시리즈 중 유일한 단편소설이자 듄의 행성 ‘아라키스’의 안내서를 담은 「듄으로 가는 길」을 수록했다. 이 밖에도 「듄」에서 여성들의 비밀 조직인 ‘베네 게세리트’의 원형이 등장하는 우주첩보물 「건초 더미 작전」 등 듄의 세계관 속 주요 설정들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들을 담았다.「황색예수2」김정환 지음 | 문학과 지성사 펴냄
민주주의 한계를 지적할 때 사람들은 종종 독일 나치당을 소환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지형, 당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고려해야 마땅하겠지만,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얻었다는 사실은 명백해서다. 나치당은 1933년 3월 독일 총선에서 43.9% 득표율로 집권했다. 권력을 거머쥔 나치당은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인류사에 다시 없을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때문인지 ‘만약 히틀러가 없었다면’이란 상상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때 민주주의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는 아니다. 웹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을 못 버는 직업은 무엇일까.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에 따르면, 가난한 직업의 2위와 3위는 수녀와 신부다. 이들의 평균 연봉은 각각 1262만원, 1471만원쯤 되니 한달로 치면 대략 100만원 버는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200만원을 버는 세상에 너무 적게 버는 것 아닌가 싶다가도, 수녀와 신부의 의식주를 성당에서 해결해준다는 점을 감안하면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일도 아니다.그럼 가장 돈을 못 버는 직업은 무엇일까.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1년 평균 542만원을 번다. 한달에 50만원도 못 번다는 것이다.
우린 ‘먹는 것’에 민감하다. 건강에 직결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식재료나 가공식품을 살 때면 원산지, 영양 성분, 원재료 등을 꼼꼼히 살핀다. 식품첨가물도 눈여겨본다. 기준이나 규격이 있다 해도 왠지 ‘화학적’ 합성품이 신경 쓰이곤 해서다.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늘 고민거리다. ‘입는 것’은 어떨까. 옷은 ‘먹는 것’ 다음으로 일상생활에서 밀접하게 사용하는 소비재다. 포장 식품 라벨에는 성분 목록이 있지만 옷은 그렇지 않다. 이는 옷을 만들 때 ‘섬유 자체 말고 다른 성분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라고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