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도시의 밤, 네온사인 불빛은 자동차에 맺혀 번진다. 흐르는 빛은 물감이 번지듯 창에 스며든다. 택시를 모는 사내의 눈동자는 불빛을 따라 좌에서 우로 흔들리고. 불면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사내는 택시를 운전하며 중얼거린다. “쓰레기는 밤에 쏟아져 나온다. 매춘부, 깡패, 남창, 게이, 마약중독자 등등, 인간 말종들이다. 언젠가 저런 쓰레기를 씻어내 버릴 비가 쏟아질 것이다.” 22대 총선을 치른 날, 학생들과 함께 마틴 스코세이지가 1976년 연출한 영화 ‘택시드라이버’를 봤다. 굳이 총선을 염두에 두고 본 영화는 아니었다.
민심의 회초리는 매서웠다. 4ㆍ10 총선은 야당 압승과 여당 참패로 귀결됐다. 더불어민주당과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175석, 여기에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진보당까지 포함하면 192석의 ‘거야’가 탄생했다.총선에서 표출된 민의는 안정보다 견제와 변화였다. 선거기간 내내 정권심판론이 다른 이슈를 압도했다. 국민의힘이 ‘이(이재명)ㆍ조(조국) 심판론’으로 맞서며, 각종 초대형 공약을 쏟아냈지만 통하지 않았다.여당의 참패는 집권세력 전체에 대한 심판 성격이 짙다. 국민은 소통과 타협을 외면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일방통
22대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3월 28일, 여야 정당들은 네거티브 공방을 주고받았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개같이 하는 사람이 문제”라고 말했다. 야당들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고 응수했다. 사실 그간의 여야 행태를 보면 유권자인 국민은 안중에 없었다. 역대 최악의 공천에다 공약도 상당 부분 과거 내세웠던 것을 재활용했다. 실현 가능성이 떨어지거나 후유증까지 우려되는 선심성 포퓰리즘 정책이 부지기수다. 여야 정당은 서로 베낀 듯 비슷한 개발·선심성 공약을 내세우면서 정작 재원에 대해선 말이 없다.국민
비극을 마주할 때 우리는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한다. 비극의 주인공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고통받는 자의 목소리를 껄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린 슬픔에 무지한 사람이 돼간다. 타인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까.무엇을 선택해도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전쟁은 인간에게 가혹한 선택을 강요한다. 미국 작가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피의 선택」은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내몰린 자의 딜레마와 후유증을 그린 소설이다. 1947년 미국 남부 출신 청년 스팅고는 꿈에 그리던 뉴욕에 입성한다. 스팅고는
민주주의 한계를 지적할 때 사람들은 종종 독일 나치당을 소환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지형, 당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고려해야 마땅하겠지만,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얻었다는 사실은 명백해서다. 나치당은 1933년 3월 독일 총선에서 43.9% 득표율로 집권했다. 권력을 거머쥔 나치당은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인류사에 다시 없을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때문인지 ‘만약 히틀러가 없었다면’이란 상상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때 민주주의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는 아니다. 웹
# 정치적 선동은 쉽다. 그게 거짓이라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면 몇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반박에 설득력이 있어도 선동을 부추긴 쪽은 불리하지 않다.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할수록 ‘거짓 이미지’만 남기 때문이다.# 이런 선동은 나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주로 썼던 전략이다. 그런데 적대적 사고와 언어가 판치는 대한민국 총선 정국에서 여야 정치권이 ‘괴벨스의 선동 전략’을 꺼내 들고 있다.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독일 라인란트 출신의 한 청년은 애국심에 불타 군대에 자원했지만 참전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이 사진 앞에서식사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인간의 증오심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이승하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지훈상, 편운상 등 수상「공포와 전율의 나날」, 문학의전당, 2015‘무심無心하다’는 두가지 뜻
1945년, 1만명의 독일인이 소련의 잠수함 공격으로 나치 간부의 이름을 딴 구스틀로프호號에서 사망한다. 「양철북」으로 나치즘을 비판했던 작가 귄터 그라스는 구스틀로프호 사건을 바탕으로 「게걸음으로」를 썼다. 그가 ‘네오나치’를 옹호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독일 사회에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합의점을 찾아갔다. 골목에서 벌어진 참사를 두고도 ‘합의점’을 못 찾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1945년 1월 소련군 공세에 밀린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했다. 소련군은 점령 지역에서 가혹한 보복행위를 일삼았다. 겁에 질린 독일
195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세계를 두 동강 냈다. 내 편이 아니면 다른 편이며 적을 끝장내기 전에는 나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인류에게 남은 건 절멸밖에 없어 보였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증오하는 상대를 박멸하려는 이들로 넘쳐나는 우리네 정치꾼들이 읽을 만한 책이다.1952년 11월 1일, 미국은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태평양 에니위탁 환초에서 시행했다. 2년 후인 1954년 3월 1일엔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캐슬 브
칼국수 마음에 칼을 품고 있는 날에는 칼국수를 해먹자 칼국수 날은 날카롭다 식칼, 회칼, 과일칼 허기 느끼며 먹는 칼국수에 누구나 자상刺傷을 입는다 그럼 밀가루 반죽을 잘해서 인내와 함께 홍두깨로 고루 밀어보자 이때 바닥에 붙지 않게 마른 밀가루를 서너 겹 접은 분노와 회한 사이 슬슬 뿌리며 도마 위에서 일정하게 썰어보자 불 끈 한석봉 붓놀림 같이 한눈팔아서는 안 된다 특히 칼자국 난 면발들이 펄펄 끓인 다시물에 뛰어들 때 같이 뛰어들지 않지 않도록 주의하자 고통이 연민으로 후욱 끊어오를 때 어린 시절 짝사랑 같은 애호박 하나쯤 송
지금도…… 이 말을…… 당신께…… 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뱉고 말면 어쩌면 당신은 저를 증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지요. 당신이나 저나 그 두 감정이 서로 동시에 마음을 언덕 삼아 맞대고 있지 않았나요?[풍금이 있던 자리 일부]유년 시절 글이 안 써지는 밤이면 신경숙의 작품을 필사하곤 했다. 파란색 노트에 만년필 심을 꾹꾹 눌러가며 글을 옮겨 적으면 손가락 끝이 말랑말랑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나에게 문학이란 ‘신경숙’이었던 시절이 있었다.2015년 신경숙
아버지를 통과할 때정상미오빠와 나는 줄곧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오랜만에 나타나 잘못을 불라 심문하던 숨어도 매번 찾아내 종아리에 피멍 들게 한, 악마 따위 없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스케치북엔 그가 없고 아.버.지.란 말 지웠다 시커먼 그림자는 쉽게 죽지 않아서 까끌한 수염에 자다가 소스라쳤다 몰래 다가와 딸의 볼을 훔치던 그 사람오래된 내 토막잠은그때부터 시작되었다회초리는 숨겨도 걸어 나왔다 좀비처럼아궁이에 숨었다가 치마 끝단에 끌려 나와 숯검댕이 얼굴로 가슴까지 까매진 남매, 그가 처음 아버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선을 넘나들며
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2022년 작품 ‘이니셰린의 밴시(The Banshees of Inisherin)’는 제목만큼이나 독특하고 흥미롭다. 그해 베니스 영화제를 석권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여러 부문에서 최고의 후보에 올랐다. 더스쿠프의 ‘영화로 본 세상’, 이번엔 이 영화를 펼쳐봤다. 영화는 ‘이니셰린’이라는 아일랜드 가상假想의 작은 섬에서 벌어지는 파우릭(콜린 파렐)과 콜름(브렌던 글리슨)이라는 두 친구 사이에 절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소 황당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룬다.두 인물이 벌이는 짓들은
「집단 착각」토드 로즈 지음|21세기북스 펴냄 “집단 지성은 왜 집단 무지성으로 전락하는 걸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분명 자신에게 해가 되는데도 다수의 선택에 따라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는 사례를 자주 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집단의 가치관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이 책은 우리가 왜 집단에 순응하고 그런 순응이 어떻게 집단 착각을 낳는지부터 집단 착각에 휘둘리지 않는 지혜를 찾도록 돕는다.「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나 타고 다닐걸」손화신 지음|아르테 펴냄‘도로
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가치를 신봉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원장에게 진보적인 플린 신부는 ‘불온’한 요주의 인물이다. 당연히 적개심을 품는다. 플린 신부는 부임 첫 강론부터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듣기에 조금 ‘수상한’ 발언을 한다.플린 신부가 발언한 내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난파선에서 탈출해 구명정에 혼자 남은 선원이 자기가 배운 대로 별자리에 의존해 바다를 헤쳐나간다. 그러면서 선원은 계속 자신이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한다. 외톨이가 되면 별자리까지 의심스러워진다. 우리 모두 그렇다.”당연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조금 특별하다. 적갈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조심조심 그리는 누군가의 손을 계속 보여준다. 그 조심스러운 붓질이 완성한 그림은 팔다리의 관절을 꺾은 듯한 기묘한 사람의 형상이다. 그 그림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Cave of Swimmers)’ 속에 그려져 있는 신석기시대 동굴벽화 그림이다. 종이 위에 그 그림을 모사模寫하고 있는 손이 알마시인지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캐서린인지는 불분명하다.‘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대개 영화의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 지음|휴머니스트 펴냄“성폭력 감형 패키지를 팝니다.” 반성문 2부, 탄원서 2부, 근절서약서 1부, 심리교육수료증(3일),상담사의견서(3일), 소감문…. 이른바 감형 컨설팅 업체가 만든 55만원짜리 감형 패키지다. 이 상품은 온라인에서 손쉽게 구매할 수 있고, 법정에서 성범죄자의 감형 사유로 활용된다. 성범죄자를 지원하는 게 하나의 산업이 됐다는 거다. 이 책은 성범죄자가 감형을 ‘구매’하는 실태를 고발한다. 「정보의 지배」한병철 지음|김영사 펴냄이 책은 우리가 매 순간 접하는 ‘정보’가 실제로 무엇을
대통령의 ‘이 **’ 욕설 논란이 끝내 현 정부가 소통 창구라고 자찬했던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을 중단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말 한마디로 나라가 흔들리는 것도 촌극이지만, 그 말 한마디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정치권도 우스꽝스럽다. 여기 단어 하나를 다르게 해석해 주목받은 소년이 있다. 높으신 양반들이 이 소년의 지혜를 배우면 어떨까. 아직 어리지만 풍채와 용모에서 진작부터 남다른 기상이 넘쳤던 순신. 어느날 한 아이에게 「통감삼권」이라는 책을 가르치고 있었다. “한나라 여후呂后가 척부인戚夫人의 팔다리를 끊은 뒤에 뒷간에 집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의 모습을 그 유명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표현한 유치환 시인. 경남 통영 출신의 시인은 남해와 포구를 보며 이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경상남도 하동은 ‘하동 팔경’을 갖고 있을 정도로 자연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남쪽으로는 남해, 북쪽으로는 지리산을 끼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어 다양한 자연 경관을 볼 수 있는 지역이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화개장터와, 조선시대 전통 생활상을 유지하는 청학동 역시 이곳 하동에 있어 흥미로운 볼거리도 많은 지역이다.경상북도 김천에서 자란 이승하 시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는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마무리 짓는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홍보하는 국영방송사를 폭파하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날려버리는 장면은 뜻밖이다.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열차에 화약을 가득 실어 출발시킨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순간 밤하늘을 덮은 폭죽은 그대로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놀이가 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모여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