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1594년 10월 조선 조정이 거제도 일대에서 진행한 ‘왜적 소탕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 최초의 수륙합동작전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지도자들의 결함에 있었다. 총사령관을 맡은 윤두수, 현장 사령관 권율은 전쟁터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주둔하는 우愚를 범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총선을 앞두고 ‘국민’을 입에 달기 시작한 정치꾼 중에서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몇이나 될까.좌의정 윤두수가 선조를 움직이게 한 배경에는 원균이 있었다. 원균은 자신의 상관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건너뛰고 바로 사
1594년 봄, 이순신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서 날아온 패문牌文(통지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적을 치지 마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는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어쩔 땐 미국, 또 어쩔 땐 중국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때와 뭐가 다를까. 힘이 없으니 ‘전략적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오랜 외교 전술은 옳은 걸까.이순신은 1594년 2월 13일 선조의 출전 명령서를 받고 경남 창원의 저도에서 소비포 만호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1593년 5월 명나라와 왜국은 물밑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선을 완전히 배제했다. 나라의 절반가량인 하삼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를 왜국에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지만,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대신들은 입으로만 대책 마련을 떠들어댔다. 3고高(고물가·고금리·고환율) 장기화로 민생은 벼랑 끝에 몰렸는데, 여전히 입으로만 ‘국민! 국민’을 외치는 어떤 사람들이 오버랩된다.조선이 이순신을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 전 부터 명군과 왜군은 ‘강화교섭’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명나라의 강화사절이 왜나라를 향해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이순신은 전황의 변화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만, 전제가 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신당을 준비한다. 그들은 과연 누굴 위해 창당하려는 걸까.왜군은 무려 8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펼쳤으나 진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왜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영화 속 간호사 해나(Hana)는 선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해나가 돌보는 부상당한 병사들은 해나의 선하고 상냥한 미소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병사들은 해나에게 키스 한번만 해주면 고통도 잊고 잠도 잘 올 것 같다고 보챈다. 성희롱으로 영창에 갈 만한 작태들이다.해나는 그런 병사들에게도 상냥한 미소를 잃지 않고 ‘마지막’이라며 키스해 준다. 성희롱일 수도 있는 부탁을 해나는 ‘선의’로 받아들인다. 지켜보던 모든 병사가 자기도 해달라고 아우성친다. 해나는 팬들의 사인 요청을 모두 들어주지 못하는 스타처럼 미안한 미소를 짓고 빠져
이순신은 승전고를 울리며 기고당당하게 한산도로 돌아왔다. 바로 이때가 이순신 수군의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육로 제장과 조정에 있는 일부 당인들이었다. 이순신은 이렇게 ‘역심을 품은 장수’라는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남해현령 기효근이 영등포 앞바다에서 나오는 적선 1척을 나포했다. 명나라 병사 2인과 일본 병사 8인이 실려 있었
왜란을 맞아 위급존망한 시기에 이순신은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경상·전라·충청 삼도 연해의 각 읍, 각 관포, 각 도서, 각 진보에 전쟁으로 떠도는 백성을 모아 농사를 짓게 했다. 선조 이하의 조정대관들이 공담공론으로 쓸데없는 당파싸움을 하면서도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던 건 이 때문이었다. 1593년 10월 4일 선조는 한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때 일본군
이립(而立ㆍ서른)의 나이에 창업을 했다. 도메인 등록 사업이라는 신천지를 열어 15년째 업계 1위 자리를 지켰다. 이청종 후이즈 회장. 새로운 플랫폼 비즈니스를 준비 중인 그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개척하면 블루오션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소프트웨어(SW) 최강국이 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 회장과 만났다. “차별적인 기능을
[CBS The Scoop] 순신은 한산도 수루 위에서 매양 달 밝고 한적한 밤이면 시사를 살폈다. 여러 방면으로 걱정이 많았다. 창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 밤은 시조를 지어 읊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유진한 뒤가 안전지대라는 소문을 들은 삼남 유민은 난을 피하여 남부여대1)하며 부로휴유2)하고 순신의
순신이 제만춘에게 말했다. “너는 용력이 과인하고 활솜씨가 뛰어나니 마땅히 활을 쏘다가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함이 옳거늘 적에게 사로잡혀 수길의 비서관과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이 나라 신하로서의 절개를 버린 것이다.” 고개 숙인 제만춘은 순신의 부대장이 돼 군공을 많이 세웠다. 조정에서 이순신의 선봉장 광양현감 어영담을, 독운어사督運御史의 무고를 듣고
제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신데, 올해 나이 여든하나입니다. 임진년 초에 다행히 별일 당하지 않고, 목숨을 보존하셨습니다. 바닷길을 이용해 남쪽으로 내려가 순천 지방에 거처를 정하고 사셨습니다. 당시는 저희 모자가 단지 서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뿐 다른 생각이 없었습니다. (중략) 얼마 전 집에서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어머님이 “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