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의 길에서도 이순신은 민중의 존경을 받았다. 헛된 대접을 받지 않았고, 자신을 받드는 이들에게도 ‘청렴을 지킬 것’을 주문했다. 이순신을 돕는 이들이 다른 사람의 대접을 받고 왔을 땐 엄하게 ‘회초리’를 들기도 했다. 심지어 한 스님의 ‘짚신’ 선물까지 값을 치르고 받았다. 이순신은 모름지기 지도자가 어때야 함을 몸으로 보여준다. 4·10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금배지들이 배워야 할 덕목이다.이순신이 백의종군에 나서는 길에는 둘째 아들 울과 조카, 그리고 심부름 등을 해주는 몇명의 종들이 동행했다. 여기에 호송임무를 맡
권력은 꽃과 같다. 권력을 잃는 순간 이내 시들어서다. 그래서 직職을 잃은 후에도 존경받고 싶다면 권력을 갖고 있을 때 고개를 더 숙여야 한다. 그게 리더의 책무다. 백의종군 후에도 존경과 신의를 잃지 않은 이순신은 리더의 삶이 어때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것저것 따져보던 선조는 1597년 음력 3월 마지막 날이 돼서야 ‘이순신의 석방과 백의종군’을 결정했다. 다음날인 4월 1일 아침, 이순신은 옥문을 나와 숭례문 밖에 있는 민가에 도착했다. 둘째 아들(울)과 조카(봉·분), 윤사행, 원경 등이 그를 맞았다.이때 판서 윤자신尹自新
어떤 권력자든 쓴소리를 하는 이를 옆에 둬야 한다. 간신은 달콤한 말을 하지만, 충신은 세상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해서다. 정유재란을 앞두고 이순신을 체포한 선조의 옆엔 강직한 신하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이란 배는 언제나 민심과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이는 조선에만 국한한 말이 아니다. 현시점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네가 적장 가등청정에게 뇌물을 받고 사로잡지 않고 놓아 주었지? 바로 자백하라!” 윤근수가 다그쳤다. 이순신은 “나는 할 말을 다 하였소”라며 입을 닫아버렸다. “고문을 시작하라!” 윤근수가 소리치자 금부
조선 조정은 끝내 이순신을 ‘심판대’에 세웠다. 형조좌랑 강항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는데도, 조정 대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한 공정하지 않은 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권력자들은 공정한 심판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이순신이 하옥된 지 하루 만인 1597년 3월 5일부터 국문이 시작됐다.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뒤집어쓴 채 금부 나졸들에게 이끌려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식전 아침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
서애 류성룡은 당쟁을 유발할 만한 언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순신을 두둔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혹자는 “류성룡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는 말까지 남겼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것에 빗댄 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인들은 정쟁 앞에서 말을 조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국 수뇌부가 반간계로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서행장은 조선 재침공에 앞서 일단 이순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탐해봤다. 그 결과, 조선의 삼도 수군의
1596년 병신년. 왜국은 조선을 재침하겠단 계획을 확정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게 혼쭐이 났던 왜국은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그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고, 그 배경엔 조선왕 선조의 우매함이 있었다. 나라든 조직이든 정당이든 지도자가 무능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1596년 9월 초 책봉식을 마친 풍신수길의 왜나라는 외교적으로 국호를 인정받았다. 명·왜 강화조약은 결렬됐지만, 명나라가 ‘왜국 왕 책봉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기록은 전해지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전쟁터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이순신을 괴롭히는 건 왜적만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도 순신을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이순신이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 그 중심엔 순신에게 질투를 느낀 서인이란 일종의 카르텔과 귀가 얇은 왕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금 정치판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해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던 1594년 4월 9일. 진중에서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합격자를 알리는 방을 붙이고 있는데, 비가 엄청
1594년 봄, 이순신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서 날아온 패문牌文(통지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적을 치지 마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는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어쩔 땐 미국, 또 어쩔 땐 중국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때와 뭐가 다를까. 힘이 없으니 ‘전략적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오랜 외교 전술은 옳은 걸까.이순신은 1594년 2월 13일 선조의 출전 명령서를 받고 경남 창원의 저도에서 소비포 만호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떠도는 백성이었다. 이런 유민이 가장 안전하게 여긴 곳은 놀랍게도 ‘이순신 군영’이었다. 이순신이 유민을 위해 잠잘 곳뿐만 아니라 농장까지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선조를 따라다니는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자리’가 아닌 ‘마음’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겐 지금 국민을 진짜 위하는 마음을 지닌 리더가 있을까. 선조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된 뒤 이순신은 전황의 변화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순신은 7월 15일 한산도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처럼 상황이 바뀌면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지만, 전제가 있다. 확실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사람들이 신당을 준비한다. 그들은 과연 누굴 위해 창당하려는 걸까.왜군은 무려 8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공격을 펼쳤으나 진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9일째 되던 날, 왜군 장수 후등기차後藤基次(고토 모토쓰구)가 계책을
1592년 9월 1일. 명나라와 왜나라가 ‘휴전’에 합의했다. 명나라든 왜나라든 전열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아쉽게도 이 합의 과정에 ‘조선’은 없었다. 요즘 말로 패싱을 당한 셈이었다. 가정이긴 하지만, 이순신의 선전이 없었다면 조선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조정은 순신을 두고 분열하기 바빴다. 그때나 지금이나 높으신 양반들은 ‘분열’이 습관인 듯하다.이순신은 부산포해전의 승전 보고서를 조정에 올리면서 별도의 장계를 올렸다.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을 이대원李大源의 사당에 함께 모셔달라는 청을 담은 장계였다. 그
단 한번의 승은 전세를 바꿔놓기도 한다. 한산도 해전이 그랬다. 만약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졌다면, 조선의 명운은 바람 앞 촛불 신세가 됐을 거다. 백성을 뒤로한 채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는 압록강 저 너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정치도, 경제도 심상치 않은 요즘이다. 우리에겐 이런 위기를 일순간에 바꿔놓을 만한 리더가 있을까.드디어 견내량으로 보낸 선봉대 6척이 이순신의 눈에 들어왔다. 포성이 들리는 걸 보니, 싸우며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봉대 6척 뒤를 따라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선들이 검은 돛을 달고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1592년 어느날, 풍신수길은 한통의 전갈을 받았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연전연승을 벌이고 있지만, 바다에선 7전 7패를 기록 중이란 내용이었다. ‘이순신’이란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챈 풍신수길은 몇몇 지휘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순신을 죽여라!” 풍신수길은 왕이 아닌 이순신을 ‘진짜 리더’로 본 모양이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는 전 현감 박홍춘朴弘春, 전 봉사 김응충金應忠과 더불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울산읍을 회복했다.진사 정세아鄭世雅는 영천에서, 전
선조는 이미 떠난 후였다. 무주공산 ‘평양’을 접수한 왜군 장수들은 진군을 멈췄다. 왜군의 계획은 조선 전역을 장악한 육군과 조만간 합류할 수군 병력 10만명을 합쳐 의주를 치는 거였다. 그래야만 혹시 모를 명군明軍의 반격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면 요동까지 넘볼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순신이었다. 그는 백성의 추앙을 받는 진짜 ‘지도자’로 떠오르고 있었다.류성룡은 윤두수에게 “수성守城 준비가 어떻게 돼가고 있소”라고 물었다. 직위만 대장일 뿐 군정이라고는 알 턱이 없는 윤두수는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평양성 수비의 사실상 책임자인
선조가 개성으로 몽진했던 1592년 5월초. 선조는 조선을 대표하는 장수들에게 ‘임진강’을 사수하라는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이는 김명원, 신할, 한응인 셋이었다. 여기에 유극량이란 장수까지 합세했으니 사실상 4명이 임진강 방어를 맡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왜군이 앞에 나타나자 ‘갑론을박’을 벌이며 못난 모습만 노출했다. 전장戰場에서 필요한 건 지도자의 수가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다. 임진왜란 당시의 무대를 임진강 쪽으로 옮겨보자. 선조가 1592년 4월 30일 개성으로 몽진을 단행하면서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수비를
조직의 리더는 통제해야 할 게 많다. 그중 하나는 ‘공정성’이다. 실적이나 성과를 평가할 땐 측근과 그렇지 않은 구성원을 차별해선 안 된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는 다름 아닌 이순신이다. 그는 “전공을 냉정하게 평가해 상부에 그대로 보고하겠다”는 약속을 임진왜란 내내 지켰다. 휘하 장수들이 이순신을 따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순신은 휘하 장졸들과 여러 번에 걸쳐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적의 수급을 베는 데 힘쓰지 말고, 한명이라도 더 사살하는 데 치중하라”고 지시했다. 한건의 수급을 확보하는 시간이라면 화살로 10명
신각이란 인물이 있다. 임진왜란 때 한강을 지키던 부원수였다. 그는 왜군이 경상ㆍ충청ㆍ경기 3도를 장악하는 동안 조선 장수 중 내륙에서 승리를 얻은 최초의 인물이다. 1592년 5월 16일 양주전투에서였다. 그런데 신각은 승리를 거둔 지 3일 만에 어명을 받은 선전관으로부터 죽임을 당했다. 어찌 된 일이었을까.용인전투에서 5만 대군이 무너지기 앞서 조선 관군의 입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 ‘한성’의 수성대장 이양원, 한강을 지키던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신각, 그리고 우의정 유홍 등 네 사람이 얽힌 충격적인 사건이었
“가장 효율적인 수비는 공격하는 것이다.” 이기고 싶다면 때론 ‘역발상’이 필요하다는 거다. 이같은 전략이 필요한 건 비단 운동경기만이 아니다. 경영자도, 상인도, 군인도 ‘역발상’을 통해 경쟁자나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임진왜란에서 순신이 ‘전투를 하지 않고도 이겼던’ 것처럼 말이다. 이번 편에선 순신의 통찰력을 옛 기록 그대로 느껴보자.사천해전에서 총상을 입은 이순신에게 휘하 장수들이 휴식을 취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이를 마다하고 부하들과 함께 술을 나누며 전승을 축하했다. 이튿날인 임진년 6월 2일 오전 8시께, 사방으로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