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전 5시 50분. 알람이 울리기 전에 조용히 눈을 뜹니다. 배달시킨 커피 원두를 꺼냅니다. 가위로 모서리만 조금 자릅니다. 진한 원두 향이 잠을 깨웁니다. 그라인더 3인분 표시선까지 원두를 넣고 복도 쪽 방으로 들어갑니다. # 문을 닫고 방석으로 그라인더를 덮고 커피를 갑니다. 덕분에 아무도 깨어나진 않았네요. 그렇게 만든 커피를 보온병에 담습니다. 물병도 챙기고, 작은 1인용 돗자리도 챙깁니다. 읽고 싶었던 책과 겉옷도 챙깁니다. 혼자 잠시 소풍을 다녀오려 합니다. # 사전투표를 마친 덕분에 하루 휴가가 생겼습니다. 점심엔
# 대통령 사진을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미우나 고우나 국가를 대표하는 인물이니 경호가 이만저만 아니니까요. 당연히 가까이서 찍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대형 언론사에서도 소수의 기자에게만 가능한 일일 정도죠. # 다만, 출입기자보다 대통령을 더 가까이서 촬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전속 사진가입니다.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행사를 찍기도 하고, 대통령의 일상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 국내에서도 전직 대통령의 일상이 사진으로 공개돼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만,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그런 사진이 많습니다. 특히 역대 미
# 때는 12월 초, 동장군의 기세가 등등합니다. 주말 없이 일하다보니 몸이 삐거덕거립니다. 비영리기관에서 의뢰한 가족캠프 사진을 찍고 돌아오는 길. 뿌듯한 마음과는 별개로 몸은 ‘좀 쉬고 싶다’며 아우성을 칩니다. 출장길에 동행했던 딸아이도 덩달아 안달복달입니다. 출장 가기 전 제가 약속 하나를 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끝나면 근처에 있는 온천 물놀이장에 가자.” # 몸상태를 보니 과연 물놀이장에 갈 수 있을지, 그곳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냥 집에 올라가자 말하고 싶지만 반짝이는 딸아이의 눈망울을 외면할 수 없
# 어릴 때 전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유는 두개였던 것 같습니다. 아빠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 산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다는 것. 그때만 해도 산에서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이었죠. # 막 10살이 됐을 때로 기억됩니다. 등산을 가는 날인데 아빠는 가방에 코펠과 버너를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고개를 갸웃하는 저에게 아빠는 “이젠 라면을 끓여먹을 수 없다는구나”라면서 기사 한토막을 읽어줬습니다.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계곡이나 정상부 가리지 않는 취사 인파로 인해 몸살을 앓았다…(중략)…이어 1990년 11월 15일
# 순간은 점點이다. 점 같은 순간만 봐선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전체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수많은 순간을 연결해 선線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앞뒤 맥락과 본질이 보인다. # 지난 1월 17일 수많은 미디어가 비슷비슷한 기사를 쏟아냈다. 2022년 7월, 대한적십자사 대구경북혈액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의 원인을 다룬 기사였다. “…대한적십자사 직원이 버린 담배꽁초에서 불이 붙어서 혈액공급실이 타버렸다. 직원은 실화失火 혐의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았다….” # 실화는 ‘실수로 불을 냈다’는 뜻이다. 이 때문인지 모든 미디어의
#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을 마쳤습니다. 날도 풀렸겠다 싶어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 봅니다. 밤공기마저 춥지 않은 걸 보니 봄이 동네 문지방을 넘으려나 봅니다. 저 멀리 편의점이 보입니다. 문밖까지 불을 환히 밝히고 가판대에 무언가를 잔뜩 쌓아놨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아, 밸런타인데이구나.”# 이벤트를 잘 챙기는 편도 아니고 ‘초콜릿은 몸에 좋지도 않다’는 생각에 가판대 앞을 무심히 지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밸런타인데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주는 것이란 걸 편의점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았습니다. 혹시 아내가 초콜릿 하나
# S전자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을 출시했습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특별한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약정 끝난 지 오래된 제 휴대전화를 자꾸 만지작거립니다. ‘아직 잘되는데 굳이’란 생각과는 달리 눈길이 갑니다. 짬날 때마다 슬쩍슬쩍 검색해 봅니다. 그래서 혜택이 뭐라고? 얼마라고 그랬지?# 아차.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전화를 받다가 손이 미끄러졌을 뿐입니다. 휴대전화는 때마침 정확하게 액정 부분으로 낙하했습니다. 화면을 켜봅니다. 상단에 하얗게 빛나는 한 줄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땅따먹기처럼 조금씩 화면을 점령해 갑니다. 저녁
# 22대 총선 D-70. ‘민생 밖’에서 정쟁을 일삼던 금배지들이 또 국민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겉만 그럴듯하게 포장한 공약을 늘어놓은 채 ‘국민을 위해’란 수식어를 곳곳에 붙인다. 하지만 지금껏 내놓은 공약을 얼마만큼 이행했는지, 공약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법안을 만들었는지는 고찰하지 않는다. 그저 공약의 성찬盛饌만 차려놓으면 끝이다.# 거대 양당의 수장은 한술 더 뜬다. 틈만 나면 “인재를 영입했다”면서 1호·2호 등 꼬리표를 붙이지만 정작 그들이 국민을 섬길 자격을 갖췄는지, 기존 영입인재의 성적표가 어땠는지는 제대로
# 올겨울은 눈이 참 많이 옵니다. 언젠가부턴 ‘눈 내린 후’의 일이 걱정스럽긴 하지만, 눈을 보면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어릴 때 ‘눈만 내리면’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비탈길에서 비닐봉지로 만든 썰매를 타느라, 동네 친구들과 눈싸움을 벌이느라, 해가 지는 것도 잊곤 했죠. 깜깜한 밤, 집에 돌아오면 엉망이 돼버린 옷과 빨갛게 변한 얼굴 때문에 꾸지람을 듣기 일쑤였지만, ‘내일 또 눈이 오길’ 기도하곤 했죠. 지금 아이들도 그럴까요? 혹시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진 않을까요?# 늦은 저녁. 놀이터 바닥에 눈덩이
# 분명 국민이 만들어준 돈인데, 얼마만큼 사용하는지 모른다. 2006년 이후 17년간 공식 집계한 적도 없다. 총규모를 모르니, 다른 정보가 투명할 리 없다. 불·편법으로 결제한 돈을 제대로 회수했는지, 나랏돈을 쌈짓돈 취급한 이들을 엄정하게 처벌했는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공공기관 법인카드의 ‘비뚤어진 자화상自畵像’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 답을 찾기 위해 더스쿠프가 視리즈 「법인카드: 부당 사용과 구멍」을 기획했다. 공공기관 사람들이 법인카드를 불·편법적으로 사용한 흔적을 탐사하고, 거기에 숨은 허점을
# 출근길을 오가며 마주하는 커다란 옥외 광고탑입니다. 어느 명품 브랜드의 이미지가 꽤 오랜 시간 걸려 있던 자리입니다. 어느날 멀리서 보니 광고판 반쪽이 하얗게 변해 있더군요.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이내 알아차렸습니다. 광고판 교체 작업중이더군요. # 때마침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뀝니다. 빠르게 스마트폰 카메라를 켜고 화면을 확대합니다. 외줄에 매달린 작업자가 페인트 칠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페인트통에 롤러 붓을 푹 담근 다음 팔을 크게 휘젓습니다. 외줄 하나에 의지했지만 힘찬 손짓입니다. 그 손짓에
# 정치는 어지럽고 민생은 어렵다. 칠흑 같은 ‘침체 터널’에 갇힌 서민에게 힘겨움은 이제 일상이 됐다. 그런데도 리더를 자처하는 이들은 국민을 담보로 ‘정치적 흥정’만 늘어놓고 있다. ‘총선 정국’에 매몰된 우리나라 정치판의 민낯이자 뼈아픈 퇴행이다. # 우리는 視리즈 「섣부름과 카오스(통권 573호)」 「포퓰리즘의 역행(통권 574호)」을 통해 섣부름과 인기영합주의란 늪에 빠진 우리나라의 현실을 꼬집었다. 그 마지막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 엉뚱한 짓 한껏 넓어진 무선통신망, 몰라보게 빨라진 인터넷…. 1990년대 중반
# 출근길입니다. 집을 나오니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립니다. 멀지 않은 주차장을 우산 없이 뛰어갑니다. 허겁지겁 차에 올라타 묻은 빗물을 털어내며 숨을 고릅니다. 시동을 켜려고 보니 차창에 단풍잎 하나가 붙어있습니다.# 언제부터 비를 맞았는지 흠뻑 젖은 모습입니다. 유리창에 코팅을 해놓은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불가사리 같기도 하고 별 같기도 합니다. 빨간빛에 초록도 남아있고 노란 빛깔도 남아있습니다. 잎 하나에 사계절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가을이 가는 게 저만 아쉬운 건 아닌 듯합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유리창에
# “외롭지 않아?” 사진기자 초년병 시절. 취재를 다녀온 제게 한 선배가 했던 말입니다. 선배가 싱글이라 그런가? 뚱딴지 같은 소리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현 아내님)도 있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던 때라 그런지 외로움이란 단어를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 사실 지금은 종종 외롭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진 찍을 때’ 외롭습니다. 사진은 제게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너무나 좋아하는 사진이지만 취미와 밥벌이는 확실히 다릅니다. 일로 촬영할 때면 많은 압박을 받곤 합니다. 확실한 목적성을 가지고 독자와 고객을 만족
# 아내랑 제가 처녀 총각이라 불리던 시절, 롯데월드를 함께 갔습니다. 스릴을 즐기는 저와 그렇지 않은 아내. 저는 아내와 꼭 자이로스윙을 타고 싶었습니다. 솔직한 마음으론 아내를 꼭 태워보고 싶었습니다.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기 때문이죠.# 배려심이라곤 1도 없는 구 남친인 남편. 안 탄다는 구 여친 아내를 조르고 졸라 자이로스윙에 함께 탔습니다. 불안해하는 아내에게 웃으며 이런 식의 농담을 던졌던 것 같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 다시 생각해 봐도 나란 녀석, 정말 한심한 놈이었네요.# 아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이로스윙
# 고금리 세상의 단면은 두개다. 한면에선 고통스런 비명이, 다른 한면에선 즐거운 비명이 흘러나온다. 전자는 은행에서 돈을 빌린 취약차주借主들의 몫이다. 이들은 고금리 탓에 필연적으로 불어난 원리금에 짓눌리고 있다.# 돈을 빌려준 은행의 상황은 다르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받을 돈’이 더 생기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올 상반기 5대 시중은행이 역대 최대 이자이익(20조4906억원)을 거둬들이고, 1조원이 넘는 성과급 잔치를 벌인 건 ‘고금리 바람’에 거저 날아온 혜택 덕분이었다. 즐거운 비명을 지를 법도 하다. # 이 때문
# 캄캄한 밤. 동네 주차장 자동차들이 반짝반짝 빛납니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맞은편 아파트 외벽 조명에서 반사된 빛입니다. 문득 옛 동네의 모습이 스칩니다. # 원래는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이 둥지를 틀고 있던 동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고 작은 빌라와 주택들이 사라지더니 신형 브랜드 아파트가 우뚝 섰습니다. 동네 주차장 차들이 빛난 건 아마도 그때부터일 겁니다. 아파트 브랜드를 밝히는 조명이 깜깜한 밤을 뚫고 주차장을 비추기 시작했으니까요. # 세상에 반짝이는 게 너무 많아졌습니다. 어쩔 땐 동네 어귀에서 슬쩍슬쩍 보이던 ‘
# 초마다 밀려는 콜 탓에 자리를 잠시도 뜨지 못한다. 몇몇은 화장실을 갈 때도 ‘이석離席 체크’를 해야 한다. 성난 고객을 상대할 땐 감정을 접어둔 채 ‘욕받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진짜 사장이 누구인지 모른다. ‘파견직 근로자’ 콜센터 노동자(상담사) 앞에 놓인 일그러진 현실이다. # 사람들이 흔히 고객창구라 부르는 콜센터는 퇴행적 노동문화가 판을 치는 곳이다. 어떤 이는 그곳을 ‘원형감옥’이라 비판하고, 또 어떤 이는 그곳의 숨 막히는 삶을 ‘수형생활’에 빗댄다. # 그런 콜센터 노동자 1500여명이 지난 4~
# 버스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동네가 있는 길목으로 들어섭니다. 아파트 축대를 타고 덩굴식물이 무성히 올라왔습니다. 비에 젖어 촉촉한 초록의 생명입니다. 가만 보니 풀숲에 흰색을 띤 뭔가가 보입니다. 테이크아웃 종이컵입니다. # 진갈색의 액체는 커피 같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여전히 진한 빛깔입니다. 버리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풀숲 깊숙한 곳에 꼿꼿하게 꽂은 건지, 그냥 던진 건데 저렇게 꽂힌 건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초록의 식물은 생명을 키워가지만 쓰임을 다한 흰색 종이컵은
# 빌딩 위로 비둘기 두마리가 날아오릅니다. 겹칠듯 말듯 가까이 붙어 날갯짓을 합니다. 비둘기를 종종 찍어봤지만 이렇게 딱 붙어서 비행하는 모습은 처음인 듯 합니다. 마치 커플이란 걸 과시하듯 말이죠. # 보이시죠? 바로 그 사진입니다. 두마리가 동시에 날아오르는 순간 찍은 몇장의 사진 중 한장입니다. 커플 비행의 ‘실루엣’이 담겼습니다. # 운이 좋았습니다. 고백하자면 노린 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셔터를 눌렀는데, ‘비둘기 커플’이 담겼습니다. 누군가는 ‘소가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은 격이네’라면서 핀잔을 줄지 모릅니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