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은 끝내 이순신을 ‘심판대’에 세웠다. 형조좌랑 강항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는데도, 조정 대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한 공정하지 않은 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권력자들은 공정한 심판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이순신이 하옥된 지 하루 만인 1597년 3월 5일부터 국문이 시작됐다.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뒤집어쓴 채 금부 나졸들에게 이끌려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식전 아침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
# 이순신은 별별 모함을 다 당했다. “가등청정 등 왜국 장수에게 뇌물을 바쳤다” “뇌물을 받고 왕의 명령을 어기고 출정하지 않았다” 등 모함의 내용도 다양했다. 문제는 임금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향한 모함 대부분을 믿었다. # 자고로 지도자는 좋은 귀를 갖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언眞言과 간언間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수 있다. 여야 정치권이 ‘공천’으로 시끄럽다. 여야 지도자는 과연 진언과 간언하는 사람을 잘 가려서 총선 무대에 올려놓고 있을까.「난중일기」에는 1596년(병신년) 10월 12일부터
서애 류성룡은 당쟁을 유발할 만한 언사를 자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순신을 두둔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혹자는 “류성룡의 침은 종기(당쟁)를 다스리는 특효약이다”는 말까지 남겼다. 종기를 없앨 때는 말을 참아 생긴 침을 발랐던 것에 빗댄 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인들은 정쟁 앞에서 말을 조심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국 수뇌부가 반간계로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영악하기 이를 데 없는 소서행장은 조선 재침공에 앞서 일단 이순신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정탐해봤다. 그 결과, 조선의 삼도 수군의
1596년 병신년. 왜국은 조선을 재침하겠단 계획을 확정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에게 혼쭐이 났던 왜국은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다. 그때 조선 조정은 ‘이순신’과 ‘원균’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고, 그 배경엔 조선왕 선조의 우매함이 있었다. 나라든 조직이든 정당이든 지도자가 무능하면 배는 산으로 간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1596년 9월 초 책봉식을 마친 풍신수길의 왜나라는 외교적으로 국호를 인정받았다. 명·왜 강화조약은 결렬됐지만, 명나라가 ‘왜국 왕 책봉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는 기록은 전해지
테이블 위에서 치러지는 ‘협상’은 피상적이다. 진짜 싸움은 테이블 밑에서 이뤄진다. 누가 속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이득을 취하느냐가 싸움의 핵심이다. 명나라와 왜나라는 1593년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 강화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둘 모두 딴생각뿐이었고, 제3국인 조선은 손해만 봤다. 그만큼 대외 협상은 중요하다.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등 외국과 맞닿아 있는 한국은 지금 현명한 외교 전술을 펴고 있을까. 4년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명나라와 왜나라의 강화협상은 외견상으론 풍신수길의 ‘일본 왕 책봉’이 화두였다. 명나라는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꼽은 ‘2023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는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 ‘이익을 탐내어 의로움을 망각하다’란 뜻으로 출세와 권력을 좇는 사회 지도층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이순신이 살아가던 엄중한 시대에 ‘견리망의’의 처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은 원균이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견리망의’의 늪에 빠진 인물은 누구일까.원균은 세력이 있는 사람을 대하면 우대하고 아첨하지만, 그 사람의 세도가 막히면 배척하고 괄시했다. 애당초 원균은 이순신에게 붙어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과 싸워볼 엄두도 못 내고 도주한 죄에서 벗어
전쟁터에서 분투를 거듭하던 이순신을 괴롭히는 건 왜적만이 아니었다. 조선 조정에서 만들어낸 ‘유언비어’도 순신을 벼랑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이순신이 연해의 해왕海王 노릇을 한다.” 그 중심엔 순신에게 질투를 느낀 서인이란 일종의 카르텔과 귀가 얇은 왕이 있었다.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금 정치판이나 그때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한산도 진중에 전염병이 유행해 순신까지도 병으로 신음하고 있던 1594년 4월 9일. 진중에서 무과 별시를 시행하고 합격자를 알리는 방을 붙이고 있는데, 비가 엄청
임진왜란 때 수많은 유민이 발생했다.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떠도는 백성이었다. 이런 유민이 가장 안전하게 여긴 곳은 놀랍게도 ‘이순신 군영’이었다. 이순신이 유민을 위해 잠잘 곳뿐만 아니라 농장까지 만들어놨기 때문이다. 반면, 그때 선조를 따라다니는 유민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례는 ‘자리’가 아닌 ‘마음’이 지도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에겐 지금 국민을 진짜 위하는 마음을 지닌 리더가 있을까. 선조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한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먹을 식량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도 날로 늘어나고 있었다
1593년 5월 명나라와 왜국은 물밑 ‘강화교섭’ 과정에서 조선을 완전히 배제했다. 나라의 절반가량인 하삼도(전라도·경상도·충청도)를 왜국에 넘겨줘야 할지도 몰랐지만,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선 대신들은 입으로만 대책 마련을 떠들어댔다. 3고高(고물가·고금리·고환율) 장기화로 민생은 벼랑 끝에 몰렸는데, 여전히 입으로만 ‘국민! 국민’을 외치는 어떤 사람들이 오버랩된다.조선이 이순신을 조선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기 전 부터 명군과 왜군은 ‘강화교섭’을 화두로 삼고 있었다. 명나라의 강화사절이 왜나라를 향해
1593년 4월 9일. 명나라 장사꾼 심유경은 왜군의 수장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심유경은 “한양에서 물러간다면, 조선의 남삼도를 풍신수길의 영토로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실을 몰랐던 조선 조정은 애먼 결정만 내리고 있었다. 밀실 합의의 폐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다. 대부분 신당 창당 건이고 대부분 ‘밀실’에서 진행된다. 그들은 누굴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가. 왜군은 갈수록 불리해졌다. 우선 군량미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이 심각했다. 병력도 왜란 초기에 비해 절반이나 줄었다.
이순신은 4차 출전을 앞두고 74척의 판옥선을 확보했다. 이전 출전 때보다 전선의 수를 두배가량 늘렸다. 하지만 원균은 3차 출전 때와 똑같은 7척의 판옥선만 갖고 있었다. 준비된 지도자와 준비되지 않은 지도자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민생경제가 말이 아닌 지금, 우리에겐 이순신 같은 ‘준비된 지도자’가 있을까.임진년 7월 13일. 3차 출전을 마치고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온 이순신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재출전 준비에 들어갔다. 아울러 육지의 전투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왜적의 정세를 끊임없이 탐문했다. 9차례의 승리를 통
# 이순신의 함대는 무적이었다. 왜군과 아홉차례 만나 모두 이겼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왜군이든 패잔병이든 섬멸하는 과정을 신중하게 진행했다. 휘하 장수들이 “당장 공격하자”고 주장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육군과의 협조체계, 군졸의 피로 등 복합적인 변수를 감안한 결과였다.# 당신의 리더는 어떤가. 실적에 쫓겨 성급한 결정을 내리진 않는가. 현재의 국가 지도자들은 또 어떨까. 먼 미래를 보고 나라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을까.안골포 해전에서의 승리로 왜군과의 전투에서 9전 9승을 기록한 이순신은 밤이 되자 전함대를 몰고 포구 밖 10리(1
적막이 흐르던 의주 행재소에 뜻밖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이순신이 한산도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는 내용이었다. 왜군의 진격을 걱정하던 선조는 그제야 함박웃음을 터뜨리면서 “이순신을 정1품에 제수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서인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이순신을 천거한 인물이 동인 류성룡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든 당파싸움이 문제다. 친윤, 반윤, 친명, 반명…, 공교롭게도 지금 정당도 똑같은 상황이다.한산대첩을 이끈 이순신은 패배하고 도망가는 14척의 왜적 함선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문 데다 군사들도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견
단 한번의 승은 전세를 바꿔놓기도 한다. 한산도 해전이 그랬다. 만약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졌다면, 조선의 명운은 바람 앞 촛불 신세가 됐을 거다. 백성을 뒤로한 채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는 압록강 저 너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정치도, 경제도 심상치 않은 요즘이다. 우리에겐 이런 위기를 일순간에 바꿔놓을 만한 리더가 있을까.드디어 견내량으로 보낸 선봉대 6척이 이순신의 눈에 들어왔다. 포성이 들리는 걸 보니, 싸우며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봉대 6척 뒤를 따라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선들이 검은 돛을 달고
임금은 온종일 명나라의 구원만 기다렸다. 백성이 죽든 말든 나라가 위태롭든 말든 그 생각만 했다. 그 무렵, 이순신은 해전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승전을 알아주는 조정 대신들은 없었지만, 이순신은 그 길을 운명으로 여겼다. 혹여 세상이 그때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진짜 영웅은 역사에 남는다. 지금 우리의 정치인 중엔 ‘역사’에 남을 이가 있을까.제1차 금산전투에서 비록 패배했지만 조선 관군과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진입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전투에 나섰다. 1592년 8월 중순에는 충청도 의병장 조헌이 700명의 의병을 거느
1592년 어느날, 풍신수길은 한통의 전갈을 받았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연전연승을 벌이고 있지만, 바다에선 7전 7패를 기록 중이란 내용이었다. ‘이순신’이란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챈 풍신수길은 몇몇 지휘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순신을 죽여라!” 풍신수길은 왕이 아닌 이순신을 ‘진짜 리더’로 본 모양이다. 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는 전 현감 박홍춘朴弘春, 전 봉사 김응충金應忠과 더불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울산읍을 회복했다.진사 정세아鄭世雅는 영천에서, 전
소서행장은 간교한 인물이었다. 그의 간교함은 선조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쉽게 엿볼 수 있다. 겉으론 조선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선 선의善意가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 이권에 따라 내 편 네 편이 갈릴 뿐이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은 평조신으로 여러번 한양에 와서 가선대부(종2품 하下의 품계)까지 봉직했던 터라 조선 사람을 속여 먹을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을 반대했다
1592년 5월 개성으로 도망친 선조는 ‘임진강’을 사수하라면서 신할, 유극량, 권징, 한응인 4명을 그곳에 배치했다. 그런데 이들 중 적임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결국 왜군은 임진강을 돌파했다. 한편에선 이들 4명의 실패라고 말하지만, 오합지졸을 그곳에 배치한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지금 우리의 권력자는 선조와 달리 진짜 인재를 선별해 옆에 두고 있는 걸까. 신할은 용맹한 지도자이긴 하지만 공명심公明心보단 공명심功名心이 많은 인물이다. 유극량은 용기는 뛰어나나 통찰이 빈약하고, 경기감사 권징은 전투에 문외한인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달라진 건 딱히 없다. 여야 정치권은 여전히 쌈박질 중이고, 경제는 도무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민생을 돌볼 여유도 없다. 어떤 당은 입방정을 떤 사람들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고, 어떤 당은 돈봉투에 코인까지 아주 난리다. 이럴 때일수록 진짜 지도자가 필요한데, 그럴 만한 인물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적진포해전을 마치고 여수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함대의 탐보선이 달려와 전라도사 최철견의 서간을 전달했다. “4월 그믐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관서지방으로 몽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
큰 산불이 났다. 소방당국과 유관부처, 그리고 공무원이 산불의 진화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런데 정작 지자체의 장은 그 시간에 골프 연습을 하고 술자리를 가졌다. 산불은 진화됐지만 여론은 성난 마음을 감추지 않고 표출했다. 지도자의 자질은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다. 전쟁 와중에 한양을 떠난 선조와 화마가 덮친 와중에 골프를 치고 술자리를 가진 그들이 뭐가 다르던가. 왕을 지켜야 할 고위 공직자들은 물론 군사들까지 모두 도망쳤다는 소식에 선조가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장계가 하나 올라왔다. 목숨을 내건 전쟁터에서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