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4년 봄, 이순신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서 날아온 패문牌文(통지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적을 치지 마라.”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천하의 이순신도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에 의존하는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어쩔 땐 미국, 또 어쩔 땐 중국 때문에 오락가락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때와 뭐가 다를까. 힘이 없으니 ‘전략적 관계’를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오랜 외교 전술은 옳은 걸까.이순신은 1594년 2월 13일 선조의 출전 명령서를 받고 경남 창원의 저도에서 소비포 만호 이영남, 사량 만호 이여념,
단 한번의 승은 전세를 바꿔놓기도 한다. 한산도 해전이 그랬다. 만약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졌다면, 조선의 명운은 바람 앞 촛불 신세가 됐을 거다. 백성을 뒤로한 채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는 압록강 저 너머로 넘어갔을 수도 있다. 정치도, 경제도 심상치 않은 요즘이다. 우리에겐 이런 위기를 일순간에 바꿔놓을 만한 리더가 있을까.드디어 견내량으로 보낸 선봉대 6척이 이순신의 눈에 들어왔다. 포성이 들리는 걸 보니, 싸우며 달아나고 있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선봉대 6척 뒤를 따라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선들이 검은 돛을 달고
이순신 장군은 배의 속도가 느려지자 다양한 방법으로 이를 보완했습니다. 첫째, 정보의 질과 양을 늘렸습니다. 적의 위치를 먼저 파악하면 적이 접근하기 전에 전투를 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탐망선과 척후선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둘째, 노 한개에 붙는 격군의 수를 늘렸습니다. 노의 동력을 증가시켜 배의 속도를 올린 것입니다. 하나의 노에 네명이 붙는 것과 다섯명이 붙는 것은 분명 다를 테니까요. 셋째, 평저선인 판옥선과 거북선의 회전력을 극대화하는 전술을 펼쳤습니다. 대표적인 전술이 바로 학익진입니다.
한산도해전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내보냈습니다. 한니발이 전진배치했던 경무장 보병과 같은 역할이었지요.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해적 출신의 수군 명장이었습니다. 다섯척의 판옥선이 이순신의 유적계誘敵計, 이를테면 유인책일 가능성도 생각했을 것입니다.그러나 와키자카는 자신 있게 주력부대를 모두 이끌고 쫓아왔습니다. 이순신이 유인작전을 썼다 해도 충분히 조선 수군을 압도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의 함대도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니까요. 대여섯척의 판옥선을 추격하던 일본 함대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어느새 조선 함대에
인터넷에 한산도대첩을 검색하면 진주대첩ㆍ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아울러 국제적으로도 깊은 인상을 남긴 전투라는 표현도 종종 등장합니다. 이순신의 학익진과 한니발의 칸나에 전투The Battle of Cannae전세계의 해군사관학교에서 한산도해전을 가르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서구의 거의 모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투가 있습니다.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군이 로마군과 맞붙었던 ‘칸나에 전투’입니다.전투에서 압승하기 위해선 포위섬멸전이 가장 좋습니다. 전투에서 승리해도 적군의 주력과 지휘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할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청구영언」 영조 때 김천택이 유명한 글을 모은 문집…그래서 뒤쫓아 들어가니, 대선 서른여섯척과 중선 스물네척, 소선 열세척 모두 일흔세척이 대열을 벌려서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매우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은 서로 부딪히게 될 것 같아 싸움하기 곤란했습니다. 왜적은 만약 형세가 불리해지면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갈 것이므로,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유인해 모조리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한산도
[뉴스페이퍼 = 정근우 기자] 푸른 바다를 끼고 보석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경상남도 남해는 서울 및 수도권에서는 다소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찾는 보석같은 여행지다. 특히 요즘과 같은 겨울에는 고요한 정취를 자랑하는 겨울 바다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겨도 좋은 곳이 바로 남해다.볼거리 또한 풍성하다. 최근 남해 관광의 명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노량대교다. 지난 9월, 9년간의 공사끝에 완공된 노량대교는 세계 최초의 기울어진 주탑과 3차원 케이블 등의 첨단기술 도입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남해의
진린은 이순신의 병위를 보고 크게 놀랐다. 13척의 병선으로 300여척의 적을 격파한 명장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병선이 13척이 아니고 온 바다를 덮은 대함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진린은 이순신에게 전공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고금도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벌어진 전투에서도 진린은 ‘나홀로 공격’을 감행했다.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이순신 함대가 밤을 타서 움직이는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적이 이순신의 그림자만 봐도 달아나는 통에 적을 섬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항포를 습격하는 줄을 모르게 하여 안심을 주는 방략이기도 했다. 실제로 당항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31척의 적군들은 이순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모두 도망쳐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가는 길이 안전지대라는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이 패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일본군은 전함대의 세력으로 전라·충청·경기·황해의 연해를 차례로 점령한 뒤 조선의 제해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유일한 조선 땅이던 전라도마저 적의 수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 종의지 등 제장은 수군 10만과 합세해 평양 이북으로 출병했을 게 분명하다. 순신이 견내량으로 보낸 6척이 드디어
이순신 혼자서도 넉넉히 적의 수군을 막을 만한 능력이 생겨난 이때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5000 이상의 수군과 병선 70여척을 끌고 강화도에서 내려온다고 소식이 왔다. 이름만은 청병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순신의 행동을 견제 또는 간섭해 적을 놓아 보내고 마침내는 순신을 관음포에서 죽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청정은 부하제장의 주장을 물리쳐 말하기를 “울산성에
[CBS The Scoop] 순신은 한산도 수루 위에서 매양 달 밝고 한적한 밤이면 시사를 살폈다. 여러 방면으로 걱정이 많았다. 창연히 바다를 바라보며 근심스러운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하루 밤은 시조를 지어 읊어 마음속을 드러내 보였다. 이순신 장군이 유진한 뒤가 안전지대라는 소문을 들은 삼남 유민은 난을 피하여 남부여대1)하며 부로휴유2)하고 순신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