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은 끝내 이순신을 ‘심판대’에 세웠다. 형조좌랑 강항과 비변사 부제조 황신이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는데도, 조정 대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순신을 향한 공정하지 않은 심판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금은 어떤가. 여야 정치권력자들은 공정한 심판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이순신이 하옥된 지 하루 만인 1597년 3월 5일부터 국문이 시작됐다. 팔척 장신의 이순신은 큰 칼을 뒤집어쓴 채 금부 나졸들에게 이끌려 황토黃土마루를 지나 정릉貞陵골 의정부에 도착했다. 길가에는 식전 아침부터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모여들
민주주의 한계를 지적할 때 사람들은 종종 독일 나치당을 소환한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지형, 당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고려해야 마땅하겠지만, 나치가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정권을 얻었다는 사실은 명백해서다. 나치당은 1933년 3월 독일 총선에서 43.9% 득표율로 집권했다. 권력을 거머쥔 나치당은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수권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인류사에 다시 없을 독재의 시대가 열렸다. 이 때문인지 ‘만약 히틀러가 없었다면’이란 상상에서 시작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때 민주주의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는 아니다. 웹
# 정치적 선동은 쉽다. 그게 거짓이라도 논리적으로 반박하려면 몇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반박에 설득력이 있어도 선동을 부추긴 쪽은 불리하지 않다. 반박과 재반박이 거듭할수록 ‘거짓 이미지’만 남기 때문이다.# 이런 선동은 나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가 주로 썼던 전략이다. 그런데 적대적 사고와 언어가 판치는 대한민국 총선 정국에서 여야 정치권이 ‘괴벨스의 선동 전략’을 꺼내 들고 있다.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4년. 독일 라인란트 출신의 한 청년은 애국심에 불타 군대에 자원했지만 참전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골수염을 앓아
1950년대부터 시작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세계를 두 동강 냈다. 내 편이 아니면 다른 편이며 적을 끝장내기 전에는 나도 안심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전 세계를 뒤덮었다. 인류에게 남은 건 절멸밖에 없어 보였다.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네빌 슈트의 「해변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반영했다. 증오하는 상대를 박멸하려는 이들로 넘쳐나는 우리네 정치꾼들이 읽을 만한 책이다.1952년 11월 1일, 미국은 세계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태평양 에니위탁 환초에서 시행했다. 2년 후인 1954년 3월 1일엔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캐슬 브
역사를 다루는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그 시기의 배경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불과 한 세대만 지나도 사고방식의 차이가 생기는데 그 간격이 수백년이라면 간극이 클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작가들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사적 배경을 설명할 때가 많다.다만 설명이 많아지면 독자는 버거움을 느낀다. 시대적 생생함을 살리려 사용하는 낯선 용어나 말투에서도 혼란을 겪을 수 있다. 역사적 사건ㆍ인물을 다룰 때 무게감을 고려하지 않으면 날선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역사 창작물에서 사건ㆍ인물을 기존과 다르게 표현했다가 비판받는 일은 드물
제비꽃 연가(緣家)이심훈창고형 마트 높다란 벽과 보도 블록 맞닿은 가장 낮은 모서리하고도 틈새바람 부는 대로 섭슬려 온 막다른 길 제비꽃들 모여 암팡지게 살림 차렸다.지구촌 난민 1억 명이 넘었다. 세계 인구 80명 중 한 명은 난민으로,* 미성년이나 노인이 절반을 넘는다. 새가 넘나드는 길인데 오가지도 못하고, 폭염 재난문자에 묻어오는 미세먼지도 넘는데. 물고기가 오가는 길인데 넘나들지 못하고, 일회용 페트병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나 봐리비아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기니, 베네즈웰라에서 콜롬비아로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를 통과하여 미국
“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폐결핵 요양차 잠시 벽촌 시골마을에서 지내던 이상의 단편 수필 「권태」의 도입부 문장이다. 아무런 변화도, 할 일도 없는 벽촌에서의 무료함에 이상은 진저리친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한 마을 아이들은 논두렁에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누구 ×이 더 굵은지 ‘×싸기 시합’을 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무료함과 싸운다.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의 무대는 아일랜드에 인접한 ‘이니셰린’이라는 가상의 작은 섬이다. 그 분위기는 문득 이상의 수필 「권태」를 떠올리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타는 듯한 목마름’으로 플린 신부가 자기 입으로 흑인 중학생 아이와 동성애의 죄를 범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 하지만 플린 신부는 끝까지 부인한다. 수사 권한도 없고 형사 콜롬보나 CSI 과학수사대급의 추리력과 수사능력도 갖추지 못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네가 네 죄를 알렸다’고 분기탱천하는 원님 재판 수준을 맴돈다.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순순히 ‘자복’하지 않는 플린 신부에게 최후의 협박을 한다. 플린 신부를 둘러싼 의혹을 플린 신부의 전 근무지와 교구의 수녀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한다. 신부의 비위나 비리 의혹을 조사
강서구 마곡동에 자리잡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는 5월 9일, 개관 3주년 기념행사로 남북하나재단 주관 탈북 시인 봉순이의 북 콘서트가 열렸다. 사전행사로 탈북 예술인 문성광의 멋진 색소폰 연주가 있었다. 최근에 천년의시작을 통해 시집 『삶이 나에게』를 출간한 탈북 작가 봉순이는 이 행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공개했지만 사진 촬영은 허용되지 않았다. 최초우 배우가 낭랑한 목소리로 봉순이의 시 3편을 낭송하면서 북 콘스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1987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2003년에 탈북, 2005년에 대한민국으
# 취임선서“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 문화의 창달에 노력해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2022년 5월 10일 대통령 윤석열.” 오전 11시 11분. 새 대통령이 엄중한 말투로 ‘취임선서’를 마쳤다. 이내 팡파르가 울리고, 박수가 터졌다. 포털뉴스 섹션에선 기다렸다는 듯 ‘순간 시청률 17%’란 제목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환호, 찬사, 갈채, 약간의 기대, 그 이면에 깔려 있는 근심과 걱정, 그리고 역대 최고치라는
헝가리 출신 알마시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하는 ‘국가와 민족’이란 집단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 적개심까지 느낀다. 그래서인지 알마시의 꿈은 왜소하고 멸시당하는 헝가리 민족을 벗어나 세계인이 되는 거다. 알마시의 조국 헝가리의 역사는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근대 이후 헝가리는 주변 강대국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옛 소련)의 세력 및 관계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찢겨나간다. 헝가리 역시 살아남으려 이쪽저쪽에 붙어보지만 약소국의 결과는 항상 참담하다. 헝가리 귀족가문 출신이자 엘리트인 알마시는 헝가리란 국적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조금 특별하다. 적갈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조심조심 그리는 누군가의 손을 계속 보여준다. 그 조심스러운 붓질이 완성한 그림은 팔다리의 관절을 꺾은 듯한 기묘한 사람의 형상이다. 그 그림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Cave of Swimmers)’ 속에 그려져 있는 신석기시대 동굴벽화 그림이다. 종이 위에 그 그림을 모사模寫하고 있는 손이 알마시인지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캐서린인지는 불분명하다.‘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대개 영화의
알마시는 인간 자체로는 꽤나 훌륭한 인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막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막 탐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SNS에 ‘인생 샷’ 하나 올리지 않는 걸 보면, 사막 탐사가 ‘공명심’인 것도 아니다. 알마시는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고 하기 싫은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서 홀로 사막을 떠도는 것도 아니다. 조국 헝가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라를 위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만들기에 매달린 김정호 선생과도 결이 다르다. 알마시를 매슬로(Maslow)의 ‘인간의 욕구 5단계설’에 적용하면 승화된 욕
캐서린은 알마시와의 불륜관계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튀니지의 허름한 천막 극장에서 알마시와 만나 이별을 통보한다. 도덕적 죄책감도 아니고 알마시에게 정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결국은 남편이 눈치를 챌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알마시는 캐서린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캐서린은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온다.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광명’의 세계로 빠져나간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알마시의 표정이 참담하다.알마시가 캐서린으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은 날 저녁 호텔에서 ‘국제 사막클럽’의 연회가 열린다. 클리프턴을 비롯한 사막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ㆍ1996)’는 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서 9개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3000억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니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한국에선 신통치 않은 성적표를 남겼다.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익숙한 우리나라 관객들이 영국식 영화문법을 다소 낯설 게 느꼈을지 모른다.같은 영어라도 미국식
# 호황일 때는 누구든 잘나간다. 진가는 불황일 때 드러난다.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고 대비를 철저히 할 때 새로운 변곡점이 생긴다. 세계 반도체 산업에 불황의 먹구름이 드리웠고, 한국 반도체 산업은 위기와 기회를 맞았다.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선 추격을 따돌리고,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선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느냐는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달렸다. 혹한기에도 꽃은 피는 법이다. 앞서느냐 처지느냐 분기점을 맞은 한국 반도체의 미래를 전망해 봤다. 그 첫번째 편이다. 한국이 반도체
1000만불이 든 돈가방을 노리고 ‘탄환열차’에 모여든 킬러들은 모두 용병傭兵들이다. 용병이란 자신의 전투가 아닌 남의 전투를 돈 받고 대신해 주는 존재들이다. 전쟁 당사자들의 옳고 그름이나 명분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전쟁의 승패에도 무관심하다. ‘고객’과의 계약에 따라 일정한 역할을 해주고 그에 따른 급여만 받으면 그만이다.영화 속 용병킬러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메디치(Medici)가家의 유명한 책사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군주론」에 정리한 용병들의 행태와 참으로 닮았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아무리 다급해도 용병만은
일본 생활용품 전문점 무인양품無印良品이 캔김치를 출시했다. 최근 무인양품 온ㆍ오프라인 매장에서 판매를 시작한 캔김치는 한번에 먹을 수 있는 소용량(160g)으로 배추김치, 볶음김치 2종으로 구성돼 있다.무인양품 관계자는 “김치를 간편하면서도 맛있게 제공할 방법을 고민하다 많은 시도 끝에 캔김치를 출시했다”고 설명했다.[※참고: ‘상표가 없는 좋은 물건’이란 뜻의 무인양품은 1980년 일본에서 설립된 생활용품 전문점이다. 국내 시장엔 2004년 무인양품을 운영하는 일본의 양품계획과 한국의 롯데상사가 합작법인 ‘무인양품 주식회사’를 설
밀란 쿤데라는 소련의 프라하 침공 전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으로 ‘프라하의 봄(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했던 쿤데라는 모든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등 수모를 겪은 후 1975년 프랑스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신간 「납치된 서유럽-혹은 중앙 유럽의 비극」은 밀란 쿤데라의 사상적 원점을 보여주는 에세이 모음이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
2인조 킬러 ‘탠저린’과 ‘레몬’은 삼합회 조직에 납치당한 ‘하얀 사신’의 외아들을 구출하고 몸값으로 지불했던 1000만불 돈가방까지 회수하는 미션에 성공해 교토행 탄환열차에 탑승한다. 이제 교토역에서 ‘하얀 사신’에게 아들과 돈가방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차츰 분위기가 이상해진다.열차 안에서 ‘하얀 사신’의 아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돈가방까지 사라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열차 안에 누군가 만만치 않은 ‘나쁜 놈’이 타고 있다. 2인조 킬러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직감한다.‘탠저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