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시나리오 2018년 KT와 포스코

민영기업 KT는 5년마다 CEO가 바뀐다. 2008년에도 그랬고, 2013년에도 그랬다. 민영기업 포스코도 마찬가지다. 정권이 교체되거나 청와대 주인이 바뀌면 덩달아 CEO도 달라졌다. 낙하산 인사의 폐해다. 5년 후엔 어떨까. 근원을 바꾸지 않으면 그때에도 두 기업의 CEO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 낙하산 인사는 정권이 바뀌면 낙마하게 마련이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매섭다. 2013년 그해 겨울만큼 춥다. 지금은 2018년 12월 3일. 직장인 김건우씨가 집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옷을 싸매고, 발길을 재촉한다. 건우씨도 서둘러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다.

때마침 속보가 나온다. 박진만(가명) KT 회장이 사퇴했다는 내용이다. 납품업체로부터 10억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구속수사를 받던 박진만 회장은 전날 밤인 12월 2일 이사회에 사임을 통보했다.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를 듣는 건우씨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진다. “5년이 지나도 똑같구나….”

KT서초사옥 앞. 정문엔 시민단체 회원으로 보이는 10여명이 서 있다. 기자회견을 하려나보다. 회원단체가 제작한 현수막의 문구가 보인다. ‘낙하산도 모자라 이젠 비리까지’ ‘총체적 난국 KT 매각하는 게 낫겠다’….
건우씨는 고개를 푹 숙인다. 시민단체의 표현대로라면 자신은 낙하산 CEO가 운영하는 회사에 다니는 거라서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건우씨는 누가 볼까봐 회사 로비로 쏙 들어간다.

그 시각 경북 포항. 포스코에서 근무하는 이영익씨는 인터넷 기사를 클릭한다. 포스코 CEO후보추천위원회가 발표한 자체 후보 선정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보름 전인 11월 20일 채근호(가명) 포스코 회장은 이사회에 사의를 밝힌 상태다. 수익악화에 따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추천위는 차기 회장 선임 과정에 ‘승계카운슬 플러스’ 제도를 도입한다. 5년 전 도입한 승계카운슬(Council•협의회)에 플러스만 붙인 것이다. 추가된 건 차기 회장 후보군에게 주어진 미션이다. 미션 결과물은 포스코 내부게시판에 공개되는데, 이것이 1차 검증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사회는 후보군을 4명으로 추린다. 다음 단계는 추천위의 자격심사가 이어진다. 사내이사를 통해 후보 1명이 선정되면 주주총회에서 최종 결정한다. 이 과정은 3개월에 걸쳐 이뤄진다.

 
그날 밤. 건우씨와 영익씨는 오랜만에 통화했다. 서로 안부를 묻고, 하소연을 쏟아냈다. 건우씨는 이렇게 불만을 털어놨다. “KT는 17년째 무늬만 민영화인 회사다. 처음엔 권력에 따라 CEO가 바뀌는 걸 보면 자괴감이 들었는데, 이젠 무감각하다. 그러려니 한다.” 외압에 의한 회장 선임과 불명예 퇴진이 벌써 4번이나 반복됐기 때문이다.

건우씨의 불만엔 감정이 섞여 있지 않다. KT는 실제로 오랫동안 심각한 CEO 리스크에 시달렸다. CEO가 바뀔 때마다 ‘다음엔 그럴 일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뒤끝은 영락없이 똑같다. 이유는 간단하다. CEO가 정권의 후광을 등에 업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권력이 힘을 잃으면 KT의 CEO가 함께 흔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년 12월, KT정관 변경 논란을 뒤로 하고 이석채 회장이 선임됐다. 이명박 정부는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하지만 5년 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청와대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낙하산 CEO는 없다던 정부는 여기저기 낙하산을 투하했다. 그중엔 KT도 포함됐다. 뒷말이 무성했다.

정권 바뀌어도 변화지 않는 문화

2018년 박진만 회장의 끝도 정권교체와 함께 찾아왔다. 검찰수사가 먼저 군불을 뗐고, 그 여파로 박 회장은 불명예 퇴진했다. 한편에선 그가 검찰수사까지 받은 것은 정권교체 후 알아서 자리를 비웠어야 했는데 거부한 결과라고 말한다.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번엔 영익씨가 말했다. “포스코의 문제는 ‘낙하산 CEO’에 있지 않다. 포스코엔 제철소 현장에서 일해 본 포스코 출신만이 회사를 이끌 자격이 있다는 정서가 강하다. 외부에서 CEO가 온다고 해도 ‘포스코 순혈주의’를 깨는 게 어려울 것이다.”

 
2017년 채근호 회장은 여성 CEO포럼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포스코는 외부인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회장을 맡은 뒤 포스코를 살펴보니까 여전히 내부인사 중심이더라.” 이른바 ‘포스코 순혈주의’다. 그런데 포스코 회장의 포스코 순혈주의 발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8년 전인 2009년 같은 행사에서 정준양 회장이 이렇게 말했다. “포스코도 외부인재 영입에 나설 필요가 있다. 회장을 맡아보니 포스코가 내부인사 중심이라는 생각을 했다.”

순혈주의는 시간이 흐른다고 연해지지 않는다. 되레 단단해지는 경향이 있다. 포스코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 순혈주의가 포스코의 발목을 잡고 있다. 권력에 기댄 내부인사들이 포스코의 수장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건우씨와 영익씨는 가상인물이다. 정권만 바뀌면 홍역을 앓는 KT와 포스코의 문제점을 ‘가상시나리오’로 엮었다. 정권의 입김에 따라 CEO가 결정되는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 시나리오처럼 ‘5년 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될 게다. 국민의 기억 속에선 사라졌겠지만 5년 전에도, 아니 10년 전에도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 경영진 선임 절차를 엄격하게 정하면 정부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
문제는 KT와 포스코의 고질병 ‘낙하산 인사’ ‘순혈주의’가 두 기업의 성장과 실적향상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2002년 민영화된 KT의 경영실적이 크게 개선되지 않은 이유는 ‘방만경영’과 무관치 않다. 낙하산 CEO가 낙하산 임원을 양산해서다. 1993년 6만8000여명에 달했던 KT 직원수는 이석채 회장 재임기간을 거친 후 3만2000여명(2013)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임원수는 133명(2013)으로 늘었다. 2008~2012년 임직원 36명이 낙하산 인사로 KT에 발을 들여놨다. 이들의 평균연봉은 약 7000만원이다. 보은인사 때문에 직원들은 일자리를 잃고, 회사의 경영효율성은 떨어진 것이다.

포스코도 별반 다르지 않다. 2011년 2조4600억원이었던 순이익은 1년 만에 1조1000억원(2012)으로 크게 감소했다. 2009년 50%대였던 부채비율은 2013년 90%대로 치솟았다. 실적이 나빠졌지만 임원수는 53명(200 9)에서 71명(2012)으로 증가했다. 실적개선을 위해 구조조정에 나선 포스코는 2013년 연말까지 71개의 계열사를 40개로 줄이기로 했다. 포스코 측은 “구조조정이 아니다”고 밝히고 있지만 계열사 정리는 ‘인력감축’이란 말과 다르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업계 관계자들과 국민의 눈이 KTㆍ포스코의 CEO추천위에 쏠리고 있다. 추천위는 정권의 입맛에 따라 CEO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하지만, 이 말을 100% 신뢰하기는 어렵다. 추천위를 구성하는 사외이사가 박진만, 채근호 회장에 의해 임명된 인물이라서다. 추천위가 외부영향을 받지 않고 투명하게 CEO를 선발할 것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CEO 리스크가 재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철저한 인사로 정부 개입 못하게 해야

전문가는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는 민간기업은 CEO 선임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이렇게 말한다. “이사회의 역할은 두가지다. 경영진의 경영을 감시하고, 다 음 경영진의 구성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앞으로 경영진은 어떤 자격요건을 갖춰야 하는지, 이뤄야 할 목표는 무엇인지 등 기업에 적합한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경영진 선임 절차를 엄격하게 정하면 정부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

김상조 소장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낙하산 인사가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철저한 인사 준비가 보은인사ㆍ특혜인사를 막는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김건희 기자 kkh479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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