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명품

▲ 명품으로 인식되지 않던 나전칠기는 우리의 명품 유산이다.(사진=손대현 장인 제공)
현대차가 프라다의 이름만 빌려 ‘명품 자동차’라는 이미지를 심는 동안 경쟁사인 BMW는 나전칠기를 접목해 ‘한국적인 명품 자동차’를 선보였다. 우리 명품의 가치를 우리가 놓친 셈이다. 글로벌 시장이 주목하는 명품의 비밀을 알아봤다.

2011년 12월, 주류 브랜드 발렌타인은 ‘발렌타인 17 스카파 에디션’ 출시 기념으로 서울 회현동 스테이트타워 꼭대기에 있는 ‘더 스테이트 룸’에서 VVIP 고객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를 펼쳤다. 서예가 이상현 작가를 초청한 캘리그라피 퍼포먼스였다. 이상현 작가는 붓이 아닌 나뭇가지를 이용해 글씨를 쓰는 등 4개의 방에서 각각 다른 콘셉트로 캘리그라피 퍼포먼스를 펼쳤다. 장인이 직접 만든 붓과 먹, 종이를 이용해 전문 서예가가 연출한 이 퍼포먼스의 가격은 약 1억원이었다.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약수동 방향으로 가다보면 하이핸드(High Hand)라는 작은 간판을 내건 전통공예품 전시장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선 쉽게 보기 어려워진 화려한 문양의 나전칠기 장欌을 볼 수 있다. 무형문화재인 손대현 옻칠장이 직접 작업한 모란당초 장의 가격은 5000만~6000만원을 호가한다. 웬만한 고급대형차 가격이다. 

장인정신에서 나오는 명품의 가치

이런 작품들은 해당 분야의 시장에서 ‘명품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비싸게 팔린다. 그렇다고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상현 작가는 때론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글씨를 선물하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10만원대 가격으로 손대현 장인의 찻잔을 살 수도 있다.

선물이라고 혹은 가격이 저렴한 작품이라고 명품 소리를 못 듣는 건 아니다. 이상현 작가와 손대현 장인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명품은 가격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다.” 작가의 장인정신과 혼, 오랫동안 연마해온 기술이 더해져 명품이라는 가치가 탄생한다는 거다.

에르메스, 루이뷔통, 까르띠에, 페레가모….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명품 브랜드들이다. 중요한 건 이 명품 브랜드 대부분은 그 제품을 만들던 장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고, 수작업이 기본이라는 점이다. 에르메스는 19세기 초반 유럽 귀족들에게 마구馬具를 만들어 납품하던 프랑스 가죽장인 티에리 에르메스의 이름이다. 루이뷔통은 19세기 중반 직사각형으로 된 트렁크 가방을 처음 만들었던 가방장인의 이름이다.

에르메스의 가죽가방과 루이뷔통의 여행용 가방이 유명한 건 이 때문이다. 페레가모의 구두가 유명한 이유도 이탈리아의 구두장인 살바토레 페레가모가 만든 브랜드여서다. 까르띠에는 19세기 중반 프랑스 왕가에 보석 박힌 왕관이나 목걸이 등을 납품했던 네덜란드의 보석상 루이 프랑스와 까르띠에의 이름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시계나 보석이 유명하다. 패션 브랜드만 그런 건 아니다. 수작업으로 제작되는 명품 자동차브랜드인 롤스로이스 역시 자동차를 만들던 헨리 로이스와 찰스 롤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물론 요즘은 명품 브랜드도 ‘토털 패션’ 전략의 일환으로 의류에서부터 액세서리, 향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마케팅 전략일 뿐이다. 현재의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낸 제품군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작업 생산을 고집하거나 수작업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소품종 대량생산 시대에 맞춰가면서도 이들 명품 브랜드가 생명력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다.

이름을 따서 브랜드를 만들었다는 건 그만큼 품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고, 장인이 제품 하나하나를 제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명품의 가치는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이상현 작가는 “명품은 장인정신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명품을 구입한다는 건 작품을 만든 장인의 마음과 정신을 사는 것”이라며 “장인정신이 대代를 이어가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철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를 믿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진짜 명품을 대하는 이들은 제품을 제품이 아닌 하나의 작품으로 여긴다.

하지만 최근 ‘명품을 좋아하는’ 우리나라에선 웬만해선 명품 브랜드의 탄생과 배경, 가치, 장인정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명품을 갖고 싶은 주된 이유는 누군가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다. 작품을 소장한다는 의미도 없다. 때문에 ‘장인이 만든 명품’이 아니라도 ‘비싼 명품 브랜드’면 그만이다. 우리나라에 유독 모조품이 판을 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짜 명품을 갖고 싶은 거였다면 모조품을 살 리 없다. 최근엔 심지어 짝퉁 명품 종이가방(쇼핑백)까지 등장해 인터넷에서 몇만원에 팔린다. 

이런 상황에서 장인은커녕 진짜 명품도 눈에 보일 리 없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나전칠기다. 전통적인 나전칠기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갖고 있다. 고작해야 역사가 몇백년에 불과한 유럽 명품 브랜드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목장小木匠(건물의 문이나 창문 혹은 장롱이나 궤ㆍ경대ㆍ책상ㆍ문갑 등을 만드는 목수)이 만든 목가구에 옻칠, 나전(조개껍질)을 붙이는 것 외에도 30여 단계의 고된 작업과 일정한 시간이 더해져야 작품 하나가 완성된다. 특히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기법은 고려시대 때 완성돼 현대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손대현 장인은 “전통공예품에는 대부분 작가의 오랜 철학과 정신이 깃들어 있다”며 “때문에 굳이 이름을 새겨 넣지 않아도 특징에 따라 어떤 작가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혼이 들어간 그의 나전칠기는 명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국내 기업은 그의 명품 나전칠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 BMW가 2011 서울모터쇼에서 공개한 750i 모델의 나전칠기 장식. 세상에 1대 밖에 없는 이 모델으ㅡㄴ 1억8000만원에 팔렸다.(사진=BMW코리아 제공)
2009년 서울모터쇼에서 현대차는 제네시스 프라다를 내놨다. 콜라보레이션이었다. 프라다는 특유의 나일론 소재로 가방을 만들어 유명해진 패션 명품 브랜드다. 그 특유의 소재조차 이제 ‘프라다’으로 불린다. 그러나 제네시스 프라다엔 나일론 소재가 들어가지 않았다. ‘모던한 프리미엄’이라는 프라다의 가치를 따왔다는 현대차의 주장을 빼면 닮은꼴이 없었다. 당시 차를 소개하면서 차 위에 ‘프라다’를 떨어뜨리는 퍼포먼스가 있었을 뿐이다. 현대차는 1200대를 한정 생산해 기존 모델의 가격보다 약 2000만~3000만원 비싼 7900만원에 팔았다.

명품은 제품 아닌 작품

그로부터 2년 후인 2011년 서울모터쇼에서 BMW는 ‘나전칠기 BMW 750Li’를 선보였다. 같은 콜라보레이션이었지만 내용이 달랐다. 일반적으로 우드나 플라스틱으로 마감되던 차량 내장제를 손대현 장인의 나전칠기로 대신한 거였다. 우리나라의 명품을 국내 자동차기업이 아니라 외국 자동차기업이 알아본 거다.

결국 1대만 만들어 전시했던 이 차는 공개 경매를 통해 1억8000만원(당시 일반모델 가격은 1억3000만원)에 판매됐고, 수익금은 사회공헌활동에 쓰였다. 이후 나전칠기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명품 마우스와 KT&G의 명품 담뱃갑에 콜라보레이션되기도 했다.

경영컨설팅기업 베인앤컴퍼니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명품시장 규모는 약 12조원 수준이다. 세계 8위다. 하지만 명품을 보는 안목은 작품이 아니라 가격표에 가 있다. 시장에 맞게 안목을 끌어올려야 시장의 파이도 더 커지지 않을까. 이상현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장인이 만든다고 명품이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알아봐 줘야 진정한 명품이 된다.” 제아무리 명품이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라는 얘기다.   
김정덕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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