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기이사 외면하는 회장들

재벌 총수들의 ‘등기이사 기피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경제민주화’ 바람에 등기임원의 연봉공개까지 추진되자 너나 할 것 없이 등기이사에서 발을 빼고 있다. 책임경영의 근거 ‘등기문서’가 불태워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에게 책임경영이란 무엇일까.

▲ 재벌 총수가 필요할 때는 등기이사를 맡고, 문제가 생기면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현상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내년부터 연봉 5억원이 넘는 등기임원의 보수가 공개된다. 이 때문에 대기업 총수들의 ‘등기이사 기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임원명부에 등재된 ‘등기’만 지우면 연봉을 공개하지 않아도 돼서다.

금융위원회가 ‘임원 개인별 보수 공개 시행방안’을 발표한 11월 14일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과 부인 이화경 부회장은 지주사인 오리온의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박성경 이랜드 부회장은 4일 뒤인 18일 이랜드월드 등기임원 명부에서 이름을 지웠다. 6월에는 조정호 회장이 메리츠금융지주 회장에서 사퇴하며 등기이사에서 물러났다.

이에 따라 실질적인 연봉 공개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등기임원뿐만 아니라 미등기임원을 포함한 상위 연봉자 5~10명을 정하고, 그들의 연봉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경영진은 물론이고, 총수 일가가 많은 보수를 챙기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지수 경제개혁연대 변호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이재용 부회장(미등기임원)은 이건희 회장의 아들로 그룹 내에서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대표이사, 다른 등기이사들과 이재용 부회장 중 누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나? 연봉공개제도는 회사 내 권력을 가진 경영진(오너 포함)의 연봉을 공개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등기임원의 연봉을 공개하려는 게 아니다.”

 
오너의 등기이사 기피 현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올 초 ‘경제민주화’ 바람으로 등기이사의 책임을 엄격히 묻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총수들은 등기이사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다. 등기이사가 갖고 있는 법적 책임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권한과 권력을 줄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회사의 최대주주, 주요주주로 그룹 내에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다.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다.

실제로 2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계열사 부당지원ㆍ노조설립 방해 등으로 검찰수사를 받는 상황에서 등기이사에서 사임했다. 보다 자유로운 신분으로 수사를 받기 위해서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비슷한 시기에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이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대표이사, 등기이사에 다시 오를 수 있다.

‘사실상 이사제도’ 강화해야

이 때문에 오너가 필요할 때는 등기이사를 맡고, 문제가 생기면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구조를 원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중 주목받는 게 ‘사실상 이사제도’의 강화다. 재벌 총수가 회사 경영상 주도적 역할을 하면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지 않아도 사실상 이사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기면 총수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하다.

오너들은 하나같이 대표이사, 등기이사에 오를 때 ‘책임경영을 강화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단번에 대표이사, 등기이사에서 물러난다. 그러면서 “그룹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미래 사업에 집중하겠다”고 말을 살짝 바꾼다. 문제가 해결되거나 잠잠해지면 돌아올 준비를 한다. 재벌 총수들이 말하는 책임경영의 요체는 일반인의 상식과 다른 듯하다.
박용선 기자 brave11@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