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김기환 선생의 이순신공세가(李舜臣公世家) 제53회 ②

이순신의 문장저술은 모두가 슬퍼하는 정과 분개하는 의를 바로 문사에 표현하는 역량과 수완이 있어서 제갈공명의 「출사표」 또는 이영백의 「진정표」와 방출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문장으로 자부하는 일은 그의 일생에 없었다.

 
임진년 이래로부터 7년간 전쟁에 오직 이순신에게 지우와 은애를 받은 제장들과 혜택을 입은 군민들이 영원히 잊을 수 없어서 통영 여수 남해를 비롯하여 곳곳마다 사당을 짓고 비를 세우고 위패를 모시고 영정을 받들어 봄가을과 생신, 기일 및 4명절에 제전을 봉행하여 자손세세로 지냈다. 그 뒤에 조정에서 사액한 사당도 있고 그냥 둔데도 많다. 후인이 시문을 지어 찬송한 일이 많아서 모두 여기에다 기재할 수가 없으므로 대강 몇 편만을 소개할 뿐이다.

悼李將軍 ― 봉상정奉常正 차천로車天輅
[공과 동시대인이었다]
宇宙無雙將 威聲日東
鯨談笑外 熊虎指揮中
此老眞無敵 餘人盡發蒙
誰能鐫美石 偉績動昭瀜
우주에 둘도 없는 장수이니 위엄은 일본을 두렵게 했네
왜적은 담소거리에 지나지 않아 웅호 같은 군사 지휘하시네
이 어른이 참으로 적이 없으니 나머지는 몽매함을 깨쳤을 뿐
누가 아름다운 돌에 새길 것인가 위대한 공적이 소융10)을 움직였네

비문碑文 ― 영의정 잠곡潛谷 김육金堉
公料敵如神 卒以取勝 蔽遮江淮 沮其勢 與巡遠同 鞠躬盡 死而後已 與武侯同 功蓋一世 名聞四海 嗚呼偉哉
공은 적을 헤아리기를 귀신과 같이 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바다를 덮으며 쳐들어오는 왜적의 형세를 막은 것은 장순이나 허원과 같고, 온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둔 것은 제갈 무후와도 같다. 공은 온 세상을 덮고 이름은 천하에 들렸다. 아, 위대하다!

발跋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소재疎齋 이이명李命
露梁之役 秀吉新死 諸賊思歸 無鬪志矣 以公百戰之威 掃餘寇如拉朽 何不周防自惜 終以身殉也 世言公自度功高而身危 當矢石不避 嗚呼 或其然乎 蓋公七年戰爭 奇功獨多 然之黨讒而朝議之 一身幾死於桁楊 雖愚人亦能知其不免矣 與其掩昧罹禍 無寧明白立 此敵一退 又無可死之所矣 以公之明 早自審定歟 公之一死報國 固素蓄積 死生禍福 已付之於天

…노량의 전투는… 수길이 막 죽고 모든 적들이 돌아갈 생각을 할 때 공의 백전의 위엄으로 남은 적을 썩은 가지 꺾듯 쓸어 버렸으나 어찌 두루 방비해서 스스로를 아끼지 않고 끝내 몸이 죽음에 이르렀는가. 세상이 말하기를 공적이 높으면 몸이 위태로워질 것을 공이 스스로 헤아려 시석을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하니 아아, 혹시 그러한가!… 대개 공이 7년 전쟁에 기이한 공을 홀로 많이 세웠지만… 붕당의 무리들이 참소하여 조정의 의논이 그를 밀쳐… 일신이 형틀에서 죽게 되었을 때 비록 우매한 사람들까지도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으로만 알았다. 어두운 데서 화를 당하는 것 보다는 밝은 데서 목숨을 버리는 것만 못하고 더구나 이 적들이 물러가면 다시 죽을 곳이 없을 것이라, 공의 명민함으로 일찍이 스스로 조사하여 정하였음이라.… 공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한 것은 진실로 평생 쌓아온 것이요. 생사회복을 하늘에 맡김이라.…

문文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오윤겸吳允謙
公之在閑山也 隱然有虎豹之勢 敵人不敢動 公之去閑山也 將士墮心 保障一毁 覆敗隨之 其去而復來也 承陷沒之後 板蕩之餘 雖使古之良將 當之 實無用武之地而 能收拾補綴 不旬月而大挫方張之寇 及露梁之戰 躬冒凶鋒 誓死先登 破賊虜之膽 丸中於身 餘威所及 諸將戮力 卒成以死走生之棲 軍情向背 唯公一人而已 思九原而不作 悶百身而難贖

▲ 이순신은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여색을 멀리 했다. 밤이면 군사를 쉬게 하고 자신은 반드시 화살을 다듬었다.
공이 한산도에 있을 때는 은연중 호랑이 같은 형세가 있어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다가 공이 한산도를 떠나니 장졸이 낙심하고 보장이 일시에 헐려 패망이 따랐다. 갔다가 다시 와서 함몰되고 혼란한 뒤를 이어받으니 비록 옛날의 명장이라 해도 실로 능력을 펼칠 방법이 없었으나 능히 수습하고 보철하여 한 달도 못 되어 한창 일어난 적을 크게 꺾었다.

노량의 전투에서는 몸소 흉한 칼날을 무릅쓰고 죽을 각오로 앞장서서 적의 간담을 깨뜨렸다. 탄환을 몸에 맞았어도 남은 위엄이 미쳐 모든 장수들의 힘을 다하여 마침내 죽은 몸으로 살아있는 적을 물리치는 일을 이루었다.

군정의 향배는 오직 공 한 사람에게 달렸었다.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 올 수 없고 100명이라도 대신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노량의 대승첩이 있은 뒤에 전쟁은 끝이 났다. 전라도 일대에 있는 각 사찰의 승려들이 이순신을 위하여 재를 올리지 아니한 절이 없었는데 그중에도 자운이라 하는 화상은 일찍부터 승장僧將이 되어 순신의 진중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었다.

순신이 죽은 뒤에 각 방면으로 돌아다니며 백미 600석을 모아 가지고 노량에 와서 수륙제水陸祭를 성대히 지냈는데 삼혜 의능 처영 덕수 수인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경을 읽고 염불을 하였다. 이 자운 화상은 순천 왜교에 초묘를 짓고 순신의 모습을 자기 손수 그려서 봉안하고 일생에 경을 독송하였다. 자운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었다.

순신을 추모하는 승려들

또 옥동玉洞이라는 중은 순신의 군중에 오래 있어서 순신의 인격을 앙모하는 사람이었다. 순신이 죽은 뒤에 여수 충민사로 와서 자기 일생토록 돌아가지 아니하고 사당 청소를 하고 있었다 하였다. 비록 산인山人이나마 그 감화를 받은 보답을 이렇게 하였다.

이공의 유묵遺墨이순신의 문장저술은 모두가 그 슬퍼하는 정情과 분개하는 의意를 바로 문사에 표현하는 역량과 수완이 있어서 제갈공명의 「출사표」 또는 이영백11)의 「진정표陳情表」와 방불한 논문이었다. 그러나 자기는 문장으로 자부하는 일은 그의 일생에 없었다. 이제 그 한편의 글을 아래에 기재하여 독자로 하여금 모름지기 숙독 암송하도록 한다.

▲ 전라도 일대 사찰의 승려들이 이순신을 위해 재를 올렸다.
上體察使右議政完平府院君李元翼書
伏以事有不已之勢 情有莫急之形 以莫急之情 而値不已之事則 寧得罪於忘家之義 而勢或屈於爲親之私矣 舜臣有老母 今年八十有一 當壬辰之初 怯於俱焚 遂以一家 浮海而南 寓於順天之境 于是之時 以母子相見爲榮 而不暇計其他矣 越明年癸巳 皇威掃蕩 醜類逃遁 此正流民懷土之時也 然第以虜多詐 變謀百出 一隅聚屯 夫豈徒然 更若豕突則 是遺其親於餓虎之口 是以不能歸而式至于今日矣 雖然舜臣以庸才 承重寄 事有靡之責 身無自由之路 徒增陟岵之瞻 莫慰嗟季之心 朝出不還 尙有倚閭之望 何不見 已垂三載乎 頃因家 代人寄書曰 老病日甚 餘生無幾 願於未死 再見汝面 嗚呼使他人聞之 想欲淚下 爲其子者乎 自見此語 方寸益亂 而更無關心之事也 舜臣往在癸未之歲 爲咸鏡道乾原權管 而舜臣之父死焉 舜臣千里奔喪 生不能侍藥 死不得永訣 而常以爲終天之慟 今者母年已高於艾 堂日且迫於西山 若又一朝而忽有風樹之悲則 是舜臣再爲不孝之子 而母亦不能瞑目於泉下矣 舜臣竊自惟念 敵人之請成 是所謂無故之和也 皇朝之使節已下 而無渡海之形[謂李宗城楊方亨爲講和使留釜山三年] 前頭之禍恐有甚於往日[果有丁酉再亂之禍] 不以是冬歸寧於母 而春防又及則 不可離陣 閤下幸察寸草之情 給以數日之暇則 乘舟一覲 而老母之心 庶可少慰矣 設有緩急則 豈以閤下之命而敢誤機事者耶

체찰사 우의정 완평부원군 이원익 공께 드리는 글
엎드려 살피건대, 일에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고, 정에는 막급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막급한 정으로써 부득이한 일을 만나면 차라리 집안의 의리를 잊는 죄를 얻을지라도 형세가 혹 어버이를 위하는 사심에 더 끌리는 수도 있는 듯합니다.

제게는 노모가 계신데 올해 여든 살이시며, 임진년 초에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두려웠나이다. 구차히 보전하고자 일가를 배에 싣고 남쪽 순천의 경계에 옮겨 사시게 했습니다.

이때는 다만 저희 모자가 서로 만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를 누리는 것이라 여기며, 다른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음해 계사년에는 황제의 군사들이 적을 소탕하니, 적들이 도망하여 숨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떠돌던 백성들이 모두 제 고장을 그리워하게 되었나이다. 허나 적들은 속이는 잃이 많고 온갖 꾀를 다 내니, 한구석에 진치고 있는 것이 어찌 헛된 일이라 하겠나이까.

만약 저들이 다시 쳐들어온다 해도, 제 어미를 굶주린 범의 입에 보내는 꼴이 되겠기로, 얼른 돌아가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나이다. 저는 본래 용렬한 사람으로 무거운 소임을 욕되이 맡아, 일에 있어서는 허술히 해서는 안 될 책임이 있고, 몸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없어 부질없이 어버이를 그리는 정만 더할 뿐입니다. 자식걱정하시는 그 마음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는바 아침에 나가 미처 돌아오지만 않아도 어버이는 문밖에 서서 바라본다 하거늘, 하물며 못 본 지 3년이나 되옵니다.

얼마 전 집안시동에게 글을 보내셨는데, “늙은 몸의 병이 날로 더해 가니 앞날인들 얼마나 되겠느냐! 죽기 전에 네 얼굴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남이 듣더라도 눈물이 날 말씀인데 하물며 그 어미의 자식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그 기별을 듣고서는 가슴이 더욱 산란할 뿐, 다른 일에 마음을 둘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난 계미년에 건원보 권관으로 있을 때 선친께서 돌아가시어 천리를 달려와 분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약 한 첩 못 달여 드리고, 돌아가셨을 때는 영결조차 하지 못하여 항상 그것이 죽을 때까지 한이 되었습니다.

이제 또 어머니께서 고희를 넘기시어 해가 서산에 닿은 듯하온데, 만일 또 하루아침에 갑자기 부모는 돌아가시고 효행을 다하지 못하는 슬픔이 있게 된다면, 이는 제가 또 한 번 불효한 자식이 될 뿐 아니라, 어머님께서도 지하에서도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왜적이 화친을 청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고, 황제의 사신이 내려온 날도 벌써 한참인데, 아직도 적들은 바다를 건너갈 기미가 없으니, 앞으로 닥쳐올 화는 지난 때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겨울에 어머님을 돌아가 뵙지 못하면, 봄이 되어 방비에 또한 바쁘게 되어 도저히 진을 떠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합하께서는 이 애틋한 정을 살피시어 며칠간의 여유를 주신다면 한 번 가 뵘으로 늙으신 어머님 마음이 무릇 적게나마 위안이 될 듯합니다. 만일 그 사이 위급한 일이 생긴다면 어찌 대감의 허락이 있다하여 감히 중대한 일을 그르치는 잘못을 하겠습니까.

祭死亡軍卒文
親上事長 爾盡其職 投疽 我乏其德 招魂同榻 設奠共享

죽은 군졸을 제사하는 글
윗사람을 따르고 섬기는 일, 그대들은 그 직책을 다하였건만, 아랫사람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 아랫사람을 아끼고 보살피는 일,12)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혼을 한자리에 부르노니 차려놓은 제물을 함께 받으시라.

[이는 이공이 을미년 사이에 죽은 군졸을 위해 지은 제문인데 그 전체는 없어지고 단지 이 부분만 남아 있으니 애석하다.]

 
이공의 이들 글은 효심이 지극한 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면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감개무량한 마음을 일으킨다. 그뿐 아니라 명의 장수 이여송의 군사도 믿기 어렵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고 수길의 봉왕사절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며 왜란이 또다시 일어날 조짐이 있다는 뜻도 이 글 속에 포함되었다. 오리 이원익인들 어찌 알아보았으리요. 옛날에 제갈공명이 초려에서 천하가 삼분될 것을 짐작한 것과 동일하게 알았다. 이공의 선견지명이 이러하였다. 이광악이 가져온 송운일기를 보고 장차 반간계가 행할 줄을 알았으며 요시라와 김응서 권율의 세 사람 사이에 재화災禍의 기운이 자라나 삼도 주사가 낭패될 것을 선각하고 탄식하였으니 이공은 가위 천고에 첫째가는 사람이로다. 아, 선조대왕이여, 와룡 같은 성웅을 얻고도 쓰지를 못하였으니 탄식할 일이요, 애석한 일이로다.

이공의 일사逸事

이순신은 어릴 때로부터 산을 밀치고 바다를 뛰어넘는 기운을 품어서 거적巨賊 임꺽정林巨正을 한양 큰길에서 굴복시켰으며 젊을 때에는 만인이 보는 가운데 야우野牛를 차서 죽이고 권간權奸의 기세를 꺾었으나 그 뒤에는 독서에 전념하고 출입을 자제하였으나 그의 호방지기와 의협지심이 남아있었으나 오직 삼감으로써 지켜나갔다.

그 후에 건원보권관으로 있을 때에 호남무변 모씨가 북도변장으로 와 있다가 친상을 당하고 분상할 때에 노자가 부족하여 갈 수가 없었다. 순신이 이 말을 듣고 “내가 비록 그 사람은 잘 알지 못하나 어찌 포복지구13)가 없으리오” 하고 자기도 일개 변장의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타던 준마를 그 사람에게 주었다.

순신이 전라도 일대를 여행할 때에 이중익이란 지면이 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 난중에 살림하는 정도가 군색하다고 말함에 순신도 객지에서 돈도 없고 어찌하는 수 없어서 순신 자기가 입었던 의복을 벗어 주고 위안하였다.14) 그 의협적 심성이 이러하기로 그 당세에 호걸지사를 수하에 굴복케 하였다. 그 평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公自奉甚薄 寢不解帶 色無所近 戰勝之賞 必盡散與部曲 不爲己有 每夜休士 必自理弓箭 不忘殺一人 士卒咸樂爲其用 指爲神明 誠格上下 三軍一志 臨戰忘死 此其大略也

공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아 잘 때도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승전한 상은 반드시 마을에 나누어 주었고 자기가 차지하지 않았다. 밤이면 군사를 쉬게 하고 자신은 반드시 화살을 다듬었다.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아니하여 사졸들은 모두 기꺼이 쓰이고자 하였으며 그들을 귀신처럼 지휘하였다. 진실로 위아래를 바로잡아 삼군의 뜻이 하나로 모여 전쟁에 나가서는 죽음을 잊었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그 뒤에 충경공忠景公 유형이 임종 무렵 자기 자제에게 당부하기를 “이공의 신도비가 건립되기 전에는 내 묘에도 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그때 그 휘하제장들의 경모하는 성심성의는 죽을 때까지도 잊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겠다.

순신이 순절한 지 일년만에 즉 기해1599년 8월에 충청감사 김륵이 조정에 장계하되 “임란의 일등 공신인 이순신의 곧은 충성과 의열은 우주에 빛나건만 그 처자식이 아산 바닷가 골짜기에서 거친 논밭에 노비들도 없어 관청의 노역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 상막喪幕에도 아침저녁으로 제사음식도 이어가기 어렵다합니다. 보고 들은 바 측은함을 금할 수 없으니 그 연호잡역15)이나 면제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아아, 선조의 냉박함이여.

여수 충민사忠愍祠는 영인營人 박대복朴大福 등이 공의 충렬에 감복하여 짓기 시작하였다가 통제사 이시언이 일을 주관하여 건립하였다.
통영 충렬사忠烈祠는 공의 부하이던 통제사 이운룡이 건립하였다.
해남 충무사忠武祠는 호남의 진신장보縉紳章甫가 건의입사建議立祠하니라.
남해 충렬사忠烈祠는 통제사 정익鄭이 건립하였다.
아산 현충사顯忠祠는 충청도 사림 등이 소청疏請하여 건립하였다.
통영 착량묘鑿粱廟는 통영군민이 공의 유택을 사모하여 건립하였다.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자료제공 | 교육지대(대표 장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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