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의 Art & Dream | 일러스트레이터 톰 케인

▲ 톰 케인 작품.[더스쿠프 포토]
일러스트레이터 톰 케인(Tom Kane). 그는 뉴욕과 한국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다. 30년 가까이 맨해튼에서 광고아트디렉터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8년여간은 한국의 제일기획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주요 고객은 삼성전자였다. 지금은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 필자를 만나자마자 건넨 권총을 든 귀여운 다람쥐 일러스트. 다람쥐의 발밑엔 그의 이름과 홈페이지가 새겨져 있었다. 트레이드마크처럼 활용하고 있는 그만의 캐릭터란다. “이 그림 정말 귀여운데 무슨 사연이 있어요?”

“네. 전 한국인 여성과 결혼을 했어요. 한국에서 일하면서 만난 건 아니고, 그녀는 교포인데 미국사람에 가까워요. 물론 서울생활을 해봐서인지 소주ㆍ막걸리ㆍ불고기ㆍ냉면ㆍ치맥을 비롯해 좋아하는 한국음식이 많고, 이태원ㆍ강남ㆍ부산 등 좋아하는 곳도 많아요. 좋은 사람들도 많아 즐거웠던 추억도 많지요(웃음). 아무튼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알게 된 처와 저는 직접 만나면서 사랑을 싹 틔웠죠.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됐는데, 그녀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 ‘권총 든 다람쥐’예요.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를 정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산만한 편이고 재미있는 사건사고를 만드는 처를 생각하며 그린 거예요.”

“부인 사랑이 대단하시네요. 작고 연약해만 보이는 다람쥐가 권총을 들고 있으니 남다르게 강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것 같아요!”“하하, 잘 보셨네요. 그녀가 딱 그래요, 정말.”

문자를 이미지로 형상화하다

그는 언제부터 그림을 시작하게 된 걸까. “5살 때부터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뉴욕타임스에서 일하면서 그림을 취미로 그렸던 아버지를 본 후였죠. 주변사람들이나 선생님이 계속 칭찬하니까 신이 나서 계속 그렸죠. 예술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고 있었죠. 그러다 아주 쟁쟁한 친구들과 재능있는 사람들을 보고, 불현듯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일러스트레이터는 모두 천재였지만 전 조금 잘 하는 것뿐이었거든요. 그렇다고 그림 그리는 걸 포기하진 않았어요. 재미 삼아 그리기로 했죠.”

“그런데 언제 이렇게 유명해진 건가요?” “글쎄요…. 특히 아시아, 특히 한국에서 활동할 때, 제가 길에서 그린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어요. 그림 속 한글과 한문 등을 보면서 ‘한국어 할 줄 아냐’ ‘중국어 할 줄 아냐’ 라며 물었죠. 전 그걸 알 리가 없었죠. 그냥 문자가 아닌 그림으로 인식하고 따라 그린 건데 그들에겐 재미있었나 봐요. 그러다 제 홈페이지에 그린 그림을 한국사람 누군가가 발견해 포털사이트에 올렸고, 사람들이 이를 스크랩하고 퍼 나르면서 어느 순간 이름이 알려졌어요.”

“그 그림들 저도 봤는데, 그런 화풍은 언제 형성된 건가요.”“음…. 서른다섯 살 때였나. 어느 날 갑자기 머릿속에 작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이제까지 그림을 그려 보려고 노력한 적도 없이 ‘단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일’만 하려고 했던 건 아닌가라는 반성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당장 화방으로 달려가 작은 캔버스, 아크릴 물감, 붓 몇 자루를 사 왔죠. 그리고는 쉬지 않고 매일 매일 그렸어요. 하루하루 뭔가 발전할 수 있는 배움이 가득한 습작이었죠. 그릴 수 있는 모든 걸 그려봤어요.‘미술관에 그림을 전시하겠다’ ‘작품을 팔아야겠다’는 고민은 하지도 않고, 그냥 그렸어요. 제 방을 전부 제 그림으로 장식할 정도로 계속 그렸죠.”

▲ 톰 케인 작품.[더스쿠프 포토]
그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한 작가의 작업방식을 보고 벤치마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펜, 종이, 몰스킨 저널 등을 사서 어딜 가든지 갖고 다녔죠. 거리가 저의 작업실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날카롭게 깎은 프리즈마컬러 색연필, 작은 수채 물감과 붓. 그리고 접이의자 두개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그렸어요. 제 아내와 여행을 다니면서도 보이는 모든 걸 화폭에 담았죠.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이 드로잉하는 기쁨을 줬어요. 사람들의 열기, 햇볕과 보슬비 같은 자연,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샅샅이 살피며 그 자체를 즐기고 그린다는 게 매무 행복했죠. 이러면서 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이 생겨났어요.”

그리고, 또 그리면 답이 나와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필자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돌이켜보니 그때 필자의 행동이 얄밉기도 한 것 같은데, 사연은 이렇다. 그림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필자는 중학교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려오라는 숙제를 받았다. 실기점수 20점 만점이던 그 과제를 위해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16점을 받았다. 반에서 중간 정도 하는 평균적인 점수였다. 그리곤 난 선생님에게 물었다. “혹시 다시 그려오면 다시 평가해주실 수 있나요. 점수를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필자는 다시 그려 제출했다. 선생님은 1점을 더 올려주셨다. 필자는 또다시 몇번을 그림을 그려 다시 제출했다. 만점을 받을 때까지. [※반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척이나 얄미워할 것 같아 비공개적으로 계속 제출했다.] 신기하게 그해 필자는 미술과목에서 전교 1등을 했고, 덕분에 경복궁에서 열린 서울시 미술대회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대회에서 그려야 할 작품은 수묵화였다. ‘단 한번도 그린 적이 없는 장르’라며 겁을 잔뜩 먹은 필자에게 선생님은 재료를 한아름 안기며 ‘잘 다녀오라’며 용기를 줬다. 특별한 미술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필자에겐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경복궁을 어떻게 화폭에 담을까 숱하게 고민하면서 기둥ㆍ처마ㆍ마당 곳곳을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다. 필자는 그해 아주 작은 상을 수상했는데, 끊임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는 톰의 얘기를 들으면서 필자의 인생이 오버랩됐다. 이 말이 떠오르면서 말이다. “만족할 때까지, 계속 그려라. 네가 행복해질 때까지 인생이라는 화폭에 너만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가라. 그게 인생이다.”
손보미 ProjectAA* Asian Arts 대표 katie.son@theprojecta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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