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재의 人sight |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

▲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자본시장을 제대로 키워야 창조경제가 발흥한다”고 말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증권업계가 침체의 늪에 빠졌다. 3년 연속 손익 1위를 기록한 한국투자증권 유상호 사장은 시장 자체가 워낙 축소된 탓이 크다고 말했다. 독립 증권사로 1위를 놓치지 않는 비결에 대해서는 제대로 전략을 짜 일관성 있게 실행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한투증권은 직원 1인당 생산성이 업계에서 가장 높다.

✚ 은행계 증권사나 대기업 계열 증권사와 비교해 독립 증권사의 강점이 뭔가요?
“독립 증권사는 재벌기업이나 은행계 증권사와 달리 비빌 언덕이 없습니다. 해당 재벌이나 은행이 맡기는 일을 따기도, 그 임직원을 고객으로 삼기도 어렵죠. 반면 말 그대로 독립적이라 어느 기업이든 거래할 수 있어요. 가령 대기업 그룹이 다른 그룹 증권사에 일감을 주기는 쉽지 않지만 독립 증권사에 주는 건 별 부담이 없습니다.”

그는 위기 국면에서는 보수적인 은행계 증권사가 돋보이지만 글로벌 금융계를 보더라도 독립 투자은행(IB)들이 상대적으로 실적이 좋다고 덧붙였다.

✚ 한국형 IB의 비전 내지 목표가 무엇이 돼야 한다고 보나요?
“국내에 62개의 증권사가 있는데 우리나라엔 IB가 없다고들 합니다. 우선 국내 증권사들의 경우 주식 브로커리지의 비중이 너무 큽니다. IB의 다양한 업무를 조화롭게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는 거죠. 또 좁은 의미의 IB는 기업 금융과 기업 자문으로 먹고사는 은행인데 우리나라는 기업 시장 자체가 크지 않을뿐더러 국민들도 남의 아이디어에 대해 지불하는 데 인색합니다. 게다가 웬만한 재벌기업은 대부분 증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죠. 그 작은 시장 안에서 실제로 경쟁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규모가 더 작다는 거예요. 결국 해외로 나가 시장을 키워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금융은 거의 100% 내수산업인데 이제 우리보다 발전 단계가 낮은 이머징 마켓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시장은 규모가 작고 리스크가 커 글로벌 IB는 안 들어갔고 현지 증권사는 규모와 실력 면에서 우리보다 처지거든요. 우리는 글로벌 IB처럼 비즈니스 포트폴리오가 균형적이지는 않지만 브로커리지와 기업공개(IPO) 주관 업무는 잘 해요. 이 시장을 선점하고 이들 나라 시장이 장차 우리나라 금융시장만큼 커졌을 때 몇 나라에서 톱3 안에 드는 증권사를 우리 회사가 보유하면 지금의 몇배 규모로 성장하는 셈이죠.”

화교 네트워크 강한 중국, 강력한 경쟁자

✚ 이머징 마켓 중에서도 어느 지역에 주목해야 하나요?
“우리가 접근하기 좋고 우리와 문화 면에서 친화적인 나라, 우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아시아 국가에 들어가야죠. 이들 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회사가 되면 세계시장에서도 대접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동남아 시장에서 뭘 하려면 이 시장을 꽉 잡고 있는 한국의 한투증권을 쓰라는 소리를 들어 보려는 거고, 이게 한국형 IB의 비전이라고 봅니다. 아시아의 리딩 IB. 우리 회사의 비전이기도 하죠.”

▲ [더스쿠프 그래픽]
✚ 베트남은 그렇다 치고 인도네시아 시장의 매력은 뭡니까?
“우선 인구, 자원, 땅덩어리 등의 면에서 규모의 경제 요건을 갖췄습니다. 산업의 발전 단계로 보면 베트남이 그렇듯이 20~30년을 내다볼 때 빠르게 성장할 가능성이 크고요. 우리에겐 수십년간 축적한 경제개발 노하우, 그 과정에서 자본시장을 발전시킨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독보적인 자산이죠.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이 생존해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예요. 그래서 직접 이들 나라에 가 보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나라의 경쟁력이죠.”

✚ 아시아 이머징 마켓에 진출할 때 해외의 경쟁자는 누군가요?
“세 그룹이 있습니다. 글로벌 IB, 일본 및 중국계 금융사, 우리보다 규모는 작지만 국제화된 동남아의 리딩 회사들이죠. 어느 나라든 정부 차원의 큰 거래는 글로벌 IB가 차지합니다. 동남아의 경우 화교 네트워크가 강해 일본보다는 중국이 더 강력한 경쟁자죠. 우리보다 기업 규모도 더 크고요. 동남아의 경쟁국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나라입니다.”

✚ 국내 기업을 국내에서 사고파는데 외국계 IB가 중개 역할을 합니다. 대기업들이 구조조정을 할 때도 매각 자문 등의 업무를 보통 외국계 IB에 맡깁니다.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글로벌 네트워크는 물론 실력과 실적 면에서도 이들 글로벌 IB가 국내 증권사보다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도 써 줘야 우리도 실적이 쌓이고 경쟁력을 키우죠. 지금은 잘 못하더라도 국내 금융산업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일을 맡겨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요구를 민간기업을 향해선 못하겠지만 공공성을 띤 정부 관련 거래만이라도 국내 대형 증권사에 기회를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는 우리 정부 쪽 일이 외국계 IB의 몫이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우리나라 관가의 풍토를 지적했다. 나중에 감사도 받아야 하는데 일을 무난하게 처리하려면 세계 1,2위 글로벌 IB에 맡기는 게 뒤탈이 없다는 것이다.

✚ 동양그룹이 구조조정 용역 업무를 할 수도 있는 증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고도 제때 구조조정을 못해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 원인이랄까 배경이 무엇이라고 보나요?
“증권 계열사가 없더라도 구조조정을 할 생각이 있었으면 했을 겁니다. 증권사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동양그룹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이 좋은 물건이었다면 동양증권 말고 다른 증권사들은 왜 안 팔았을까요? 말하자면 구조조정 문제라기보다 기업지배 구조와 연관된 문제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산업자본이 금융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폐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당국이 촘촘하게 그물을 칠 테니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줄어들겠지만 지금 같은 지배구조 하에서 아주 없어질 거라고 내다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동양증권을 비롯해 현대증권, 중소형 증권사 6곳이 시장에 매물로 나와 있다. 매물이 넘치다 보니 ‘대어’인 KDB대우증권은 아예 매각을 미루기로 했다.

매력 있는 증권사 매물 거의 없어

✚ 증권업계가 앞으로 어떻게 재편될 것으로 내다봅니까?
“시장에서 팔릴 만큼 매력을 지닌 회사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인수ㆍ합병(M&A)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봐요. 그 결과 경우에 따라 주인이 헐값에 넘기거나 스스로 문을 닫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정부 정책은 대형사는 제대로 된 IB로 키우고 중소형사는 특화하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이에 따라 대형사와 중소형사 간의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산업자본에 종속된 증권사의 폐해를 목도해서인지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독립 증권사를 더 키우겠다고 했는데, 그래서 우리 회사의 경우 환경이 다소 호전될 거로 봅니다.”

▲ 유상호 사장이 2010년 11월 자회사인 KIS베트남 출범식에서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사진=한국투자증권 제공]
✚ M&A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검토한 일이 없어 관심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습니다.”

✚ 창조금융이라는 게 실질적인 내용이 있습니까? 창조금융을 어떻게 실현해야 한다고 보나요?
“신기술과 새로운 아이디어가 빛을 보거나 융합이 일어날 때 창조경제가 꽃을 피웁니다. 또 전통적 산업이라도 그 산업의 정의를 바꾸어 영역이 넓어지고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되면 창조경제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봐요. 그런데 자본시장을 제대로 키워야 창조경제가 발흥합니다. 처음 시도하는 창조적 비즈니스에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할 은행 돈이 들어가기는 어렵기 때문이죠. 창조금융도 창조경제와 마찬가지로 파생상품 등 새로운 상품이 나와 상품의 영역이 넓어지고 해외로 나갈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새 상품 가운데는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작은 것도 있을 수 있어요.”

✚ 한국 증시가 지금의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려면 패러다임이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주가지수가 1000을 못 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우리 기업들이 투명성이 떨어지고 지배구조가 불확실했기 때문이에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이런 문제들이 많이 해결돼 2000을 찍었는데 다시 벽에 부닥친 거죠. 전통적인 산업에 속한 기업들은 할 만큼 했습니다. 삼성전자, 현대차, 포스코 등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만큼 잘합니다. 지수가 3000까지 가려면 창조경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기존 영역이 확장되고 서비스업이 성장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돼요. 그렇게 되려면 규제를 풀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합니다.”
그는 일례로 100% 내수산업인 의료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의료 관광 세계 시장 규모가 연간 1000억 달러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의 외국인 환자수(2012년 기준 16만명)는 태국의 10분의 1 수준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형외과, 피부과, 치과, 안과 그리고 건강진단 수준이 세계 최고입니다. 안과 빼고는 돈 있는 사람들이나 진료 받고, 환자가 돌아다니면서 치료 받을 수 있는 종목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들이 중국, 일본, 대만, 동남아 등에 어마어마하게 많이 살아요. 이들을 의료 관광객으로 끌어들이면 큰돈을 벌 수 있는데 그걸 제대로 못하고 있잖아요.”

유 사장은 8년째 재임 중인 증권업계 최장수 CEO다. 과거 ‘증권 사관학교’로 통했던 대우증권 출신으로 취임 당시 업계 최연소 CEO였다. 메리츠증권에 있던 그를 동원증권 시절 발탁한 사람은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부회장이다[※동원증권은 2005년 한투증권을 합병한 후 한투증권으로 이름을 바꿨다].

▲ [더스쿠프 그래픽]
대우증권 런던법인에서 일하던 시절 고객들은 그를 레전드리 제임스(Legendary Jam esㆍ전설의 제임스)로 불렀다고 한다. 대우증권을 통해 이뤄진 외국인 투자의 60% 이상을 혼자서 해낸 적도 있었다. 제임스는 영국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입력하기 위해 그가 고른 이름이었다. ‘007 제임스 본드’. 사무실 전화번호로는 8007을 사용했다. 모르는 세일즈맨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받지도 않던 1990년대 영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었다. 독립 증권사 CEO로서 그가 구사하는 배수진은 그 시절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장수 CEO로서의 노하우가 뭔가요?
“내일이라도 그만둘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을 비우게 됩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면 긴 안목으로 몸을 던져 일하게 되죠.”

✚ 오너와의 관계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방향으로 오너와 비전과 철학을 공유하고 나아가야죠. 문제가 됐던 회사들은 대주주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우리나라가 금융산업의 밑그림을 어떻게 그려야 한다고 보나요?
“그동안의 금융정책은 은행 위주였습니다. 계획경제 하에서 한정된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려면 정부가 은행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죠. 이제 금융정책의 중심을 자본시장 쪽으로 옮겨야 합니다. 저성장ㆍ저금리 시대엔 개인도 마찬가지지만 투자를 잘해 국부를 키워야 합니다.”

✚ 그런 밑그림에 대해 정부 안에도 공감대가 있나요?
그런 인식이 있지만 아직은 소수인 것 같습니다. 은행에 문제가 생기면 경제 전체가 삐걱거리니 은행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고요.”

✚ 글로벌 대기업의 투자처로서 한국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요?
“대기업이 해외로 나가는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죠. 저성장을 기정사실화하더라도, 각종 규제를 풀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야 그나마 성장을 하고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필재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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