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①

모든 게 어지럽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지만 우리 사회는 ‘리더십 실종사태’를 겪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리더’를 자처하지만 위기에 빠진 경제를, 수렁에 빠진 정치를 다잡을 ‘진짜’ 리더는 찾기 어렵다.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의 리더십이 그립다. 많은 독자의 요구로 지난해 연재를 마무리한 ‘이순신공세가’를 다시 꺼낸다. 회당 김기환 선생의 작품으로, 이번엔 각주를 본문에 넣어 가독성을 높였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이다. 순신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음성이 우렁찼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순신의 본관은 풍덕부 덕수현(현재 개성시 판문군에 있다)이다. 순신의 11대조가 되는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시대 당시 벼슬이 중랑장(정5품 보좌관)에 이르렀다. 이는 덕수이씨의 비조였다. 10대조가 되는 이양준李陽俊은 벼슬이 보승장군(정4품)에 이르렀고 사후에 증직이 이부상서였다.

9대조의 벼슬은 지삼사사(종4품)에 이르렀고 증직이 상장군이요, 8대조는 이윤번李允番이니 조선 초에 문과로 도사(종5품)에 이르렀고 증직이 좌참찬이요, 7대조는 이현李玄이니 벼슬하지 아니하고 증직이 좌찬성이요, 6대조는 이공진李公晋이니 벼슬이 수사재시사(해산물과 하천을 관리하던 부서의 장교)에 이르렀고 증직이 영의정이다.

5대조는 이변李邊이니 나이 30세에 문과에 처음 올라 세종 때 명신으로 예조판서, 대제학, 영중추부사 등에 이르고 충직함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중국어에 능통해 사신으로 자주 다녀 중국인들이 그 명성을 알았으며 시호는 정정공貞靖公이요, 4대조 다시 말해 고조는 이효조李孝祖이니 벼슬이 통례원通禮院 봉례(정4품)에 이르렀고, 증조는 이거이니 문과 홍문관 박사로 동궁東宮의 강관講官이 되어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그 엄정함으로 항상 세자가 어려워하였다 하고, 그 뒤에 장령(정4품)이 되어 있을 때도 권세 있는 대신이라도 그 과실을 알면 반드시 탄핵하니 조정의 관리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범 같은 장령(성종 때의 호장령虎掌令)이라고 지칭하였다.

그 후에 이조정랑 병조참의에 이르렀고,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진사로 연산군의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참봉 및 봉사의 벼슬을 받았지만 다 사직하였고 그 당시 명사 정암 조광조趙光祖 등과 교유하다가 마침내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훈구파에 의해 조광조 등 신진 사림파가 숙청된 사건)에 연관되기도 했다. 그 뒤에 호조참판으로 증직됐고, 부친인 이정李貞은 벼슬길에 나서지 아니하였으나 음직蔭職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였다. 증직은 아들 순신으로 인하여 좌의정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을 봉하였다.

이런 덕수이씨는 고려 말부터 혁혁한 가문으로 덕행과 문학이 계계승승하여 왔다. 이정의 가업은 유교를 숭상하였다. 대대로 충효로 자손을 교육하여 왔기 때문에 가풍이 순후하나 가세는 청빈하여 본분을 지켰으며 안빈낙도함으로 구름과 학을 벗하였다. 슬하에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희신羲臣은 벼슬 없이 단명하였고, 둘째 요신堯臣은 진사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생이더니 역시 단명하고, 셋째는 곧 순신舜臣이요, 막내 우신禹臣은 벼슬이 참봉에 그쳤다. 이순신은 인종 원년 을사1545년 3월 8일 자시에 서울 건천동 본가에서 출생하였다. 건천동은 서울 중구 인현동 1가를 말한다. 명보극장 앞에 집터 표지석이 있다.

 

유교를 숭상한 이순신의 가문

그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였다. 순신을 낳을 때에 한 꿈을 얻으니 그 시아버지 봉사공 이백록이 옥동자를 안아주며 “이 아이는 하늘의 성군星君으로 장래에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다” 하였다. 과연 용모가 남다르고 음성이 우렁찼다. 점을 치는 음양가陰陽家가 말하기를 “이 아이가 나이 50세가 되면 북방에 대장이 되어 부월(임금이 장수에게 통솔권의 상징으로 주던 도끼)을 잡고 이름이 천하에 진동하리라” 하였다. 이름은 순신이라 하고 자는 여해汝諧라 하였다.
 

▲ 순신은 전쟁놀이를 할 때도 위풍이 당당하고 지휘가 뛰어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혹은 말하되 순신이 장성한 뒤에 자호自號를 기계器溪라 하였다가 아산牙山으로 낙향한 뒤에는 백암白巖이라 하였다. 순신의 나이 5~6세가 되자 알음알이가 뛰어나고 총명하고 영민하기가 짝이 없었다. 어떤 때는 어른을 놀랠 만한 행동이 많았다. 그 부친 이정이 극히 사랑함이 여러 형제에서 더하였다. 하루는 이정이 순신의 슬기롭고 영리한 재지를 시험해 보려 하여 방 안에 앉아서 순신을 보고 “네가 나를 마루로 나오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순신이 대답하되 “아버지가 방 안에 계시니 마루로 나오시게 함은 극히 어렵지만 만일에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계신다 하면 방 안으로 들어오시게 함은 비교컨대 쉬울 듯합니다. 그러니깐 어려운 문제보다는 비교적 쉬운 문제를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그 아버지를 조른다. 이정이 껄껄 웃으며 마루로 나와서 앉으며 “오냐, 네가 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하여 보아라. 정말 쉬운 문제인가 보자” 하였다. 순신이 손뼉을 치며 말하기를 “아버지가 마루로 나와 앉으시니 내 계교가 성공되었다” 하고 즐거워하였다.

순신이 점점 자라 8~9세가 되매 근골이 발육되어 용감하고 민첩하여 나는 새와 달리는 개를 쫓아 잡고 몇길 높이를 뛰어오르며 성품이 활달하여 벌써 빼어난 기상이 있었다. 서울 거리에서 많은 아이들과 모여 놀 때 매양 진치고 전쟁하기를 좋아하는데, 순신은 언제든지 그중에 대장이 된다. 그 지휘가 법이 있고 행렬이 엄숙하여 위풍이 당당하고 질서가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그 명령에 복종하여 추호라도 거역하지를 못한다.

비록 나이든 사람이라도 순신의 진을 범하거나 횡단통행을 하려 하면 순신은 말하되, “어른이 되어 눈이 있어도 장수의 진을 보고도 알지 못하고 범하니 내 마땅히 그 눈을 쏘아 징계할 것이오” 하고 대로 만든 활을 당기어 눈을 쏘려고 협박하였다.

전쟁놀이만 하면 늘 ‘대장’

그러니 비록 어른이라도 하는 수 없어서 다 순신의 진은 피하여 다녔다. 순신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그 부모의 교훈을 받아 충효와 정의로 그 심성을 수양하였다. 소년시대가 되어 장형 희신과 중형 요신을 따라 한문서숙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하니 그 재주가 출중하여 장래에 크게 성공할 것을 기대하였다. 중형 요신을 따라 퇴계선생 이황의 문중에도 논 일이 있었다 한다. 요신은 이황의 문하생이었다.
 

그 부친 이정은 항상 순신을 대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안 대제학 정정공의 뒤를 이을 자손은 아마도 너희들이니 아무쪼록 글공부를 잘해서 입신양명하여 부모와 집안을 빛내라”고 장려하였다. 순신이 나이 14세가 되어 자기 집 사랑에다 한문을 가르치는 사숙私塾을 열고 어릴 적에 길에서 진치고 놀던 총죽(어렸을 때 함께 놀던 벗)의 무리들을 불러 모아 자기가 선생님 격으로 되어 글을 가르쳤다. 그러고 보니 전일에 길 위의 대장이던 순신은 금일에는 집 안의 선생님으로 변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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