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에 숨은 한국의 자화상

▲ 다문화가정이 정부정책으로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엔 더 큰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사진=뉴시스]
다문화가정의 가장 큰 걱정은 자식이다. 다른 피부색 탓에 차별을 받을 확률이 높아서다. 주목할 점은 다문화가정이 차별을 대물림하지 않는 방법으로 ‘돈’과 ‘학벌’을 꼽고 있다는 것이다. ‘돈과 학벌만 있으면 모든 게 끝난다’는 한국사회의 나쁜 바이러스가 다문화가정에 전염된 듯하다. 돈과 학벌이 다문화가정까지 지배하기 시작했다.

# ‘푸른 눈의 한국인’. 이름은 안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학을 다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 2004년 한국에 정착했다. 안나는 “그러고 보니 벌써 한국생활 10년차”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안나가 요즘 가장 걱정하는 건 자식이다. 다른 피부색 때문에 차별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이다. 그는 ‘영어강사’로 일한다. 아이 사교육비를 위해서다. 다른 이유도 있다. 부자가 되면 ‘괴롭힘’을 당할 확률이 줄어들어서다. “한국에서 아이가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딱 두가지다. 하나는 부모가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거다. 다른 하나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거다.” 피부색이 다른데, 평범하기까지 하면 차별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 방글라데시에서 온 압둘라는 실제로 피부색 때문에 차별도, 상처도 많이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한국에 온 압둘라씨의 직업은 사출성형 기술자. 쉽게 말해 플라스틱 제품을 제조한다. 2005년 같은 곳에서 일하던 지금의 부인을 만나 한국에 뿌리를 내렸다. 압둘라의 걱정 역시 안나와 비슷하다. 검은 피부, 짙은 눈썹에 곱슬머리를 가진 자식 걱정뿐이다. 7살인 큰 애는 이미 세 번이나 유치원을 옮겼다. 혼혈아이라고 퇴짜를 놓는 유치원도 있었다.

압둘라는 “내가 피부색이 달라서 받는 차별은 견딜 수 있지만 아이는 어떻게 견딜지 답답한 노릇”이라고 말했다. ‘공부를 잘 하는 길이 자식이 살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안나처럼 사교육비를 많이 대기도 어렵다. 성실하게 직장생활을 한 끝에 월 300만원을 버는 관리자가 됐지만 외벌이여서 살림살이가 팍팍하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많지도 않다. 압둘라는 “한국 국적을 딴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전히 외국인으로 통한다”며 “그래서 한정적이고 힘든 일을 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차별, 이 무서운 녀석이 ‘다문화가정’을 관통하고 있는 듯했다.

▲ [더스쿠프 그래픽]
우리 정부가 다문화가정을 위한 정책을 편 건 2006년 참여정부 때부터다. 다문화가족의 정착을 돕는 ‘다문화가족지원법’은 2008년 3월 제정됐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다문화가족 인권개선을 중점추진과제로 선정한 것도 이 무렵이다.

차별 대물릴까 전전긍긍

2009년부터는 다문화가정 지원이 부처별로 다양해졌다. 법무부는 출입국관리를 비롯해 이주와 정착에 필요한 법체계를 지원했고, 고용노동부는 이들의 취업과 근로조건 개선을 도왔다. 보건복지부(당시 보건복지가족부)는 2005년부터 운영되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현재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늘려 한글교육과 아동양육지원에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국민인식 개선활동을 펼쳤고, 여성가족부는 이주여성에 대한 폭력방지와 인권 향상을 도모했다. 범정부 차원에서 다문화가정을 지원했다는 얘기다.
그럼 정부의 지원정책은 알찬 열매를 맺었을까. 2009년과 2012년 나온 ‘다문화가족실태조사’를 토대로 보면 많은 부분이 개선됐다. 먼저 ‘힘든 점이 없다’고 답한 이들은 12.9%에서 15.8%로 늘었다.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어려움’도 13.5%에서 7.0%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하지만 악화된 부분도 있다. ‘외로움’은 9.6%에서 14.2%로, ‘편견과 차별’은 3.9%에서 7.0%로 늘었다. ‘언어문제’는 21.7%에서 21.1%로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다문화가정이 아직은 ‘한국의 울타리’ 밖에 머물러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통계다. 안나와 압둘라가 ‘자식걱정’을 털어놓은 이유도 여기에 있는 듯했다.

물론 다문화가정이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던 ‘경제적 어려움’은 21.9%에서 19.8%로 낮아졌다. 그렇다고 다문화가정의 전반적인 살림살이가 개선됐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다른 통계를 보자.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다문화가정의 결혼이민자나 귀화인의 직업은 남녀를 불문하고 단순노무직(남 25.1%, 여 29.9%)이 가장 많았다.

▲ [더스쿠프 그래픽]
여기 가정은 화목하지만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이가 또 있다. 1997년 한국인과 결혼한 마흔다섯살의 미첼이다. 한국에 산지는 벌써 17년째다. 가정적인 남편을 만나 나름대로 화목한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경제적 여유가 없어 고민이다. 미첼과 남편은 맞벌이를 하지만 부부합산 월평균 수입은 200만원가량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일정하지 않다. 일용직 건설노동자인 남편은 일거리가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요즘처럼 건설경기가 바닥이면 더욱 그렇다. 그럴 땐 미첼씨가 영어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한달을 버틴다.

5년 전 전셋집을 얻기 빌린 은행 빚 6500만원을 매달 40만원씩 갚아나가는 것도 벅차다. 다 갚으려면 아직 25년은 더 걸린다. 이자율이 낮은 대출상품으로 갈아탈 수도 있지만 그래 봤자 삶이 빠듯하긴 마찬가지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야 한다는 게 미첼의 생각이다. 미첼이 돈 버는 일에 집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자 되면 자식걱정 끝이라니

안나, 압둘라, 미첼은 모두 같은 고민을 안고 있다. 자식걱정이다. 공교롭게도 이 걱정을 털어낼 해법으로 이들은 ‘돈’과 ‘교육’을 꼽고 있다. 이를테면 ‘부자가 되거나 자식이 공부를 잘 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 [더스쿠프 그래픽]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특별한 외모는 따돌림이나 학교폭력의 원인이 되고 있다. 다문화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다문화가정 자녀의 학교폭력 피해율은 8.7%로 전체 학교폭력 피해율(8.5%)보다 높았다. 따돌림은 조사에 포함되지 않았고, 학교폭력은 겉으로 드러나야 조사된다는 걸 감안하면 실제 피해율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피해 연령은 9~14세가 대부분이었다. 취학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일반 학생들이 대학교 이상의 고등교육기관에 취학하는 비율이 68.4%인데 반해 다문화가정 자녀는 49.3%에 불과하다.

다문화가정에 ‘대代를 이은 차별’의 고리가 생긴다는 건 대수롭지 않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이 고리를 끊을 방법이 ‘부’와 ‘학벌’밖에 없다는 점은 더 큰 고민거리다. 한국사회에 속해 있는 국적을 불문한 구성원들이 ‘돈’과 ‘학벌’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줘서다. 어쩌면 ‘정情’이 넘치던 한국사회의 DNA가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문화가정에서 한국사회의 자화상이 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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