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공백, 실적에 영향 끼치나

▲ 총수가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은 재벌 그룹이 경영상 공백을 우려했다. 왼쪽부터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이재현 CJ 회장 [사진=더스쿠프 포토]
‘오너가 구속되면 경영에 차질이 생긴다’. 최근 총수가 구속된 재벌그룹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다. 과연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기업은 총수가 아닌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기업 실적은 총수가 아닌 업황이 좌우한다. 총수가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은 SKㆍ한화ㆍCJ의 사례를 살펴봤다.

SK그룹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를 통해 ‘3.0 시대’를 준비했다. 그룹 쌍두마차인 정유ㆍ화학(SK이노베이션ㆍ1.0시대)과 통신(SK텔레콤ㆍ2.0시대)에 반도체 사업을 더해 새로운 성장을 꾀하겠다는 거였다. 그러나 SK의 원대한 포부를 가로막는 게 있었는데, 다름 아닌 최태원 SK 회장의 횡령 문제였다. 최태원 회장과 그의 친동생인 최재원 SK 부회장은 2011년 4월 선물투자로 인해 수천억원대의 손실을 입었고, 그 과정에서 횡령 혐의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검찰조사까지 받았다.

그러자 SK 측은 최태원 회장의 부재로 경영상 공백이 우려된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놨다. 과연 그랬을까. 아쉽게도 최 회장의 부재는 SK 실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해 SK는 그룹 전체 매출 154조7280원, 당기순이익 6조4160억원을 달성했다. 전년에 비해 각각 38.6%, 29.6% 증가한 규모로, 사상 최대 실적이었다. 이는 SK 임직원에게 자부심을 줄 만한 실적이었다. 총수 한 사람이 아니라 임직원, 그리고 시스템으로 그룹이 돌아가고 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실적에 섭섭한 감정을 느낀 이는 SK에서 단 한명이었을지 모른다. 바로 최 회장이다.

▲ [더스쿠프 그래픽]
총수가 구속되거나 법정재판을 받은 재벌그룹들이 경영상 공백에 따른 우려를 표하고 있다. 총수가 없으면 그룹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재계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벌 기업은 총수가 재판을 받거나 문제가 생기면 ‘총수의 부재로 기업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대로 총수에게 문제가 없는 평상시에는 ‘대표이사 등 경영진과 실무자 등이 맡은 분야에서 각자의 역할을 한다. 기업은 조직과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우리는 총수 1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기업이 아니다’고 말한다.”

올 2월 27일 징역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을 보자. SK그룹 매출에서 약 50%를 차지하는 SK이노베이션은 2011년 매출 68조3711억원, 영업이익 2조9594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각각 27.2%, 31.4% 증가했다. 최태원 회장이 검찰조사를 받을 때였지만 실적은 되레 늘었다. 총수의 공백이 크지 않았다는 얘기다.

총수 구속만 되면 경영공백 타령

이런 SK이노베이션의 실적이 감소하기 시작한 건 2012년부터다. 2012년 영업이익은 전년에 비해 42.6% 감소했고, 2013년에는 18.7% 감소했다. 공교롭게도 최 회장의 구속시기와 얼추 맞물린다. 그렇다면 최태원 회장의 공백이 실적 악화의 주요 원인이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전문가들은 오너의 부재보다 나빠진 업황이 문제였다고 설명한다. 정용진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국내 정유사의 경우, 원유를 사와서 휘발유ㆍ경유 등으로 정제해 파는 게 주요 사업인데 원유를 비싸게 사오고 판매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며 “당연히 수익성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SK이노베이션뿐만 아니라 GS칼텍스ㆍ에쓰오일 등 국내 정유사 모두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SK그룹의 또 다른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의 영업이익은 2011년 2010년(2조5557억원)에 비해 10.1% 감소했고, 2012년은 24.6 % 줄었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16.2% 증가했다. 2011년 초 SK텔레콤이 인수한 SK하이닉스는 2012년 227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지만 지난해에는 영업이익 3조3797억원을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종합해보면, SK이노베이션의 실적은 감소했고 SK텔레콤과 SK하이닉스의 실적은 증가했다. 기업 실적이 오너가 아닌 업황에 따라 좌우됐다는 얘기다.

▲ [더스쿠프 그래픽]
최 회장의 경영공백보다 도리어 ‘최태원 회장 살리기’에 몰두하면서 손해를 본 게 더 크다는 지적도 나온다. 2002년 소버린 사태 당시 최태원 회장의 변호를 맡았던 한 변호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검찰조사 중 최태원 회장의 비자금이 발견됐다.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이 최태원 회장에 대한 해명을 해달라고 왔고, 일을 맡았다. 당시 그룹 전체가 ‘최태원 회장 살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SK 법무팀 인력은 ‘최태원 회장 살리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룹에서 이보다 중요한 사안은 없었을 것이다. 이번 최태원 회장의 횡령 사건도 마찬가지로 그룹 경영 방향이 성장이 아닌 총수 구하기로 가고 있을 것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구속되면서 주요 계열사 사장으로 구성된 집단경영체제 ‘수펙스추구협의회’를 설립했다. ‘오너 중심’의 경영체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최태원 회장은 SK㈜ㆍSK이노베이션ㆍSK하이닉스ㆍSK C&C 등 주요 계열사의 등기이사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여전히 대주주이고, 그가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 [더스쿠프 그래픽]
최태원 회장과는 달리 부실 계열사를 부당 지원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2월 11일 징역3년과 집행유예5년, 벌금51억원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한화그룹 측은 “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며 “오랜 재판으로 인한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반성과 개선을 통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한화 역시 김승연 회장이 구속되는 상황이었다면 입장이 달랐을 거다. 일례로 2007년 7월 김승연 회장이 ‘보복폭행 사건’으로 징역1년6개월을 선고받았을 때 한화그룹은 “해외사업 차질과 장기 경영공백으로 인한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더구나 한화는 이번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주력 계열사 실적이 좋지 않을 때마다 오너 부재로 인한 결과라는 식의 입장을 취해왔다. 한화건설이 수주를 못해도, 한화케미칼의 태양광 사업실적이 신통치 않아도 죄다 경영공백 탓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업황에 따라 실적 좌우

김승연 회장이 가장 집중적으로 키운 태양광사업을 보자. 물론 한화그룹이 시장의 우려에도 태양광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한 배경에 김승연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최근 태양광산업이 되살아나면서 한화케미칼의 주가가 꿈틀거리는 덴 투자의 공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한화의 태양광사업이 김 회장의 구속과 경영공백 때문에 어려워진 건 아니다. 태양광산업은 김 회장이 법정구속되기 전인 2011년부터 이미 남유럽 재정위기와 폴리실리콘 가격하락 등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상당수의 기업이 태양광사업의 비중을 줄이거나 아예 발을 뗐다. 태양광사업의 주축인 한화케미칼의 실적이 아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더구나 김 회장이 석방되기 전인 지난해 4분기엔 오히려 흑자를 냈다. 태양광산업 구조조정이 마무리되면서 폴리실리콘 등 제품 가격이 올라서다.

▲ [더스쿠프 그래픽]
한화케미칼의 주가를 봐도 상황은 비슷하다. 김승연 회장이 구속되던 날인 2012년 8월 16일 2만1850원로 떨어진 한화케미칼 주가는 17일엔 2만1950원, 18일엔 2만2150원까지 올랐다. 경영공백이 심각한 타격으로 이어졌다면 주가는 폭락했어야 한다. 결국 경영실적이나 주가는 김승연 회장의 경영공백과 큰 연관성이 없고, 되레 업황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다.

한화의 또 다른 주력계열사인 한화건설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초 건설 업종의 실적은 주택경기 침체 장기화와 해외시장 수익성 악화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게다가 유동성 위기로 인한 재무건전성 악화, 4대강 건설 관련 담합비리까지 터지면서 사면초가를 맞았다. 김현중 한화건설 부회장은 그해 4월에 열린 한 세미나에서 “김승연 회장의 경영공백으로 이라크 추가 공사 수주가 답보상태에 빠져 있다”며 “김승연 회장의 경영복귀가 아쉬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화건설은 김승현 회장이 없던 지난해 해외에선 4800억원짜리 알제리 발전플랜트를, 국내에선 320억원대 상주 영천고속도로 사업, 400억원대 제주 국제여객터미널 공사 등을 수주해 공공부문 수주금액 기준 5위를 달성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라크 신도시 건설과 관련해서도 수천억원의 선수금을 받으며 순항했다. 지난해 4분기까지 적자를 이어가다 올해 1분기 370억원가량의 영업이익을 내며 흑자로 전환한 건 이 때문이다. 김 회장이 없어도 회사는 잘 굴러갔단 얘기다.

▲ [더스쿠프 그래픽]
CJ그룹 역시 총수의 구속과 관련 경영공백을 운운했다. 2013년 중순 검찰 조사를 받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올 2월 14일 실형을 선고받았다. CJ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의 공백이 주요 사업의 실적 악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룹 주력계열사 CJ제일제당은 지난해 영업이익 3454억원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43.87% 줄어든 규모다.

하지만 이 회장의 부재로 인한 실적 악화보다는 업황의 영향이 더 컸다. CJ제일제당의 실적 하락의 주요 원인은 영업이익의 50%가량을 차지하는 바이오 사업의 수익성 악화다. 바이오 부문의 핵심 사업인 라이신(사료용 아미노산) 판매마진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2012년 t당 2000달러였던 라이신 판매가는 지난해 1200~1400달러로 떨어졌다.

총수 견제할 수 있는 장치 없어

이처럼 기업 실적은 총수 부재보다는 업황이 좋고 나쁘냐에 따라 결정된다. 물론 총수의 역할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죄를 지었을 때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며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문제가 있다.

▲ [더스쿠프 그래픽]
과거 기업 규모가 작았을 때는 총수의 역할과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의 선택에 따라 회사의 명운이 달라져서다. 하지만 지금처럼 회사 규모가 성장한 경우 총수 한명이 모든 것을 알고 결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전문경영인의 역할이 중요해진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총수는 능력 있는 인재를 얼마나 많이 확보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만들어주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재계에선 ‘총수가 조용히 지내야 그 기업이 성장한다’는 말도 나온다.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총수 개인의 것이 아니다. 총수에 의해 움직여서도 안 된다. SKㆍ한화ㆍCJ의 임직원 수는 총 16만명이다. 이들보다 최태원ㆍ김승연ㆍ이재현 회장 3명 총수의 역할이 더 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박용선ㆍ김정덕 기자 brav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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