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랭크 인 | 노예 12년

1800년대 미국은 노예제도를 따르는 남부의 ‘노예주州’와 그렇지 않은 북부의 ‘자유주州’로 양분돼 있었다. 목화 재배로 인해 일손이 많이 필요했던 남부는 노예에 대한 수요 또한 급증했고 노예들은 물건처럼 사고 팔렸다. 1790년대 6개주에 불과했던 노예주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에는 15개주로 늘어났다. 노예의 삶은 너무나 열악해 주인의 손에 생사가 달려 있을 정도였다.

▲ 노예로 팔려온 '솔로몬'에게 '플랫'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노예상. [사진=손구혜 기자]
1808년 노예 수입이 금지되자 미국 전역에서는 자유주의 흑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 넘기는 ‘흑인 납치 사건’이 만연했다. 흑인도 백인과 마찬가지로 존중 받아야 할 귀중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생기고 서로 간에 대립이 커지면서 남북전쟁이 터졌다. 1863년 북부를 이끄는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을 발표한다. 그후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나고 400만명에 이르는 흑인들이 비로소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됐다. 영화 ‘노예 12년’의 주인공 ‘솔로몬 노섭’은 납치됐던 흑인 중 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가 쓴 자서전이자 1800년대 미국에서 출판된 비운의 베스트셀러 「노예 12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에게 악명 높은 루이지애나주로 팔려 간다. 그는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2명의 주인 밑에서 12년간 노예 생활을 한다. 참담한 노예의 삶, 그는 오로지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견뎌낸다. ‘노예 12년’은 토론토국제영화제 관객상, 골든글로브 최우수작품상, 미국제작자조합시상식 작품상, 크리틱스초이스어워즈 작품상, 런던비평가협회상 작품상 등 각종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20개가 넘는 작품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뿐만 아니라 스티브 매퀸 감독, ‘솔로몬 노섭’역의 치웨텔 에지오포 그리고 루피타 니옹도 각각 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을 연이어 수상, ‘노예 12년’은 각종 시상식과 영화제를 휩쓴 위대한 영화로 인정받았다. 스티브 매퀸 감독은 골든글로브 최우수작품상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와 그의 제작사 플랜비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며 감사의 뜻을 밝혔다. 브래드 피트와 플랜비의 제작진들은 스티브 매퀸 감독의 데뷔작 ‘헝거’를 감명 깊게 본 후 그에게 먼저 접촉했다. 그후 브래드 피트가 ‘월드워Z’ 촬영차 런던을 방문했을 당시 매퀸 감독을 만나 ‘노예 12년’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나눴다.

매퀸 감독의 두번째 작품 ‘셰임’의 촬영이 끝난 후 ‘노예 12년’ 제작에 착수했다. 제작진은 이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에 쉽지 않은 소재와 설정이었음에도 스티브 매퀸 감독에 대한 믿음과 강력한 추진력으로 영화를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심금 울리는 연기를 보여준 치웨텔 에지오포와 마이클 패스벤더, 베네딕트 컴버배치, 브래드 피트 등 초호화 군단이 함께한 ‘노예 12년’은 한스 짐머가 음악 감독으로 참여해 영화가 더욱 빛났다. ‘노예 12년’은 3월 2일(현지시간) 열린 제86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도 최우수 작품상, 각색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글ㆍ사진 손구혜 문화전문기자 guhs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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