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⑧

8월 중순에 추장 미니응개彌尼應介 등이 녹둔도의 양곡을 약탈하기 위해 아군보다 10배 많은 인원으로 쳐들어왔다. 수확철이라 목책 안이 비었음을 탐지한 이들은 내습해 약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의 방책에 약탈자들이 되레 위험에 빠졌다.

 

▲ 순신의 지용은 조선 조정이 알 정도로 뛰어났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1583년 11월 15일에 순신의 부친 이정이 아산 향제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때 순신은 건원보에 있었다. 꿈의 징조가 흉해 부친의 신상을 근심하였지만 변방 극지에 몸이 있어 찬바람과 큰 눈에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가 돼서야 흉보를 듣고 2000리 먼 길에 시급히 분상(객지에서 부모의 상 소식을 들은 후 부모가 돌아가신 곳으로 달려가는 것)하였다.

 

때마침 감사 정언신鄭彦信이 북변을 순행하다가 순신의 분상함을 듣고 크게 염려하여 “만일 급행한다면 찬바람에 몸이 상할 것이니 너무 애통하여 몸이 상할 수도 있다”며 군관을 보내어 문상하고 위로하여 권하되 “성복(상복을 입는 것)하고 서서히 행하라”고 하였다. 순신이 감사의 후의에 답하되 “자식이 되어 부모의 흉보를 듣고 어찌 시각을 지체하겠습니까”라고 준마를 타고 밤낮을 겸행하는데 순신은 건장한 사람이라 무사히 득달하여 성복하였다.

조정에서 순신의 지용은 이미 아는 바였다. 장차 등용하여 북방의 호적을 막게 하기 위해 언제 상이 끝나는가를 서너 차례나 물어왔다. 1586년 3월에 조정에서 순신의 삼년상이 끝났음을 알고 곧 사복시 주부(수레와 말•마구•목축에 대한 일을 담당하던 기관. 주부는 그곳의 문서와 장부를 관리하는 종6품 문관)에 임명하였다. 그후 겨우 16일만에 다시 함경도 조산보(함북 경흥군 내 국경지역) 병마만호를 제수하였다.

조산보는 오랑캐의 소굴과 접경해 침략이 빈번하니 조정에서 순신을 적임자로 간택한 것이었다. 1587년 2월에 일본의 해적선 5~6척이 전라도 녹도(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를 침범하였다. 녹도만호 이대원李大源이 병선을 몰고 힘껏 싸워 승리하였다.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이 그 공을 시기하던 중 수일 후 해적선 8~9척이 손죽도(전남 여천군 삼산면에 딸린 작은 섬)를 침략한다. 좌수사 심암이 이대원을 척후장으로 삼아 먼저 교전하게 하고 심암은 배 수십척을 통솔하고 관망만 했다. 이대원이 외롭게 역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심암이 군법과 국법에 위반한 죄를 스스로 알고 조정에 무고하여 상주하되 “적세가 크고 치열하여 이대원이 전사하였으니 군사를 보내 구원하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은 판서 김명원金命元을 순검사巡檢使로, 신립과 변협을 좌우 방어사로 삼아 남도의 정예 병사를 출발시켰다. 5~6일이 지나도 적의 종적이 없어 조정에서 심암의 간사함을 깨닫고 심암을 붙잡아 처참 효시하고 이대원의 충의를 표창하였다.  이 싸움은 일본 정부나 막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오도 대마 일기(용어설명)’ 등의 해적들이 저지른 짓이라 한다. 조선의 반민(나라를 배반하고 도망친 백성) 사화동沙火同이라고 하는 자가 조선에서 죄를 짓고 일본에 귀화해 오도의 해적을 인도, 조선 삼남지방의 섬을 침략한 것이었다. 이해 7월 함경감사 정언신의 천거로 이순신을 두만강 하류에 있는 녹둔도(함경북도 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 현재는 육지와 연결됐고, 러시아 영토임)의 둔전관屯田官을 겸임케 하였다.

조선 삼도에 해적 들끓어

경원慶源부사 이경록李慶祿이 부하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순신과 같이 녹둔도 전답의 추곡을 수확하는 한편 호적의 침입도 방어했다. 원래 이 녹둔도는 토지는 비옥하나 호지胡地로 쑥 들어간 돌각지대였고, 고립된 섬이었다. 그래서 수비하는 군사가 적어 호적을 방어하기가 어려웠다. 순신이 장수 가운데 이영남李英男을 북병사 이일李鎰에게 보내 군대를 증파하여 주기를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무슨 심술인지 이일은 종시 불청하고 말았다. 그래서 순신은 주장이 돼 아군의 수가 적으니 목책木柵을 둘러 만일을 방비하기로 한다. 또한 여러 제장에게 명령에 따라 생사를 같이 하여 국사에 충성을 다하기로 했다.

장수 중 이운룡李雲龍, 이영남은 순신을 한번 보고 뜻이 서로 통해 스승으로 또는 부형으로 섬겼다. 8월 중순에 추장 미니응개彌尼應介 등이 녹둔도의 양곡을 약탈하기 위해 아군보다 10배 많은 인원으로 쳐들어왔다. 수확철이라 목책 안이 비었음을 탐지한 이들은 내습해 약탈을 시작했다. 수호장守護將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이 적의 포위망을 뚫으려 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호추 미니응개는 두 장수의 죽음을 기회로 승세를 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돌진하다가 수장戍將 이몽서李夢瑞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오랑케 소굴과 접경해 있는 조산보에서 이순신은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모함 때문에 위기에 빠졌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목책 안에서는 이순신이 말에 앉아 버티고 서서 막는다. 그 뒤에는 이운룡 등 제장이 호위하였다. 아군의 전사한 자가 10여인이요 적에게 잡힌 농민이 160여인이었다. 순신이 책문柵門에 막아서서 들어오는 적장을 방어하며 제장을 독려하였다. 붉은 담요로 된 전포戰袍를 입은 추장 두명이 칼을 빼어들고 적군을 지휘하여 맹렬히 돌격하여 들어온다. 순신이 철궁鐵弓에 유엽전柳葉箭을 당겨 연달아 발사하니 그 두명이 차례로 활소리를 따라 거꾸러져 죽는다. 그밖에도 말을 타고 들어오는 적장 10여인을 순식간에 쏘아 죽였다. 신전수神箭手가 다시 태어난 듯했다.

 

적은 10배의 세력을 믿고 침투를 하다가 좌절해 책문 안으로 향하지 못했다. 그러자 순신이 책문을 크게 열고 이운룡 등 제장과 더불어 7척 장검을 휘두르고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아군의 포로된 자를 60여인을 탈환하고, 적을 수없이 베었다. 그러나 순신도 역시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전쟁 중에 군심이 경동할까 염려해 남모르게 살을 빼버리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분전하였다.

이운룡은 영남 청도淸道 사람으로 약관에 붓을 던지고 무술에 정진하며 일찍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이번 싸움에서 이순신의 지용에 감복해 후일에도 그 부하가 되기를 자원, 충의를 다하였다. 이순신이 적을 추격하여 베던 이곳을 후인들이 전승대戰勝臺라고 명명하고 지금까지 비석을 새기고 제사를 받들어온다. 북병사 이일은 녹둔도에서 전투가 벌어져 아군의 사상이 10여인이요 포로 된 자가 90여인이며 이순신이 힘써 적을 무찌른 결과로 탈환된 자가 60여인이요, 오랑캐의 사망자가 미니응개 등 50여인이며 부상자가 수백명임을 전해 들었다. 그는 자기가 증병(병사의 수를 늘림)하여 주지 아니한 죄상이 조정에 탄로날까 두려워하였다. 꾀를 내 순신이 패전했다고 모함하고 형구形具를 관청 뜰에 벌여놓고 순신을 잡아들여 모진 형벌로 대번에 때려죽이려고 했다.

승전한 이순신, 모함에 빠지는데…

 

▲ [더스쿠프 그래픽]

순신이 잡혀 들어갈 때에 병사의 군관 선거이는 순신과 정분이 두터운 친우였다. 순신이 애매하게 죽음을 당할 걸 애석히 여긴 그는 순신에게 권하되 술을 먹어 취하여 혹독한 형벌을 견디라고 했다. 순신은 정색하며 “삶과 죽음에는 천명이 있는 법이니 이유 없이 죽지 않을 것인데, 술을 먹어 무엇하겠는가”고 말했다. 선거이는 눈물을 흘리며 “그러면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들어가게”라고 했다. 이것은 선거이가 이일의 심술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었다. 순신과 영원히 작별하는 자리로 알고 비창한 정을 이기지 못함이었다. 순신은 안색이 태연하여 웃으며 대답하되 “목이 마르지 아니하거든 어찌 물을 마시리오”하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이 태연히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일이 대노하며 순신에게 패전한 사유를 써서 올리라고 호령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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