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⑩

새로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이 출병해 조선을 침범할 것을 미리 알았다. 때마침 3~4일 계속 동풍이 크게 불어 배 만드는 나무 조각과 톱밥이 남해를 덮었다. 이를 조사한 순신은 이렇게 짐작했다. “풍신수길이 일본 전토 60여주를 통일한 뒤 여세를 몰아 대해를 건너와 난을 일으키려 한다. 필시 병선을 크게 건조한 흔적이다.”

 

▲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일본의 상황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걸 빠르게 알아챘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중요한 임무를 받고 상경하던 순신은 금오랑(의금부 도사)을 만났다. 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이였다. 그가 순신에게 말하되 “금번 조대중의 가택을 수색하는 중 그대의 서간이 압수됐지만 내 그대를 위하여 그 서간을 빼어 버리려 하오” 하였다.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조대중이 내게 편지를 보냈기에 내가 답서를 했오 하지만 서로 안부를 물을 따름이었고, 아무 다른 말이 없었소. 나랏 일로 압수한 서류를 사사로이 빼어 버림이 마음에 편치 아니한 일이오.”

금오랑이 순신의 정대한 마음에 탄복하였다. 그 뒤 순신의 서간을 본 선조는 글의 뜻과 글씨가 모두 우수해 ‘이순신’ 세 글자를 심중에 새겼다고 한다. 그 길로 서울로 올라간 순신이 일을 보던 때였다. 그 무렵 우의정 정언신은 ‘정여립 옥사사건’에 연관돼 옥 중에 있었다. 전년 함경도에 재직할 때에 그 휘하에 있었던 순신이 감옥에 찾아가 문안하였다. 이때 금오랑들이 당상에 모아 앉아 술잔을 주고받고 풍악으로 질탕히논다. 순신은 이런 금오랑들에게 “유무죄를 떠나 일국 대신이 옥중에 있는데 그대들이 풍악을 울리며 놀아서야 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이 말을 들은 금오랑들은 사과하고 자리를 파하여 버렸다. 역적의 연루자라 하면 사람마다 멀리 피한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를 피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순신의 두 형은 일찍 별세했다. 그래서 순신은 형들의 자녀를 친자녀보다 더 신경써서 돌봤다. 혼사 역시 형의 자녀를 먼저 한 뒤 자기 자녀의 혼인을 의논하였다. 아직도 결혼 못한 어린 조카가 많아 대부인 변씨가 거두고 있었다. 순신이 수령으로 부임할 때 모든 조카를 데리고 임지인 정읍으로 내려간다. 그러자 혹자는 ‘남솔(제한 식구 이상을 임지로 데리고 가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순신은 “내가 비록 남솔하였다는 비난을 들을지언정 차마 의탁할 곳이 없는 두 형의 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다”며 탄식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 않았다.

1590년 7월에 조정에서 이순신으로 고사리진(평북 강계군 관내의 진) 병마첨사(종3품 무관)를 제수해 변방의 이력을 밟게 하였다. 하지만 간관諫官들이 “수령을 너무 자주 옮긴다”는 이유를 들어 탄핵했다. 8월에는 정삼품 당상관으로 만포진(평북 강계군 압록강변의 진)의 수군첨사로 임명했더니 또 대간臺諫들이 “너무 급히 벼슬을 올린다”고 탄핵했다. 그래서 순신은 정읍현감에 머물러 있었다.

순신의 글과 글씨에 반한 선조

1591년 2월 순신은 진도珍島군수로 임명됐지만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진 수군첨사를 제수하였다. 이는 순신을 장차 크게 쓰려 했던 조정이 현감에서 군수로, 군수에서 첨사로 순서를 밟아서 승차시킨 거였다. 같은 해 2월 13일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이때까지 변경과 소읍으로 돌며 봉황이 가시나무 숲에 깃들임 같더니 이제야 수군절도사에 등극했다. 당시 선조는 비변사에 대신들을 모아놓고 시국에 비춰 대장이 될 만한 현재賢材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우의정 유성룡은 이순신과 권율 두 사람을 추천하고, 판부사 정탁은 이순신, 곽재우, 김덕령 3인을 추천했다. 영부사 정철은 이억기, 신립, 김시민을 추천하였다. 그리되어 그 당일에 추천된 이는 모두 7인이었다.

 

 

▲ 순신은 밀사를 보내 일본국의 사정을 알아내려 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우의정 유성룡이 국가의 장래사를 우려하여 또다시 이순신을 역천하여 기어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게 하였다. 드디어 순신이 좌수영이 있는 여수麗水에 부임했다. 이순신이 좌수사로 처음 도임할 때에 순신과 절친한 벗 한 사람이 꿈을 꾸었다. 구름까지 닿을 듯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의 가지에 수천만 조선 사람이 올라앉았다. 그런데 땅에서 홍수가 발생해 그 나무가 쓰러지려 할 즈음 장사壯士가 나타나 나무를 붙든다. 자세히 본즉 큰 장사는 이순신이었다. 꿈을 깨서 이상하게 여겼더니 후인들은 옛날 송나라 문천상文天祥이 하늘을 떠받치던 꿈에 견줬다.

새로 부임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일본이 출병해 조선을 침범할 것을 미리 알았다. 때마침 3~4일 계속 동풍이 크게 불어 배 만드는 나무 조각과 톱밥이 남해를 덮었다. 이를 조사한 순신은 이렇게 짐작했다. “풍신수길이 일본 전토 60여주를 통일한 뒤 여세를 몰아 대해를 건너와 난을 일으키려 한다. 필시 병선을 크게 건조한 흔적이다.” 해변 거민으로 포로가 되어 일본에 다년간 거주했던 공대원孔大元이란 사람을 불러들여 일본국 사정, 그들의 군제軍制의 강약, 병기의 종별을 철저히 확인하게 한 후 연구를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순신은 본영과 더불어 소속 5읍 6진의 병기와 군량, 장졸의 충실 여부를 일일이 검열했다. 한편으로는 각지의 철공鐵工을 불러모아 지도ㆍ감독해 철삭鐵索을 뽑아내어 해협 요소마다 가로질러 막았다. 만일 적선이 오거든 철삭을 감아올려 통행을 차단할 요량이었다. 밀물과 썰물 때에는 급한 물살을 이용해 적선을 전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그 철삭을 도로 물밑에 잠기게 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조치했다.

일본 침략에 대비하는 좌수사 이순신
 

또한 바다의 벌흙과 아궁이의 흙을 구워 만든 염초焰硝 수천근에 버드나무 숯, 메밀짚을 태운 재와 유황을 합쳐 화약을 제조했다. 병선도 살폈다. 그동안의 좌수영 병선은 대맹선大猛船이 2척이요 중맹선中猛船이 6척이요 소맹선小猛船이 2척이요 무군소맹선無軍小猛船이 7척이어서 합 17척이었다. 명색은 갖췄지만 절반은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고, 배의 몸체, 노ㆍ닻ㆍ돛 등 부품들도 부실했다.

규정상 군함은 8년 안에 중수, 6년 안엔 개조해야 했다. 그러나 그 규정은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새 수사 이순신은 엄밀히 검열하여 쓸 것 못 쓸 것을 분간하여 해군과 군함의 개혁안을 세웠다. 관하 5읍 6진 내의 이름난 장인들을 총출동시켜 대소 전선을 전부 새롭게 만들기로 하고 설계도를 작성하여 조선造船 공사에 착수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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