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좀먹는 ‘현금의 역설’

▲ 기업의 지나친 현금성 자산 보유가 국내 경제의 성장성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계속 늘고 있다. 기업들이 불확실한 경제상황 속에서 현금을 곳간에 쟁여놓고 있어서다. 이는 기업의 안정성을 높이는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하지만 지나친 현금성 자산 보유는 투자를 악화시켜 성장성을 떨어뜨리는 ‘현금의 역설’을 만들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벗어나고 있지만 우리나라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한국은행의 자금순환에서 지난해 비금융 민간기업이 가지고 있는 현금통화와 예금은 4800조원에 달했다. 가계와 정부를 포함한 모든 경제주체가 보유하고 있는 현금통화와 예금에서 민간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1%를 넘어섰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의 34%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다. 물론 기업이 돈을 벌어 금융자산을 쌓는 것은 재무안전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한국은행의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제조업의 부채비율은 101%에 불과하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기업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성장성은 희생을 피하기 어렵다. 가계의 저축이 지나치면 소비가 줄어드는 ‘저축의 역설’이 있는 것처럼 기업의 현금성 자산 보유는 투자를 악화시켜 성장성을 떨어뜨리는 ‘현금의 역설’을 만들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지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내 총저축률은 34%이지만 투자율은 28%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축이 투자보다 많다는 것은 경상흑자를 의미해 외환시장의 안전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낮은 투자율은 성장성 저하를 불러일으킬 공산이 크다. 투자가 과도해도 문제만 지나치게 적어지는 것도 큰 문제란 얘기다. 이에 따라 이제 국내경제와 기업의 성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쟁여둔 현금을 사용해야 할 때다. 물론 기업이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배당의 형태로 주주에게 돌려주는 방법도 시장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경제의 잠재 성장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본다면 투자의 형태로 지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 역시 이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은 어떤 곳에 돈을 쓸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은 국내 설비투자다. 특히 미국의 리쇼어링(reshori ng) 정책과 같이 현지 판매와 제3국 수출을 위해 해외로 나갔던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고 국내로 유턴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국내 기업이 되돌아올 경우 고용 등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만일 생산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 기업을 국내로 되돌릴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설비투자 회복에 보다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제한된 국내 시장과 노동비용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정부의 적극적인 인센티브의 제공 여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고용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기업의 현금이 설비투자로 지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글로벌화에 따라 현지법인과 생산기지 건설을 통한 해외진출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중국 등 신흥시장의 추격을 고려할 때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경제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기록하고 있는 연구개발(R&D)로 투자를 유도하는 정책적인 방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미 미국ㆍ독일ㆍ일본은 제조업 선진화의 일환으로 정부차원에서 R&D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 기업이 수익성만 추구해 균형적인 성장에 실패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사진=뉴시스]
국내 R&D투자도 2000년대 이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국내 R&D투자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5.6%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치열한 경쟁으로 차별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바이오ㆍ영상ㆍ통신ㆍ자동차 등에서 R&D 지출이 다른 산업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산업에도 광범위한 파급효과(spillover effect)를 미치는 R&D의 특성상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설비투자와 같이 눈에 보이는 투자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신흥시장이 과잉투자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에 따라 R&D와 함께 인수ㆍ합병(M&A)을 생각해 봐야 한다. 시장 지배력을 높일 수 있으면서 설비 증설 부담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규모의 경제를 시현하거나 안정적인 글로벌 가치사슬(value chain)을 창출하려는 기업에게는 설비투자나 해외직접투자보다는 M&A가 적절한 투자대안이 될 것이다.

기업의 가치는 안정성ㆍ수익성ㆍ성장성이라는 삼박자가 모두 갖춰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기업이 현금 자산을 쌓아 재무안정성을 강화하는 것은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정성과 수익성에 치우쳐 성장과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게다가 생산성을 더욱 떨어뜨릴 수 있는 고령화라는 피할 수 없는 숙제를 안고 있는 상황에서 안정성 확보에 치우칠 경우 성장성을 확보하기 어려워 질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GDP의 34%에 달하는 현금성 자산

 
물론 기업이 보유한 현금을 어디에 쓸 것인가는 각자의 목적과 전략에 맞춰 선택해야 할 사안이다. 고용유발 효과가 큰 산업이라면 정부가 국내 설비투자로 유도할 것이다. 다른 산업으로의 파급효과가 높은 산업이라면 R&D 투자를 촉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구조조정을 촉진하거나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높이려면 M&A가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다. 과잉투자에 노출된 산업이라면 배당으로 주주에게 되돌려주는 것도 금융시장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일방적으로 무엇이 더 좋고 나쁘다는 일률적인 기준은 현실적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현금을 투자나 배당으로 되돌리며 현금의 역설을 극복하려는 기업은 주식시장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FTSE100에 포함된 80개 비금융기업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늘어나 지난해 상반기에 1800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2008년의 1300억 달러에서 40%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현금성 자산 보유 상위 25% 기업이 1440억 달러로 전체 현금성 자산의 80%를 보유했다.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의 설비투자 지출규모는 계속 축소됐고 M&A 관련 지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현금을 적게 보유하고 있는 기업은 설비투자를 위한 지출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고 상대적으로 M&A 지출도 많았다. 현금성 자산이 많고 적은 두 그룹간의 이익 증가율을 비교하면 현금을 적게 보유하고 있는 기업이 더 높다. 당연히 이 기업의 주가는 더 높이 오르고 있다. 물론 안정성이 담보되는 대형 기업의 결과라서 모든 기업에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성이 뒷받침되지 않은 안정성 선호는 미덕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기업의 현금이 어디로 가는지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소재용 하나대투증권 연구원 jyso30@hanaf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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