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재의 人sight | 고영섭 경영학

▲ 고영섭 오리콤 사장은 누구나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조직 구조를 바꿨다. 아이디어를 내는 건 크리에이티브 부서만의 몫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가장 오래된 광고회사 오리콤이 아이디어 집단으로의 변신을 선언했다. 시장 변화에 부응해 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장수 CEO 고영섭 사장을 만났다.

지난 3월 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오리콤 6층 메인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고영섭(55) 오리콤 사장이 직접 프레젠테이션에 나섰다. 회사의 전 조직을 ‘통합마케팅커뮤니케이션(IMC) 아이디어 집단’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기획ㆍ제작ㆍ미디어ㆍ프로모션 등의 부서 간 벽을 없애 광고주의 니즈에 통합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선언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종합 광고회사가 클라이언트의 기대에 한발 앞서 부응해 새로운 조직으로 변신한 셈. 고 사장은 “변화에 목말랐던 광고주가 누구보다 이런 시도를 반겼고 작은 아이디어 하나까지 우리와 상의하려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새 비전 선언에 앞서 실무자들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장차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해 달라고 당부했는데 두어달 후 결과를 받아 보니 자신이 생각하던 방향과 거의 일치하더라고 털어놓았다. “제가 첨삭을 하기는 했지만 오리콤의 새 비전은 이렇게 톱다운, 버텀업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습니다. 일종의 혁신인 만큼 전직원에게 동의도 구했고요.”

✚ 그래서 과거 시스템과 뭐가 어떻게 달라지는 건가요?
“과거엔 기획 부서에서 광고주의 요구를 받아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아이디어는 전적으로 제작(크리에이티브) 부서의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관리나 지원 부서 소속원을 포함해 누구나 아이디어를 내고 그게 반짝이기만 하면 채택될 수 있는 구조로 바꾼 겁니다. IMC총괄본부를 만들어 부서별로 나뉘었던 기능을 통합한 거죠. 이제 전통적인 4대 매체(TVㆍ신문ㆍ잡지ㆍ라디오) 조직은 더 이상 오리콤에 없습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는 글발 좋고 그림 예쁘게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국물에 넣을 건더기를 만들어 내는 콘텐트 크리에이터가 득세할 거예요. 기프트카 캠페인(현대자동차), 설문조사로 뽑은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대한항공), 책으로 나온 현대생활백서(SKT) 등이 이런 건더기의 좋은 예죠.”

✚ 이같은 통합의 흐름이 전체 광고업계로 확산될 거로 보나요? 
“그렇게 변하지 않으면 안 될 걸요. 광고주는 어떻게든 소비자를 움직이려 듭니다. 지갑을 열게 하든지 고객에게 입력된 자사와 자사 제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든지 하다못해 머릿속 생각이라도 바꿔 놓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소비자가 광고를 접하는 경로가 달라졌을뿐더러 입수한 정보를 페이스북, 트위터 등의 SNS(Social Network Service)를 통해 소비자가 자발적으로 전파해 확대재생산하는 시대입니다. 눈길 끄는 카피와 예쁜 그림으로 승부하던 광고회사로서는 변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죠. 매스 미디어용으로 고안된 이런 광고 메시지, 브랜드 스토리 중심의 제작방식에 요즘 소비자들이 더 이상 관심도, 신뢰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동향을 꿰뚫은 광고주가 타깃 소비자에 맞춘 마케팅 기법을 광고회사에 요구합니다. 그래서 다른 광고회사 사장들도 이런 방향 전환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외국은 어떨까? 그는 칸광고제의 공식 이름이 2011년 필름 페스티벌에서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로 바뀌었는데 새로운 영역이 자꾸 추가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광고회사의 경쟁 상대는 이제 더 이상 동업타사가 아니라 크리에이티비티를 할 수 있는 전 업종의 서비스ㆍ제조업체라고 주장했다.

▲ 3월 7일 고영섭 사장이 전 직원에게 오리콤의 새 비전에 대해 프레젠테이션하고 있다.[사진=오리콤 제공]
✚ 이런 움직임이 앞으로 채용 쪽에도 영향을 미칠까요? 채용에도 모종의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앞으로는 IMC적 아이디어를 잘 내는 사람이 광고회사의 핵심 인재가 될 겁니다. 통합적 아이디어를 내는 ‘미친 놈’이 필요한 시대가 됐거든요. 이렇게 되면 결국 광고회사가 요구하는 스펙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단적으로 과거엔 광고 카피를 문예창작과나 국문과 출신이 썼습니다. 하지만 글 잘 쓰는 사람이야 데려다 쓰면 돼요.”

✚ 인사에도 파급 효과가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크리에이티브 출신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가 됐습니다. 아이디어는 CD의 소관이었고요. 그렇다 보니 아이디어를 CD에 의존했던 거죠. 앞으로는 CD를 기획이나 매체 담당 출신이 맡을 수도 있어요. 광고회사의 꽃으로 통하는 자리가 아이디어와 능력이 있는 ‘미친 놈’ 차지가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관리 부서 출신 CD가 나올 수도 있겠죠.”

✚ 신데렐라가 탄생할 수도 있겠군요?
“신데렐라가 나오도록 아예 카펫 자락을 깔아주는 겁니다. 과거엔 아이디어는 많지만 다른 부서 출신이라 제약이 있던 신데렐라 지망생들이 크리에이티브 주변을 기웃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드물게 위에서 ‘당신이 한번 해 봐’ 그래서 맡았는데 운 좋게 성과가 좋으면 예외적으로 CD를 맡았었죠. 단 20대 신데렐라는 다양한 경험과 기술이 요구되는 광고회사의 속성 상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리콤은 지금 재계 10위권 그룹의 PR 일감을 따내려 하는데 제안서의 핵심 아이디어를 기획 부서에서 냈다고 한다. 크리에이티브 부서도 이 아이디어를 수용했지만 아이디어맨들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이래저래 크리에이티브 부서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귀띔했다.

오리콤의 올 1분기 입찰 성공률은 89%에 이른다. [※ 참고: 고 사장은 이 승률이 50%만 돼도 대단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KB금융지주, 넥센타이어, 스포츠토토 등 8개사로부터 300억원 상당의 광고 물량을 확보했다. 업종도 고른 편이다. 고 사장은 광고주가 먼저 변했기 때문에 경쟁 프레젠테이션 때 오리콤이 선점한 통합적 접근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부응한 만큼 선점의 리스크도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 이런 시대 광고회사의 리더는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한다고 봅니까? 
“채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씨앗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낼 수 있고 남이 낸 아이디어 씨앗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남이 착안한 아이디어를 다듬고 살을 붙이는 능력도 필요하죠.”

오리콤은 IMC 아이디어 집단으로 거듭나기 위해 사내에 IMC 아이디어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강사는 ‘최고의 강사진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생각에서 대부분 내부에서 조달하지만 1박2일, 꽃보다할배 등을 연출한 나영석 PD 등 다른 분야의 다양한 전문가도 초빙하기로 했다.

“시장서 콘텐트 크리에이터 득세할 것”

✚ 이른바 아이디어 집단이라는 것이 과연 교육을 통해 양성이 가능하다고 보나요?
“사례 연구를 통해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칠 수는 있다고 봅니다. 마치 병원에서 수시로 세미나를 열듯이 다양한 사례를 함께 검토해 생각하는 방법을 공유하는 거죠.”

▲ 고영섭 사장은 이번 조직 구조 개편에 대해 “신데렐라가 나올 수 있도록 카펫을 깔아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사진=지정훈 기자]
지난 연말 오리콤 송년 행사의 콘셉트는 ‘응답하라 2002’였다. 2002년은 고 사장이 3년 만에 부사장으로 이 회사에 복귀한 해다. 당시 그는 국내 최초로 브랜드 전략 모델을 광고 전략에 활용해 입찰 성공률 86%라는 전무한 기록을 작성했다. 조직에 활력이 돋았고 광고주 영입도 줄을 이었다. 그는 지난해 한 케이블 TV가 방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응사)’와 IMC적 접근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 ‘응사’의 시사점이 뭔가요?
“달라진 소비자를 한 가지 방법으로 상대하려 해선 안 된다는 거죠. 응사에 담긴 다양한 볼거리 아이디어는 작가 한 사람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기존의 작가 중심 도제식 시스템을 버리고 예능 제작팀 PD와 작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뭉친 덕이죠. 더욱이 드라마 전문 제작팀도 아니었습니다. 1181억원이라는 응사의 경제적 효과는 다양한 개성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참여하는 집단 창작 시스템이 올린 개가였어요.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 알람에 눈을 떠 스마트폰으로 정보와 자료를 얻고 친구가 보내온 유튜브 동영상도 보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마케팅도 커뮤니케이션도 통합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 미디어 쪽의 위기감도 심각합니다. 광고주 입장에서 볼 때 미디어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4대 매체 시장 규모는 2002년 5조3000억원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습니다. 인터넷 광고 시장은 2011년 신문광고 시장을 추월해 지난해 공중파 광고 시장과 맞먹는 2조원대로 성장했죠. 이런 추세는 사실 지구적인 현상입니다. 자연스레 전통적인 매체의 광고 효과는 아주 작아졌고 사람들이 주목하는 시간도 짧아졌죠. 소비자의 구매 패턴도 바뀌고 있습니다. 지난해 모바일 쇼핑 규모는 전년보다 2배로 커져 4조원대에 이릅니다. 소셜커머스에, 인터넷을 통한 공동구매가 오프라인 시장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죠. 미디어도, 소비자도 급변한 환경에서 광고회사는 이 변화를 따라잡으려는 클라이언트의 마케팅 이슈를 해결하는 솔루션의 제공자로 거듭나는 길밖엔 대안이 없습니다. 단적으로 전통적 매체를 통한 접근은 요즘 대세인 소비자의 참여를 원천적으로 배제합니다. 그래도 전통 매체를 이용한다면 건더기(콘텐트)가 있는 광고를 만들어야죠.”

✚ SNS 활용에 대한 복안은 뭔가요? 
“우리나라는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로 스마트폰 이용자가 3000만명이 넘습니다. 정치인, CEO에서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SNS와 연결된 ‘손바닥 세상’을 통해 자신을 스토리텔링하고 다른 사람들과 삶을 공유합니다. 이 소비자와 클라이언트 브랜드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연결하겠다는 게 IMC 아이디어의 핵심이죠. SNS는 소비자들의 언어, 생각, 욕구, 변화의 흐름을 추적하는 데 유용한 소스이기도 합니다.”

새 경제효과 창출하는 ‘집단 창작 시스템’

그래서 SNS 동향은 꼬박꼬박 챙기지만 사생활을 노출하기 싫어 정작 SNS를 직접 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한번 뒤처지면 그 길을 가지 않으려 드는 자신의 유별난 성향과도 무관치 않다고 했다. 화제의 영화도 남보다 일찍 관람하지 못했을 땐 다운받아 볼 때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피할 수 없을 땐 즐겼다”는 그에게서 발견한 뜻밖의 모습이다.

고 사장은 광고회사 AE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10년째 오리콤의 CEO를 맡고 있다. 몇년 전 그는 오리콤 사내신문 특집호에 그 무렵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칼럼으로 쓴 일이 있다. ‘샐러리맨의 달인’이 아들과 직장 후배들에게 제공한 한 수니 음미해 볼 만하다.

“우선 출근 시간을 30분 앞당기면 성실하다는 최고의 평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윗사람을 자꾸 귀찮게 하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업무처리 과정에서 지시한 사람에게 수시로 의견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헛다리를 짚지 않고, 윗사람과 과정을 공유하게 됨으로써 비판보다 이해를 받게 되죠. 마지막으로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사소한 호의에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면 누구에게나 사랑받습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