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⑫

신립은 서인 사람들을 찾아가 거북선에 대한 의향을 들어봤다. 대부분의 답은 이랬다. “이순신이 성공하면 유성룡 일파의 세력이 커질 것이다.” 당연히 서인들은 순신의 거북선 건조를 금지할 것을 선조에게 진언하기로 하였다. 물론 서인들 중에도 이덕형李德馨 김명원 같은 사람들은 편당색채가 없는 이순신의 계획을 적극적으로는 억압할 것까지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 이순신이 거북선을 개발할 무렵, 조정은 당파싸움으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거북선의 모습은 이랬다. ‘길이 113척, 어깨 너비 12척, 허리 너비가 25척, 꼬리 너비 11척, 높이 8척, 두께 4촌, 이물 높이는 4척이요. 좌우 어깨에 천자 포혈 하나씩을 뚫었고, 고물은 높이가 10척이요.’ 이물에는 용두龍頭(거북의 머리)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13척이요 넓이가 3척이며 그 속에 유황과 염초를 피워 입을 벌리고 연기를 토하면 안개와 같아서 적으로 하여금 거북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거북선의 형상을 간단히 말하면 배 위에는 갑판을 덮고 10자의 길을 내 우리 군사가 그 길을 통행할 수 있게 하였다. 길 밖에는 예리한 송곳과 칼날을 꽂아 발붙일 곳이 없게 하고 그 위에는 짚자리를 덮어 송곳과 칼날을 꽂은 줄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였다. 꼬리에는 키를 꽂아 배의 방향을 돌리고 전후좌우에는 구멍 72개를 뚫어 대포와 화전, 그리고 궁시를 쏘게 하였다.
 

거북선의 등에는 청색으로 거북무늬를 그려 바다 물결과 흡사하게 보이도록 했다. 일종의 보호색이었다. 앞가슴에는 쇠닻을 매었으며 등에는 홈을 내어 돛대를 자유롭게 누이고 세울 수 있게 했다. 거북선에 사용하는 대포는 2종이 있으니 그 이름은 대완구大碗口와 불랑기佛朗機(유럽식 청동제 화포)라 하였다. 대완구의 파괴력은 불랑기의 10배 이상이 되고 불랑기의 위력은 일본군이 사용하는 조총보다 10배 강했다.

이순신은 일본이 조총을 사용하는 줄 알고 있었다. ‘저들이 조총을 사용하면 우리는 대포를 사용하여 응전하리라’는 계획이었다. 원래 대포의 명나라 사람이 서양에서 전수받은 것인데, 조선에 전래된 건 당시 기준으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조선 무장으로 대포의 이로움과 제조방식을 아는 이는 전라좌수사 이순신, 진주목사 김시민, 울산병사 이각 등 몇몇 사람뿐이었다. 순신은 대포와 같은 무기를 많이 만들어 거북선 외 다른 판옥선에도 비치했다. 그중 가장 무서운 대장군전은 순신의 지휘선에 비치해 후일의 전과를 기대했다.[※ 참고: 화약을 발명하기는 중국이 세계에서 최초요, 몽고로 전하여 성길사한이 서양에 전하였다. 서양에서 조총을 발명하였다.]

그러나 낙안(현재 전남 순천시 낙안면) 군수 심극성沈極星은 거북선의 성능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일본군이 침범하지는 않을 겁니다. 통신부사 김성일金誠一의 말을 들으면 풍신수길은 대사를 행할 인물이 못되더라고 합니다.” 순신은 “일본군이 정녕 침범할 것이오”라며 “거북선 20척만 건조해 놓으면 수길이 쳐들어 온들 염려가 적을 거다”고 말했다. 이 말은 장수의 책임감에서 나온 말이요, 결코 그 지능과 선견지명을 자긍하는 건 아니었다. 당시 조정에선 풍신수길의 위인과 뜻을 정찰하게 할 목적으로 통신사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을 보냈다.

대포 장착한 거북선의 위용

하지만 두 이의 말이 서로 달랐다. 상사上使 황윤길은 “수길은 눈에 광채가 있고 비범한 인물이니 필연코 큰 뜻을 품어 조선을 범할 것 같다”고 했다. 부사副使 김성일은 그와 반대로 “수길은 눈이 쥐 같고 외모와 언어로 본다면 하잘 것 없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보고했다. 조정에서는 그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몰랐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다. 그래서 동인들은 김성일의 말이 옳으니 군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서인들은 황윤길의 말이 옳으니 군비를 하자고 하였다. 선조는 결국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고, 서인이던 낙안군수 심극성이 순신에게 그렇게 말한 거였다. 더구나 심극성은 동인의 영수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좌수사가 된 이순신의 행동이 좋아 보일리 만무했다. 서인이 이순신을 경계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 이순신이 거북선 개발에 성공하자 서인들은 견제를 시작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는 거북선의 신묘한 동작과 나아가 그 거북선을 20척이나 건조할 계획을 가졌다는 말을 상세하게 기록해 자신과 친분이 있는 대장 신립에게 보고하였다. 금위대장 한성판윤인 신립은 서인이었다. 북변에 있을 때부터 이순신은 지와 용을 함께 갖춘 영걸임을 목격하였다. 그래서 신립은 서인 사람들을 찾아가 의향을 들어봤다. 대부분의 답은 이랬다. “이순신이 성공하면 유성룡 일파의 세력이 커질 것이다.” 당연히 서인들은 순신의 거북선 건조를 금지할 것을 선조에게 진언하기로 하였다. 물론 서인들 중에도 이덕형李德馨, 김명원 같은 사람들은 편당색채가 없는 이순신의 계획을 적극적으로는 억압할 것까지는 없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장 신립은 “청컨대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만 전력하게 하소서”라고 선조에게 계본을 통해 진언했다. 때마침 거북선의 시험성적을 기록한 이순신의 장계를 보고 기뻐하던 선조는 신립의 계본을 보고 “이렇게 신기 묘술인 거북선을 왜 폐하라 하는가? 적이 바다로 오거든 어찌하여 수군을 없애려고 하는가?”하고 의혹을 품는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립과 서인들이 수군을 폐하라고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풍신수길이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상황에서 공연히 수군을 확장하면 명나라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게 그 하나였다. 둘째는 일본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그 백성들이 모두 물에 익숙해 수군으로 대항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육지에 끌어올려서 철기鐵騎(철갑을 입은 기병)로서 쳐부수는 것이 상책이라는 거였다. 이런 두가지 이유로 수군을 확장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있던 것도 없애 오직 육전陸戰에만 전력하자는 취지였다. 그럴 듯한 말이었다.

신립의 엉터리 보고에 순인은 한숨만…

선조는 어느 말을 따라야 할지 몰라 주저하였다. 신립의 주장은 조정에서 큰 분규를 일으켰다. 그 실체는 동서당파의 싸움이었고 국가본의는 아니었다. 삼면이 바다인 조선에 수군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어불성설 그 자체였다. 또한 조선에 바다를 마주한 도와 군읍이 얼마나 많은지도 고려하지 않은 한심한 주장이었다.
유성룡은 거북선의 성공으로 해서 조정에 일어난 풍파를 자세하게 적어 이순신에게 보냈다. 이 서간 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조정의 인심이 국가보다는 당파 또는 자신을 위함이 많다. 공심公心(공평해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보다 남의 성적을 시기함이 많으니 너무 수군을 확장해 사람들의 미움을 받지 않도록 하시오.”

순신과 유성룡 두 사람 사이는 서간이 한달에 2~3차례 내왕했다. 유성룡의 서간을 읽은 순신은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였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일본은 60여주州로 나뉘어 상호 정벌의 전쟁을 치렀다. 제후들의 영토가 서로 인접한 관계로 육전에만 전력을 다했고, 해전은 그리 많이 하지 않았다. 해전보다도 육전에 경험이 더 많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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