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그룹 ‘법정관리’ 논란

▲ 세모그룹이 법정관리를 악용해 부실 계열사의 부채만 탕감 받고 다시 사들인 정황이 드러났다. 법정관리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사진=뉴시스]
법정관리의 허점이 또다시 부각되고 있다.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이 허점을 악용해 이득을 취한 정황이 드러나서다. 중요한 건 문제가 터질 때마다 통합도산법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이젠 고쳐야 할 때다. 이미 늦을 대로 늦었다.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회사를 되찾는 과정에서 법정관리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정황이 포착됐다. 금융당국과 검찰에 따르면 청해진해운의 모회사인 조선업체 천해지는 2005년 인천지방법원에서 법정관리를 받던 중 ㈜새천년ㆍ빛난별 등 실체가 모호한 법인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에 경영권이 인수됐다.

하지만 3년 뒤인 2008년 이 컨소시엄은 유병언 전 회장 일가 소유인 아이원아이홀딩스에 천해지ㆍ아해 등의 지분을 84억원에 넘기고 자진 청산한 뒤 자취를 감췄다. 이 지분은 당시 장부가치로만 240억원에 달했다. 아이원아이홀딩스는 지분을 사들인 것과 동시에 최소 150억원에 달하는 차익을 본 셈이다. 검찰은 이 과정에서 유 전 회장이 관여한 차명법인이 동원된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이게 사실이라면 유 전 회장 측은 천해지를 망가뜨린 책임을 지지 않은 채 법정관리를 악용해 채무를 탕감 받고, 자신의 또 다른 법인을 통해 천해지를 재매입한 셈이다. 문제는 대주주가 편법적으로 이득을 취해도 현재로선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나 사후제재 방안이 없다는 거다. 현행 법정관리제도를 제대로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현행 법정관리제도는 기존 경영진을 그대로 법정관리인에 앉히거나 대주주가 법정관리 신청 전 재산을 빼돌렸다가 회사를 재매입해도 문제 삼기 힘들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대주주가 빼돌린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채무탕감의 전제조건이다”면서도 “하지만 재산을 빼돌렸는지 여부를 당국이나 채권단이 규명해야 하기 때문에 법정관리가 시작되면 추후에 빼돌린 재산을 발견해도 손쓸 방법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다. 그는 “기존 대주주가 법정관리인에 앉은 뒤 숨겨둔 재산으로 회사를 인수할 경우엔 막을 방도가 없다”고 지적했다.

법정관리가 기업을 뜯어고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제도인 동시에 대주주에게는 가장 ‘유혹적인’ 방법이라는 평가를 받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일반적으로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 등이 시작되면 경영권은 사실상 채권단에 넘어간다. 워크아웃 하에서는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이 담보로 잡히기 때문에 소유권 행사가 차단된다. 반면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자산에 대한 보전 처분이 내려지고, 채무와 채권은 유예된다. 이후 한달 내 법원에서 회생절차가 승인되면 법정관리인 주도로 기업개선작업이 진행된다.

세모그룹도 DIP 악용해 이득

문제는 그 이후다. 법정관리제도에는 기존관리인유지제도(DIP)가 있다. 통합도산법에 근거한 제도로 2006년 4월부터 시행돼왔다. 회사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기존 경영진이 회사 회생을 주도할 법정관리인에 가장 적합하다는 전제로 기존 경영진을 법정관리인에 임명하도록 허용한 거다. 때문에 감자減資가 단행돼도 기존 경영진과 대주주는 일부나마 원래의 지분을 건질 수 있다.  

 
지난해 동양그룹 사태 때 동양시멘트가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으로 넘어가지 않고, 법정관리로 갔던 것은 대주주가 DIP를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동양시멘트의 금융권 차입금이 많지 않고, 채권 비율로 봐도 산업은행(69.5%)과 우리은행(17.3%)만 워크아웃을 동의하면 무난히 워크아웃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채권단도 계속기업가치가 높아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에 무게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알짜기업의 돈으로 부실을 메우기보다는 법정관리로 한번에 채무를 털고, 경영권까지 유지하겠다는 속셈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웅진그룹이 거액의 회사채를 발행한 뒤 곧바로 법정관리행을 택한 것도 비슷한 사례다. 2012년 9월 웅진그룹이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에 대해 전격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윤석금 회장이 지주사인 웅진홀딩스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것이다. 법정관리가 받아들여질 경우 DIP 제도를 악용해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유동성 위기를 겪은 일부 건설사들 역시 채권단의 강력한 경고조차 무시하고 법정관리를 신청해 금융권과 갈등을 빚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3000억원대 금융권 대출사기에 연루된 KT ENS의 법정관리 신청은 또 다른 형태의 법정관리제도 악용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KT ENS는 특수목적법인(SPC)에 지급보증을 해줬다가 기업어음(CP) 491억원을 상환하지 못해 올해 3월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이상한 건 KT ENS의 지분을 KT가 100% 갖고 있다는 점이다. KT가 KT ENS를 법정관리로 가도록 놔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

법정관리는 일반적으로 대주주가 경영권을 유지하기 위해 DIP제도를 악용한 측면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KT ENS의 법정관리 신청은 채권과 채무를 피하기 위해 법정관리를 악용한 측면이 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결국 KT ENS는 법정관리를 통해 대출사기와 관련된 채권과 채무를 모두 유예 받을 길이 열렸다. 금융권에서도 KT가 대출사기에 따른 배상책임을 우려해 선제적으로 법정관리를 신청, ‘꼬리 자르기’를 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물론 최근에는 법정관리의 주체를 결정하는 법원도 기존 대주주를 경영에서 배제하고, 전문 경영인을 법정관리인으로 지명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부실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거나 기업을 되살리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경영진과 대주주는 법정관리인에서 배제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제도의 개선이다. 법정관리제도의 허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돼 왔고, 금융당국에서도 필요성을 개진해왔다. 금융위원회는 2012년 9월 웅진홀딩스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DIP 제도의 악용을 막기 위해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법무부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채권 금융회사의 견제강치를 강화하고 경영진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해 일반 상거래 채권자 보호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도 지난해 6월 국회에 제출한 업무보고 자료에서 DIP 개선을 위해 유관기관과 지속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DIP 불거져도 제도 개선 뒷전

그럼에도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 금융당국으로선 개선 작업에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합도산법 주무부처가 법무부라서 금융위가 DIP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법무부가 나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 부실경영으로 기업을 부도낸 이들이 경영권 유지를 위해 DIP제도를 악용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다만 무얼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11월 국회입법조사처가 내놓은 ‘기존관리인유지제도의 쟁점 및 개선방향’이라는 보고서에 잘 나와 있다. 보고서는 “기업회생을 목표로 할 동기가 있는 사람을 관리인으로 선임하고, 관리인 선임 과정에서 채권자 협의회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관리인을 감독할 때도 채권단 입장을 반영하고, 과중한 업무로 유명무실해질 때가 많은 법원의 감독이 실효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업무분장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관리인 업무가 끝난 후에도 기존의 경영자가 부담해야할 책임 부분이 은폐되지 않도록 관련 재판을 엄격하게 진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문제가 계속 발생하고 있고, 가이드라인도 나와 있는 만큼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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