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명암

‘환상의 땅’ 실리콘밸리. 그곳엔 진짜 돈바람이 불고, 야망이 휘몰아치며, 혁신이 들불처럼 일어날까. 아니다. 실리콘밸리에도 ‘양극화’가 있고, 뚜렷한 ‘부의 계급’이 존재한다. 성공하는 자가 있고, 실패하는 자도 있다. 실리콘밸리의 명암, 더스쿠프가 취재했다.

 
페이스북은 올 2월 모바일 메신저인 와츠앱을 인수했다. 액수는 190억 달러(약 20조원). 전 세계가 깜짝 놀랄 만한 ‘딜’이었다. 지난해 8월 136년 역사를 가진 워싱턴포스트가 아마존에 2억5000만 달러(약 2800억원)라는 초라한 가격에 팔린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거대한 딜은 실리콘밸리의 자본이 테크(Tech·기술)에 얼마나 높은 가치를 매기는지 보여주는 척도다.  실리콘밸리에선 수조원 단위의 굵직한 인수건이 종종 등장한다.

모토로라를 2조원에 내다판 구글은 올해 1월 온도조절장치 기업 네스트랩스를 3조원이 넘는 돈을 들여 사들였다. 사물인터넷 시장에 진출하려는 계산이 깔린 거래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11년 85억 달러를 베팅, 스카이프를 사들이는 등 지금까지 150곳에 달하는 회사를 인수했다. 시스코의 인수리스트에 올라 있는 기업 역시 150곳이 훌쩍 넘는다. 실리콘밸리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기술을 얻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스타트업이 눈깜짝할 사이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2004년 설립된 페이스북의 창업주 마크 저커버그는 지난해 페이스북 주식 6000만주에 대한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행사해 33억 달러(약 3조5000억원)를 챙겼다. 저커버그뿐만 아니라 인스타그램, 와츠앱(이하 페이스북 인수)의 창업자들도 단숨에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을 게다. 12살에 게임 하나로 500달러의 돈을 확보한 엘론 머스크는 페이팔을 공동창업한 뒤 2002년 이베이에 15억 달러에 팔아 거부가 됐다. 그는 지금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 모터스와 스페이스 엑스를 창업해 CEO로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가치를 실현해내는 실리콘밸리의 근로자는 비견할 곳이 없을 정도의 대우를 받는다. 호텔 수준의 식사, 세탁·미용서비스를 받는가 하면 근무시간에 수영장·골프장을 이용하는 혜택도 누린다. 업무 효율을 위해 자유롭게 출퇴근을 하고, 때론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엔지니어의 연봉은 10만 달러(1억1000만원)를 상회하고 경력이 쌓일수록 더 많아진다. 미국의 직장평가 사이트 ‘글래스도어’에 따르면 구글의 소프트엔지니어의 평균 연봉은 11만8935달러, 시니어의 경우 15만1759달러다.

언제 어떻게 팔릴지 모를 스타트업에 몸을 담았다가 억만장자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환상적인 곳’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실리콘밸리 관련 기사와 서적이 쏟아지는 것도 이런 관심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는 그렇게 밝은 곳이 아니다.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높은 연봉, 복지혜택, 자유로운 기업문화는 그곳 전체의 얘기가 아니다.

미국 소셜 Q&A 사이트 ‘쿼라(Quora)’에 들어가보면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많다.  결과를 보면, 수많은 전직 애플 직원의 얘기를 접할 수 있는데, 대부분 일과 삶의 균형문제를 꼬집는다. “야근에 시달릴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고, 잠자는 시간조차 없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하는가 하면 “편집증적인 경영진들, 무례하고 지속되는 긴장, 장시간 근무”라는 표현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매년 억만장자 탄생하는 ‘환상의 그곳’

전직 구글 직원들도 이 사이트에 방문해 ‘많은 엔지니어가 거들먹거린다’ ‘구글은 너무 커서 직원 누구도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 ‘기업문화가 미숙하다’고 꼬집는다. 구글을 비롯한 상당수 실리콘밸리 회사가 제공하는 다양한 복지혜택을 두고 “멀리 나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일만 하라는 의미다” “적은 돈으로 과시(Show off)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굳이 월급으로 주면 될 것을 공짜 점심으로 생색을 낸다는 거다.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적인 기업 이미지와는 달라도 정말 다르다.

연봉을 많이 받지만 삶의 질은 높지 않다. 이곳에선 연봉 1억원을 벌어도 남는 게 많지 않다. 연봉에 따라 많게는 소득세로 38%까지 토해내야 한다. 월세는 어깨를 짓누를 만큼 비싸다. 실리콘밸리의 방 하나 딸린 66㎡(약 20평) 규모의 주택 월세는 300만원부터 시작한다. 원룸 월세는 200만원가량이다. 둘이서 밥 한끼 먹으려면 4만~5만원은 족히 나온다. 매년 등장하는 새로운 부자들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 실리콘밸리 기업의 복지혜택과 자유로운 기업문화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면을 들춰보면 사정이 다르다.
알게 모르게 양극화가 존재하고, 부의 계급이 뚜렷하다는 게 실리콘밸리의 민낯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실리콘밸리의 무서운 그림자는 한계를 넘어서는 DNA를 만든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경쟁자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혁신을 마다치 않고, 실패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사업에 성공한 실리콘밸리 CEO들의 실패횟수가 평균 2.8회에 달한다는 조사결과가 있을 정도다. 주목할 점은 실패가 곧 패배는 아니라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 배워야

차동형 산업통상자원부 산업기술정책국장은 「응답하라 IT코리아」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는 분명 배워야 한다”며 “실리콘밸리에선 우리나라처럼 모험과 실패라는 뜻을 동시에 지닌 벤처기업이라는 단어 대신 스타트업(Start up·신생기업)이란 말을 차용한다”고 말했다. 별것 아닌 용어 하나에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실리콘밸리의 문화가 담겨 있는 셈이다.

그는 “1년 동안 실리콘밸리에서 연구하면서 느꼈지만 사업을 하다 망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라면 재취업이 쉽다”며 “ 노동시장의 유연하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정당한 가치를 지불하는 인수·합병(M&A) 문화도 국내 기업이 배워야 할 부분이다. 실리콘밸리를 대표하는 오라클의 조성문 프로덕트 매니저는 자신의 저서 「스핀잇」을 통해 “한국에서는 간혹 회사를 판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 들인다”며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는 누군가 엑시트(Exit·자금회수)를 하면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쇄도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더 구체적인 말을 남겼다.  “실리콘밸리에서 M&A가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는 비결은 표절(plagiarism)을 엄단하고 다른 사람의 지적 재산을 인정하는 문화와 벤처 자금 등이다. 물론 금융시스템이 선진화되면 M&A가 활발해진다. 하지만 남이 만든 무형자산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문화가 먼저 정착돼야 한다.”

 
인텔에서 9년 동안 개발자로 있다가 지난해 한국에 들어온 김호식 LG전자 시스템 IC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실리콘밸리에선 기술을 사용한 대가를 지불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한국의 소프트웨어 기업은 이를 인건비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어 아쉽다. 소프트웨어의 가치에 정당한 가치를 매기는 문화가 정착됐으면 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국경제의 화두는 ‘창조’다.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한국에 만들겠다며 다양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내실 있는 투자는 거의 없다는 지적이 많다.

무형자산에 대가 지불해야

최근 실리콘밸리에 연수를 다녀온 유진영 인하대(화학공학) 학생은 이렇게 꼬집었다. “정부가 창업을 활성화한다면서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이 정도 규모의 돈을 투자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두는 거 같다. 실리콘밸리에 가보니 달랐다. 이곳에는 엔젤투자가 활성화돼있고 스타트업을 키워주는 인큐베이팅 개념이 분명했다. 대학교에서도 창업과 연계된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잡혀 있었다. 베팅액수보다는 생태계를 어떻게 가꾸느냐에 초점이 맞춰졌으면 한다.”

그렇다. 창업시장에 활력을 주는 건 돈이 아니라 생태계다. 정부가 해야 할 일도 무작정 많은 돈을 푸는 게 아니라 생태계를 아름답게 꾸미는 거다. 실리콘밸리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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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실리콘밸리

실리콘밸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남쪽에 있는 최대 도시 새너제이를 중심으로 서쪽의 스탠퍼드 대학교가 위치한 팔로알토(Palo Alto)에서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 뷰(Mountain View),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Cupertino)를 거쳐 동쪽 끝에 있는 밀피타스(Milpitas)까지 도시를 지칭한다. 실리콘밸리는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Silicon·규소)과 샌프란시스코 동남쪽에 자리 잡은 산타클라라 계곡(Valley)의 합성어다. 실리콘밸리의 시초는 1939년 스탠퍼드 대학의 한 허름한 장소에서 사업을 시작한 휴렛팩커드(HP)다. 이후 실리콘으로 된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실리콘 밸리로 불리게 되었다. 휴렛팩커드·인텔·페어차일드 등뿐만 아니라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4000여개의 기업이 운집하고 있다. 벤처비즈니스, 벤처캐피털 등이 모여 일대 산업복합체가 형성되어 있고 가까운 곳에 스탠퍼드대학·버클리대학·산타클라라대학 등 명문대학이 있어 우수한 인력확보가 쉬운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김미선 더스쿠프 기자 story@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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