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행의 재밌는 法테크

우리는 자신이 받는 상처에 매우 민감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받는 상처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일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라도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듬어야 할 때다.

▲ 생김새와 성격은 다양해도 부족한 사람은 없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사진=뉴시스]
어린 시절 자전거를 타다 급커브 길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왼쪽 다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그때의 공포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상처받을 만한 상황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잘못하면 누군가의 악의적인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오랫동안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상처에 민감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받는 상처에도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집단따돌림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자신을 따돌린 사회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이 반복되는 것으로 짐작할 때 우리는 아직도 남의 상처에 무감각한지 모르겠다. 2007년 4월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은 한국인 재미교포 1.5세대 출신의 버지니아공대 재학생이었다. 미국사회 부적응에서 기인한 스트레스 외에도 적응능력 부족에 따른 왕따가 원인이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미국 플로리다에 살던 한 10대 소녀 세드윅 양이 사이버 왕따로 고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다. 세드윅 양은 2012년부터 자살할 때까지 거의 1년 동안 같은 학교 친구들로부터 사이버 왕따에 시달렸다. 학교 선배의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했던 게 화근이었다. 이를 계기로 학교 선배와 친구들은 “넌 죽어야 해” “왜 자살하지 않니” “너는 정말 못생겼어”라는 메신저를 무수히 보냈다. 결국 세드윅 양은 “더는 견딜 수 없어 건물에서 뛰어내리겠다”는 문자를 남자친구에게 보낸 뒤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이런 사례는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집단따돌림으로 인한 상처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가 너무도 많다. 최근 개정된 학교폭력예방및대책에관한법률에 ‘따돌림’과 ‘사이버 따돌림’을 학교폭력에 포함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런 법 규정으로 얼마나 ‘따돌림’이나 ‘사이버 따돌림’을 예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클리브 백스터는 거짓말탐지기 연구가다. 그는 거짓말탐지기를 ‘드라세나’라는 식물에 연결했다. 식물의 안녕을 위협했을 때 식물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백스터는 ‘확실하게 위협하려면 잎을 성냥불로 태우면 되겠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할 당시 백스터와 드라세나는 5m쯤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잎사귀를 태워야겠다는 생각이 든 바로 그 순간, 거짓말탐지기의 기록바늘이 순식간에 기록지 맨 끝까지 올라갔다. 잎사귀를 태워야겠다는 뚜렷한 의도를 가졌을 뿐인데 식물은 극도로 흥분한 것이다. 백스터로선 식물도 공포감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있는 발견을 한 셈이다.

이렇게 식물이 단순한 의도에도 공포를 느낀다면 동물은 어떠하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내가 받는 상처와 똑같은 상처를 받는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장구한 역사적 산물이다. 인간이 태초에 창조된 이래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아 현재까지 왔다. 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더라도 우리 모두는 존중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나도록 돼 있고, 부족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조준행 법무법인 자우 변호사 hae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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