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석학들의 ‘불균형 해소법’

▲ 대공황 당시 미국이 선택한 처방은 부의 재분배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자본주의는 호불호를 떠나 성장과 효율을 담보하는 가장 유용한 경제체제로 인정받고 있다. 문제는 ‘부의 불균형’이라는 필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수많은 경제학자의 숙제였다.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토마 피케티도 그중 한명이다.

자본주의를 경고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했던 자유경쟁 시스템이 거의 구축됐음에도 세계경제의 성적표가 신통치 않아서다. 더구나 지난 50년간 자본주의는 개인의 평균소득을 배 이상 늘려줬지만, 많은 국가들이 여전히 빈곤의 악순환과 부의 양극화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가 가속화될수록 ‘부의 불균형’이 더 견고해지고, 부의 편중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론」이 화제가 된 건 이런 현상을 정확히 꼬집고 있어서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발생한 부의 대부분이 1% 최상위 계층에 집중되고 있다는 걸 통계를 통해 입증했다. 연구의 타당성은 논란이 있지만 중요한 건 피케티가 왜 이런 책을 펴냈느냐 하는 거다.

피케티, 부의 집중을 입증

이유는 하나다. 자본주의의 태생적 한계인 부의 불균형을 짚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고민하고 다뤄왔던 문제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자유주의 경제학의 기초를 닦은 애덤 스미스도 예외는 아니다. 애덤 스미스는 1776년 그의 저서 「국부론」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녁 식탁에서 빵과 우유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제빵업자와 낙농업자의 이타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개인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사회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보이지 않는 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수요와 공급을 조절해 적절한 가격을 형성하고, 가격은 시장 참여자들을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사회 전체의 이익 극대화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실제하느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한가지 단서를 달았다는 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오류 없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완전경쟁이 필요하고, 완전경쟁의 전제조건은 경쟁자들이 각자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어느 한쪽이 유리하지 않도록 규제를 완전히 풀어야 한다며 ‘작은 정부’를 지향한 애덤 스미스가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을 역설한 게 바로 이 부분이다. ‘동일한 출발선’을 만드는 건 정부의 몫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복지정책의 필요성도 인정했던 거다. 

 
동일한 출발선에서 비롯된 부의 불균형은 인정하지만, 기회부터 공평하지 않은 불균형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경제학자는 또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1859년 「자유론」을 펴내면서 상속이 ‘기회균등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불로소득인 상속재산에 고율의 세금을 매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이유에서 토지 사유화를 폐지할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런 주장들을 흡수하지 못했다. 부의 불균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러자 아예 자본주의 자체를 다른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칼 마르크스에 의해서다. 그는 1867년 「자본론」을 통해 이윤이 노동을 통해 생긴다는 걸 규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본가의 착취로 부가 노동자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혁명을 통한 해결을 강조했다. 새로운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유럽에 신선한 충격을 안겼고, 이후 러시아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만드는 계기로 작용했다. 다만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경쟁은 자본주의의 변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상대 진영의 체제를 일부 수용하는 것은 자기 체제의 실패를 인정하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1929년부터 10년간 이어진 대공황을 기점으로 자본주의는 거대한 수정기를 맞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 의해서다. 그는 대공황의 원인을 금융자본에서 찾았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자본주의를 통해 발생한 부가 한쪽으로 쏠린다. 그런데 이 부가 제품을 소비하는데 쓰이지 않고 투기자본으로 흘러간다. 제품을 만드는 데만 돈이 투자되고 소비에는 쓰이지 않는 셈이다. 부를 축적하지 못한 이들은 넘치는 제품을 구매할 여력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자본가는 투자도 꺼린다.

물론 이런 내용은 케인스가 지적한 다양한 주장의 일부일 뿐이다. 중요한 건 부의 편중이 대공황의 요인이라는 분석을 내놨다는 점이다. 케인스의 이론에 기초해 추진된 뉴딜정책을 단순하게 정부재정지출을 통한 공공투자의 확대로 오해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바로 부의 재분배였기 때문이다. 조원희 국민대(경제학) 교수는 “미국은 대공황 이후 뉴딜이라는 부의 재분배 정책을 통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누렸다”며 “1960~1970년대 미국의 부의 재분배 수준은 지금까지 가장 양호한 수준으로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1980년대를 기점으로 복지를 줄이고, 시장을 키우는 신자유주의가 다시 등장하면서 부의 재분배 수준은 다시 낮아졌다. 시중으로 나온 거대한 자본은 전 세계로 투자됐다. 하지만 세계의 모든 이윤은 월가의 금융권으로 흡수됐다. 그 과정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고, 이후 세계 경제는 이렇다 할 반등을 못하고 있다. 

대공황을 이긴 재분배 정책

최근 다시 부의 재분배가 논의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은 부의 재분배를 통해 대공황을 이겨낸 경험이 있다. 실현 가능한 주장이라는 얘기다. 물론 방법론의 차이는 있다. 부유층의 조세를 거둬 한쪽으로 쏠린 부를 조정할 것인지 아니면 소득재분배를 통해 애초부터 부의 편중을 줄여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진행 중이다.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의 저자 레이먼드 W. 베이커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무역과 자본 이동으로 인해 만연한 부패와 악습, 그리고 그로 인한 엄청난 소득격차를 불가피한 것이라고 용인하는 이런 상황은 애덤 스미스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다. 더구나 그는 ‘구성원의 압도적 다수가 빈곤에 허덕이는 상황에서는 어떤 사회도 진정으로 번영을 누리고 행복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일부의 행복이 다른 구성원의 행복을 위해 짓밟히고 유린돼도 된다는 생각은 자본주의를 야만적으로 만들었다. 이를 바꾸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불안한 경제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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