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리오’ 드라기의 도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 시중은행에 두차례에 걸쳐 돈을 풀었다. 민간대출을 확대해 시장(market)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돈은 시장으로 흐르지 않았다. 시중은행이 쟁여놓거나 중앙은행에 다시 예치했기 때문이다. 그런 드라기가 또 ‘돈’을 풀기로 했다. 디플레이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다. 무려 1조 유로에 달하는 돈이 쏟아질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시중은행이 이 돈을 실물시장으로 퍼뜨리느냐다. 드라기가 이례적으로 시중은행을 압박하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2년 8월 중순. 유로존 안팎엔 ‘9월 위기설’이 나돌았다. 남유럽 재정위기의 뇌관을 터트린 그리스의 국고가 바닥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리스가 긴축재정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유럽연합(EU)이 구제금융 지원을 중단한 게 부메랑이 됐다. 그해 8월 20일 만기인 31억 유로 규모의 유럽중앙은행(ECB) 채권을 갚아야 하는 그리스로선 벼랑에 내몰린 격이었다. 당시 재무부 차관이던 크리스토스 스타이코라스가 국영 NET 방송에서 내뱉은 말을 들어보면 당시의 절박함을 쉽게 엿볼 수 있다.

▲ ECB가 통화완화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관건은 시중은행이 이 정책에 얼마나 동조하느냐다.[사진=뉴시스]
“… 국고의 현금보유분이 거의 말랐다. ECB로부터 빌린 대출을 상환해야 하는 8월 20일까지 추가 구제금융 지원금을 받지 못한다면 벼랑 끝에 몰릴 게 확실하다. 국고가 고갈되면 당장 경찰관 등 공무원의 급여와 연금을 지급하지 못한다. 사회복지 서비스도 제공할 수 없어 국정마비상태를 피할 수 없다….” 국제금융시장의 눈이 “유로존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 하겠다”고 약속한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에게 쏠렸다. EU와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 지원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믿을 언덕’은 드라기뿐이었다. 2012년 9월 20일, 드라기 총재는 ‘통 큰 결정’을 내렸다. 유로존의 3년 이내 단기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기로 한 것이다. ECB가 매입한 채권의 우선변제권을 포기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드라기의 결정은 국제금융시장에 활력소가 됐다. 국채매입의 대상국인 스페인 마드리드 증시와 이탈리아 밀라노 증시는 9월 21일 각각 4.91%포인트, 4.31%포인트 폭등했다. 영국ㆍ독일ㆍ프랑스 증시도 3%포인트 안팎으로 올랐다. 유로존뿐만이 아니었다. 뉴욕 다우지수는 2007년 12월 이후 최고 수준인 1.87% 올랐다. 일본 닛케이 지수, 홍콩 항셍지수, 한국 코스피지수도 2%포인트 가량 상승했다. 드라기 총재가 국제금융시장의 ‘구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었다. 그의 별칭 ‘슈퍼 마리오’처럼 말이다.
 
그로부터 2년. 유로존은 여전히 칠흑 같은 ‘불황터널’에 갇혀 있다. 지난해 4분기,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은 각각 0.5%, 0.9%를 기록해 마이너스를 벗어났지만 성질 급한 시장(market)의 기대를 만족시킬 만한 수치는 아니다. 디플레이션 우려도 감지된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시장예상치를 밑돌고 있어서다. 유럽통계청에 따르면 유로존의 5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0.5% 상승했다. 미 블룸버그가 집계한 전문가들의 예상치(0.7%)보다 0.2%포인트 낮은 수준이다.

유로존 인플레이션 역시 0.7%로, ECB의 목표치 2%를 크게 밑돌고 있다.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되는 까닭이다. 실제로 IMF는 “2015년 유로존이 디플레이션에 빠질 확률이 25%”라고 전망해 기름에 불을 붙였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도 디플레이션 가능성까지 경고했다. “현재 세계경제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인은 지나치게 낮은 인플레이션이다. 유로존이 특히 심각하다.”

 
디플레이션은 ‘조용한 경제살인자’다. 사람의 저혈압처럼 경제활력의 불씨를 완전히 짓밟을 수 있다. 더 쉽게 말해보자.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면 소비자는 가격하락을 예상하고 상품구매를 늦춘다. 상품이 팔리지 않으면 기업매출과 공장가동률이 떨어진다. 그러면 임금이 줄거나 일자리가 감소하고, 소비자의 지갑은 얇아진다. 소비는 또 줄어든다. 2012년 9월 그날처럼 국제금융시장의 관심이 드라기에게 쏠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플레이션이라는 무서운 놈이 유로존 안에서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로존의 마지막 지킴이 ‘드라기’

예상대로 드라기는 시장에 ‘돈’을 풀기로 했다. ECB는 6월 5일 통화정책회의에서 통화완화정책의 시행을 결정했는데, 핵심은 세가지다. 먼저 기준금리를 0.25%에서 0.15%로 0.10%포인트 인하하고, 시중은행에는 마이너스 0.1% 금리를 부과한다. 둘째, 시중은행을 대상으로 새로운 장기대출 프로그램(TLTRO)을 시행해 최대 4000억 유로를 빌려준다. 마지막으로 불태화不胎化 정책(ste rilization policy)을 포기한다. 시중에 풀린 돈을 국채매입으로 회수하지 않겠다는 거다. 이를 통해 풀릴 자금은 1625억 유로로 추정된다. [※ 참고: 불태화는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증감을 막기 위해 채권을 매각 또는 매입하는 정책을 말한다. 살균소독이나 불임시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이번 정책에서 드라기의 속내를 고스란히 읽을 수 있는 건 ‘마이너스 예금금리’ 도입이다.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자금에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이번 통화정책의 초점이 ‘실물경제 회복’에 있음을 시사한다. 시중은행에 빌려준 자금이 시장이 아닌 중앙은행으로 되돌아오면 ‘벌금’을 매기겠다는 정책이라서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돈은 시중에 풀릴 수밖에 없다. 한 국제금융 전문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드라기는 ECB가 썼던 1ㆍ2차 LTRO의 한계를 인식한 것 같다. 강력한 대출정책을 펴봤자 기업이나 가계로 유동성이 흐르지 않는 걸 주목한 거다. 그래서 시중은행에 ‘징벌적 금리’를 적용해 돈이 인위적으로 풀릴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했다. 실물경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강력한 부양정책을 쓴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로 ECB의 이번 정책은 1ㆍ2차 LTRO보다 진화했다. 1ㆍ2차 LTRO를 활용해 시중은행은 1조 유로가 넘는 돈을 빌렸지만 막상 투자할 곳을 찾지 못했다. 우량기업은 현금을 쟁여놓기 바빴고, 손을 빌리는 기업이나 가계는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의 돈이 시중은행을 거쳐 시장으로 흐르기 어려운 생태계였다. 그래서 ECB는 이번에 ‘대출조건’을 명확하게 했다. 기업이든 가계든 빌려간 돈이 실물경제로 이어지지 않는 게 확인되면 2016년 9월까지 조기상환해야 한다. 곽현수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이는 강제상환요건”이라고 말했다. 조기상환 기한도 늘렸다. 1ㆍ2차 LTRO에는 ‘1년 후’ 자발적 조기상환 가능조건이 있었다. 이번엔 2년이다. 시중은행으로선 대출자금을 싼 금리로 최소 2년을 묵혀놔야 하기 때문에 시장에 풀 확률이 그만큼 커진다.

드라기의 이런 압박정책에 국제금융시장은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독일 DAX 지수는 6월 6일(현지시간) 종가 기준 사상 최고치인 9987.19포인트를 기록했다. 장중 한때 1만 포인트를 넘어서기도 했다. 미국 증시도 비슷하게 흘렀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은 같은 날 종가 1949.44포인트를 찍었다. 이번 통화정책이 유럽을 넘어 세계경기의 확장국면을 지속시킬 거라는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드라기의 압박, 은행 꿈틀

우리로선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유럽경기가 회복되면 중국의 유럽수출이 늘어난다. 중국의 대유럽 수출비중은 17%에 달한다. 유럽이 경기부양을 하면 중국경제가 회복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수출기업에도 호재다. 한국의 가장 큰 수출지역이 중국이라서다. 이를테면 ‘유럽→중국→한국’으로 이어지는 경기선순환 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물론 비관적 전망도 많다. 유로존의 시중은행들이 드라기의 구상대로 움직이진 않을 거라는 주장이다. 무엇보다 약삭빠른 시중은행이 0.25%라는 파격적 조건에 돈을 빌려가 가계나 기업에 실제로 대출을 할지는 지켜봐야 한다. 곽현수 연구원은 “자기 잇속만 챙기고 2년 후 상환해 버리는 얄팍한 수를 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 유럽의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시장기대치를 밑돌고 있다. 가계와 중소기업의 상황은 여전히 신통치 않다.[사진=뉴시스]
시중은행이 꼼수를 쓰지 않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가계와 기업사정이 신통치 않아서다. 유로존의 상당수 가계는 여전히 실직 상태다. 대출원금은커녕 이자조차 갚지 못한 위험에 처해 있다. 수익성이 개선된 대기업은 자금이 넘쳐나는 데 반해 수많은 중소기업은 파산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리가 제아무리 낮더라도 시중은행이 자발적으로 신용창출에 나설지는 알 수 없다. 유럽 주요 시중은행(19개 회원국 124개 금융기관)이 ECB의 자산건전성 평가를 앞두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건전성 평가를 받아야 하는 시중은행들은 당분간 ‘부채정리(디레버리징)’에 초점을 맞출 게 불 보듯 뻔하다. 리스크가 있는 가계나 기업에 ‘돈’을 빌려줄 공산이 거의 없다는 비관론이 쏟아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찌 됐든 드라기는 ‘통화완화카드’를 꺼내들었고, 유럽경제는 꿈틀대고 있다. 벌써 ‘디플레이션 우려가 수그러들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슈퍼마리오가 던진 주사위, 글로벌 경제판을 흔들고 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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