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행의 재밌는 法테크

▲ 피해작가 승낙했다고 모든 처벌이 면제되는 건 아니다. 법 전체의 정신은 존중돼야 한다. [사진=뉴시스]
“피해자의 승낙이 있으면 상해를 입혔어도 벌하지 않는다.” 협법 상 규정이다. 하지만 한 사람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승낙을 받고 상해를 입혔다면 처벌을 받는다. 윤리적이지 않은 승낙은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UFC라는 종합격투기 종목이 있다. 철창으로 둘러싸인 팔각형의 옥타곤 안에서 두 선수가 맞붙는다. 상체뿐만 아니라 하체도 공격할 수 있고, 심지어 팔꿈치로도 공격한다. 그러니 피가 흐르고 관절이 꺾이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형법상 상해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상해를 입힌 선수를 처벌했다는 기록은 보지 못했다. 무엇이 처벌을 면하게 해주는 것일까.

로마법에는 ‘승낙이 있으면 침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모든 시민은 자신의 생활범위에서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고 봤던 거다. 우리 형법 제24조도 ‘처분할 수 있는 자의 승낙에 의하여 법익을 훼손한 행위는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벌하지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상해를 입힌 행위가 범죄구성요건에 해당되더라도 피해자의 승낙이 있으면 위법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피해자의 승낙이 위법성을 소멸시키는 분야는 또 있는데, 의사의 치료행위다. 사례를 보자. 한 대학병원 정형외과 의사 A씨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B씨에게 무無수혈 방식으로 인공 고관절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 도중 혈관이 파열돼 수혈이 필요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의사 A씨는 B씨를 중환자실로 옮긴 뒤 수혈을 하지 않았다. 결국 B씨는 숨지고 말았다. B씨는 사망 한달 전 다른 병원 3곳에서 ‘수혈을 하지 않고 수술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의사 A씨는 무수혈 방식으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B씨는 수술 전 “수혈을 원치 않는다는 의지가 확고하며 모든 피해에 대해 의료진에게 민ㆍ형사상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책임면제각서를 작성했다. 검사는 의사 A씨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1ㆍ2심 재판부는 “환자가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무수혈 수술을 선택했고, 의사가 이런 환자의 뜻을 존중해 수혈을 하지 않은 행위는 형법상 피해자의 승낙에 의한 행위에 해당해 처벌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응급상황에서 생명과 직결된 치료방법을 회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하지만 환자의 자기결정권 행사가 생명과 대등한 가치가 있는 헌법적 가치에 기초하고 있다면 환자의 의사도 존중돼야 한다.”

나아가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추구권에 기초한 가장 본질적인 권리”라며 “환자가 자기결정권에 따라 구체적인 치료 행위를 거부했다면 의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해당 진료 행위를 강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결국 의사 A의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피해자의 승낙이 무제한의 힘을 가질 수 있을까.

여기 두 사람이 있다. 교통사고를 가장해 보험금을 타내기로 공모한 C씨와 D씨다. C씨는 D씨를 자동차로 충격을 가해 상해를 입혔다. 이 사안에 대해 대법원은 “형법 제24조의 규정에 따르면 위법성이 사라지는 피해자의 승낙은 윤리적ㆍ도덕적으로 사회적 상규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며 C씨와 D씨는 보험사기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승낙은 없는 것으로 봤다. 이에 따라 C씨는 D씨가 승낙을 했음에도 상해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처분할 수 있는 분야에서 피해자의 승낙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피해자의 승낙이라도 무제한일 수 없다. 법 전체의 정신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자우 변호사 haeng@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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