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㉖

밤은 4경이요 4월 그믐밤이었다(1952년 4월 30일 새벽). 밤비가 세차게 퍼부어 지척을 가리지 못하였다. 왕비 박씨는 상궁 2~3명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섰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로 인도하여 겨우 길을 찾았다. 궁녀들은 비를 맞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서대문에 이르기까지 곡성이 진동하였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면에 강을 등져서 있으니 달아날 수도 없었다. 8000명의 기병 역시 결사적 전투를 결심했다. 신립, 참으로 과감한 용장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있었다. 상주ㆍ함창ㆍ문경을 차례로 함락하고 조령 밑에 이르렀다. 적장 소서행장은 치밀했다. 척후대를 먼저 보내 조선군이 복병을 했는지 또한 지형을 심사했다. 조령은 험애한 산곡이 30리를 뻗쳐 나간 외길목이었다. 많지 않은 군사가 지키고 있어도 돌파하기 힘들다는 걸 소서행장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일본군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천험인 조령을 넘어 충주 단월역에 이르러 군사를 정돈한 후 좌우 두길로 군사를 갈라 신립의 진을 쳐들어 갔다. 때를 맞춰 일본 제2군 가등청정의 부대가 죽령을 넘어 충주에 이르러 신립의 진을 압박했다.

온종일 싸워서 엎치락뒤치락 피차에 사상이 많았다. 신립의 기병이 일본군의 조총에 연달아 거꾸러지고, 종사관 김여물까지도 싸우다가 기진하여 강물에 뛰어 들어가 순사하였다. 신립은 기를 휘두르며 3군을 지휘하여 격전을 펼쳤다. 탄금대로 올라가 활을 당겨 적군을 쏘아 죽이다가 깍짓손에 불이 나면 탄금대에서 뛰어내려 강물에 손을 적시길 아홉번이나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곳을 구초대九超臺라고 불렀다. 신립은 화살이 다함에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인 황오黃五가 시를 지어 조의를 나타냈다.

“동풍 불어오는 쪽 탄금대를 바라보니 싸우던 보루엔 통한의 구름 아직도 짙구나. 천지에 보람 없이 배수진을 쳤으니 강산도 한을 품어 객조차 술잔을 머금는다. 강마을 빗속에 배 띄워 충주 이르니 해안 초소에서 맑은 날 띄운 급보가 조령을 넘었다. 해는 지고 신 장사(신립) 만날 길 없으니 고요한 모래펄에는 백구만 날고 있구나.” 일본군은 신립의 대군을 격파하고 충주성을 점령한 뒤 소서행장은 여주驪州, 가등청정은 죽산竹山으로 향하여 각각 한성으로 쳐 올라갔다. 충주에서 신립이 패망했다는 경보가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는 통곡하였다. 곧 대신들을 불러들여 계책을 물었다. 영의정 이산해가 “사세가 이러하니 잠깐이라도 평양으로 행행(임금의 행차)하심이 옳을까 합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항복이 “서관(황해도와 평안도를 함께 이르는 말)을 거쳐 명나라로 향하여 회복을 도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였다. 장령 권협權悏이 어전에 나아가 “상감, 못 가십니다!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을 사수하여야 할 일입니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권협은 머리를 조아려 피가 흘러 계단을 적셨지만 선조는 불청하였다. 좌의정 유성룡은 “여러 왕자를 각 도로 나눠서 보내되 중신을 대동케 하라”라고 명했다.

탄금대 대패로 전세 완전히 기울어

선조는 그 말에 따라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함경도, 순화군順和君 규珪를 강원도로 보내고 유성룡을 돌아보며 “경은 유도대장이 돼 한성을 지키시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승지 이항복은 이렇게 만류했다. “좌상 유성룡으로 유도대장을 삼으심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서관으로 가신다면 압록강을 건너면 명나라 땅이니, 조정에 있는 대신 중에 이 일에 대처할 만한 재주와 자격을 품은 이는 유성룡 1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좌상으로 하여금 한성을 지키게 하면 종국에는 패군지장이 될 뿐입니다. 대가를 호종(임금이 탄 수레를 시중 들며 따르는 일)케 하면 반드시 크게 쓸 곳이 있을 것입니다.”

선조는 이항복의 말을 좇아 우의정 이양원으로 유도대장을 삼고 좌의정 유성룡은 호종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궐을 호위해야 할 5군영의 금군은 거의 도망친 상태. 소위 옥당이니 은대(승정원)니 6조3사 관료들도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선조는 점점 적막해 간다. 상주에서 패하여 충주로 달아났지만 충주에서도 탄금대 싸움에 패해 신립, 김여물 같은 충신들은 전사하였다. 허나 이일은 모두가 죽음을 맞는 속에서도 용하게도 살아나 도망을 쳤고, 장계를 써 한양으로 올려보냈다. 장계를 통해 이일은 충주 탄금대에서 패전한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한 뒤 적군이 금명일간에 한성을 범할 것이라고 하였다.

▲ 유성룡이 없었다면 선조는 일찌감치 일본군에 붙잡혔을지 모른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일의 장계를 본 군신은 일제히 통곡하였다. 일각이라도 더 늦출 수 없다고 하여 선조는 창황중에 군복을 입고 말에 올랐다.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光海君 혼琿, 제5왕자 신성군信城君 후珝, 제6왕자 정원군定遠君 부琈(후일 원종왕元宗王으로 추숭追崇하다)가 뒤를 따라 광화문을 나섰다. 밤은 4경이요 4월 그믐밤이었다(1952년 4월 30일 새벽). 밤비가 세차게 퍼부어 지척을 가리지 못하였다. 왕비 박씨는 상궁 2~3명을 데리고 인화문仁和門으로 나섰는데 도승지 이항복이 촛불로 인도하여 겨우 길을 찾았다. 궁녀들은 비를 맞으며 그 뒤를 따랐다. 서대문에 이르기까지 곡성이 진동하였다. 선조가 서대문을 나서는 때에는 따르는 신료가 영상 이산해, 좌상 유성룡 이하로 100여인에 지나지 않았다.

선조가 서울을 떠난 뒤에 유도대장 이양원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여 난민이 봉기했다. 그들은 장예원掌隷院과 형조를 불사르고 다음에는 내탕고內蕩庫에 난입하여 재보를 끌어내고 경복궁景福宮ㆍ창덕궁昌德宮ㆍ창경궁昌慶宮을 불살랐다. 장예원은 공사노비의 문서 장부가 있는 곳이요, 형조는 귀족들이 평민 이하를 형벌하던 곳이다. 난민들은 적군이야 오거나 말거나 이곳부터 불살라 없앤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선조는 호종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버리고 파천하였다. 중로에서 어느 지방을 가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가 일어났다. 대사헌 윤두수는 “북도는 군마가 정강하고 함흥咸興과 경성鏡城이 천부지토(하늘이 부여한 땅)이므로 함경도로 가십시오”라고 주장했다.

한양을 버린 선조, 파천 시작

 
이항복은 진언하되 “평안도 의주로 가야 만일에 세궁역진(기세가 꺾이고 힘이 다 빠져 어찌할 수가 없음)하더라도 명나라에 의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주장이 없는 선조는 처음에는 윤두수의 말대로 할 뜻도 있었고 이항복의 말에도 그럴 듯 여겼다. 도체찰사 유성룡은 두 사람의 말을 모두 찬성하지 않았다. 진언하되 “북도는 교통이 불편하니 적병이 만일 따라오는 날에는 더 갈 곳이 없다”며 “성상이 1보라도 조선 땅을 떠난다면 조선은 벌써 우리 것이 아니게 됩니다” 하였다. 유성룡은 덧붙였다. “어찌하여 성상이 조선을 떠난다는 말을 입 밖에 낸단 말이오? 만일에 이 말이 전파되면 민심이 소동될 것이니 어찌 말을 경솔하게 하오?” 이항복은 유성룡의 앞에서 “대감, 내 잘못하였소” 하고 깨끗하게 사과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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