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25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는 좌불안석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좌의정 유성룡에게 손바닥에 쓴 글자를 내어 보였다. ‘입마영강문(말을 영강문에 세우자)’이라고 쓰여 있다. 선조를 모시고 달아나자는 뜻이었다. 몽진蒙塵 준비가 시작된 것이다.

 
일본 소서행장 군대는 벌써 성중에 들어왔다. 하지만 경북 상주에 도착한 이일은 성이 함락된 줄도 몰랐다. 정찰을 나간 군관이 일본 군사의 총알에 맞아 죽은 이유도 있었다. 이일은 성중이 시끄럽자 그제야 놀랐다. 수없는 일본군은 고함을 치며 조총을 놓고 엄습하여 온다. 조총대 수십명을 선봉으로 삼고 관군의 전열을 공격함과 동시에 진세를 좌우로 나눠 관군을 포위했다. 이일의 군사는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이일 역시 준마를 채찍질하여 말머리를 뒤로 돌려 달아난다. 이일의 종사관인 윤섬尹暹 등이 “사또 어디를 가오”라며 따라온다. 이일은 뒤도 돌아볼 사이 없이 그 좋은 호달마(중국산 좋은 말)의 강철 같은 말굽으로 안개 같은 먼지를 일으키며 번개같이 달아난다. 종사관 윤섬은 크게 부르짖으며 “이놈, 이일아! 국은이 망극하거든 싸우지도 아니하고 달아난단 말이냐? 남자가 절개를 지키고 의를 위해 죽어야 할 터이지!”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적군 가운데로 말을 몰아 들어가 싸워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박호도 같이 싸우다가 절사節死하였다.

크게 믿었던 대장군 이일과 조방장 변기는 다 도망쳤다. 판관 권길과 조방장의 종사관 이경류李慶流는 분개해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다. 이경류는 죽은 뒤 그 영혼이 불멸해 수십년 동안 그 가족의 눈에 보였다는 말이 후세에까지 전해진다. 일본군은 조선군의 대장인 이일을 사로잡아 상을 받으려고 이일의 뒤를 급히 추격하였다. 이일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갑주를 벗고 상투를 풀어 산발하고 말까지 버린 채 도보로 조령을 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쳤다. 그리고 그 이튿날 충주에 들어가 도순변사 신립의 진에 당도해 신립에게 고하되 군사가 적어 패하였다고 울면서 호소한다. 도순변사 신립은 각도의 병마를 불러 모아 합 8000기를 거느리고 의기당당하게 충주성 북쪽 단월역丹月驛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일과 변기의 호소를 들은 신립은 다시 군사를 주어 선봉과 부선봉을 삼고 “패군한 죄는 공을 세워 갚으라”고 명한 후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李宗張 등과 더불어 같이 군무를 보살폈다.

난폭한 이일, 군대 버리고 도망

신립의 진중에서 군사회의가 열렸다. 의제는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오면 어떻게 막을까’라는 것인데, 의견이 두가지로 갈렸다. 하나는 김여물과 이종장의 주장이니, 관군은 적고 적군은 많은즉 마땅히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지켜 군사를 산곡에 숨기고 연기를 피워 적으로 하여금 의혹이 나서 감히 고개를 넘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립의 주장인데, 일본군이 조령을 넘어 충주평야를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준비했다가 일거에 격파하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기병이라 산곡에서 싸우기는 불편하고 평야가 적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김여물 등이 제시하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 탄금대 밑에 배수진을 친 신립은 결사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금은보화가 있어도 활용치 못하면 수전노에 불과하고 양약이 있어도 환자가 복용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을 뿐이다. 오자서의 계책이 있지만 오나라가 망하고 범증의 지모가 있으나 초패왕이 자결함은 사람을 쓰고 안 쓰고와 말을 듣고 안 듣고에 달렸다. 아깝다, 신립이여! 기병이 산곡의 비탈길에서 말달리고 활을 쏘기가 불편하겠지만 말에서 내리면 보병이요 말에 오르면 기병이니, 어찌 임기응변함이 없이 병법을 논의할쏘냐.

김여물은 다시 신립에게 이렇게 고했다. “적은 수의 군사로 수많은 적군을 대항하는 비결은 험고한 지리에 웅크리고 있는 게 득책입니다. 훈련이 부족할뿐더러 전쟁 경험까지 없는 8000병마로 평지에서 적군과 싸운다는 것은 이로울 리 없습니다. 만일에 조령의 험고함을 이용하지 아니할진대 차라리 한강을 의지해 한성이나 지키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신립은 자부심이 강한 까닭에 고집이 많다. 그래서 “영감은 염려 마오. 적군은 내가 감당할 것이니”라며 김여물의 양책을 불청했다. 김여물은 신립의 무모한 고집 때문에 패할 줄을 짐작하매 죽을 바를 자각하고 자기의 아들 류에게 이런 서간을 써 보냈다.

“삼도에 징병했지만 한 사람도 오는 자가 없으니 우리들은 빈주먹만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다. 남아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국치를 씻지 못하고 장부의 뜻이 꺾이고 마니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다.” 이때 이일이 상주에서 패했다는 보고가 서울에 들어왔다. 선조는 좌불안석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좌의정 유성룡에게 손바닥에 쓴 글자를 내어 보였다. ‘입마영강문(말을 영강문에 세우자)’이라고 쓰여 있다. 선조를 모시고 달아나자는 뜻이었다. 유성룡도 할 수 없어 이항복의 뜻을 선조에게 비밀히 상주하였다. 선조도 할 수 없이 몽진蒙塵할 준비를 단속하라하였다.

선조는 우의정 이양원으로 수성대장을, 이전李戩으로 좌위장을, 변언수邊彦琇로 우위장을, 박충간朴忠侃으로 순검사를 삼아 한성을 지키게 하고, 경림군慶林君 김명원으로 도원수를, 신각申恪으로 부원수를 삼아 한강을 지키게 하였다. 한성을 지킬 군사는 모두가 7000명밖에 되지 않고, 그것도 오합지졸이라 틈만 나면 달아난다. 삼사육조의 관리들도 매한가지다. 대관들의 가족도 다 피난길로 달아나고 종친들까지라도 달아나는 이가 많았다. 한심한 일이었다. 영부사 김귀영이 선조를 향해 “대가大駕가 서울을 떠나시다니요! 종사가 있으니 죽기로써 지킴이 옳습니다”라며 분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선조도 감동하여 “종묘사직이 이곳에 있거늘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이냐”라며 떠나지 아니할 것을 단언하였다.

연일 패전보에 조정 ‘좌불안석’

 
전임 이조판서 유홍兪泓은 상소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마혜(삼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는 궁중의 소용이 아니옵고 금은보화는 적병을 막는 병기가 아니오니 이런 것을 매입해 도망갈 준비를 하는 것은 망국지본이오니 모름지기 굳게 도성을 지켜 군신이 사직과 함께 죽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홍은 자기의 가솔은 남보다 먼저 북도로 피난시켜 보내고는 이따위 큰소리를 하였다. 제신들은 그 사특함을 미워하였다. 이때에 도순변사 신립은 충주忠州 달천강을 등지고 탄금대彈琴臺 밑에 배수진을 치고 삼군에게 죽기로 싸워 나라의 은혜를 보답하자며 격려하고 엄명하였다. 후면에 강을 등져서 있으니 달아날 수도 없어 8000의 기병은 결사적 전투를 준비했다. 참으로 신립은 과감한 용장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용기로만 하는 게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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