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㉒

 
좌수사 이순신은 이 관문을 보고 풍신수길이 출병을 했음을 직감했다. 곧 여러 장수에게 5읍6진에 군사와 병기 병선을 정돈할 것을 명하고, 즉각 출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등 각처에 이 사실을 알릴 것을 지시했다. 영웅이 세상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여산인礪山人이었다. 일본이 침입했다는 경보를 들은 송상현은 곧 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성李彦誠, 양산梁山 군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통지해 구원을 청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14일에 동래성에 들어오고 좌병사 이각은 조방장 홍윤관洪允寬, 울산군수 이언성과 총 7000병마를 거느리고 같은 날에 도착해 합 2만여의 병마가 되었다. 부산첨사 정발이 전사하고, 좌수사 박홍이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좌병사 이각은 이 경보를 듣더니 부사 송상현을 보고 “여보, 동래영감! 나는 일도의 대장인즉 성밖에서 도에 있는 여러 장수를 지휘할 것이니 영감은 성을 지키시오”라며 군사를 돌려 소산역蘇山驛으로 나갔다. 송상현은 “같이 성을 지켜 나라를 위해 함께 죽읍시다”고 말했지만 이각은 듣지 않고 성을 나가 버렸다. 사실 좌병사 이각은 부삼첨사 정발 같은 맹장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는 잔뜩 겁이 나서 동래성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이각은 이런 탄식을 거듭 내뱉었다. “나는 어쩐 일로 태평시대에 병수사나 대장노릇을 못하고 이런 난세를 당하였는가.”

▲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원균이 보낸 공문을 본 직후 풍신수실이 거병했음을 눈치챘다. [사진=더스쿠프]
좌병사가 달아나자 동래부사 송상현이 주장이 됐다. 울산군수 이언성을 좌위장 삼아 동문을, 양산군수 조영규를 우위장을 삼아 서문을, 조방장 홍윤관을 중위장을 삼아 북문을 각기 지키게 하고 자기는 남문을 지키기로 했다. 4월 14일 일본군이 남문 밖 연병장에 개미떼 모양으로 진을 치고 목패를 성중에 던졌다. 그 목패에는 “명을 토벌하고자 하니 귀국은 길을 빌려주기 원한다”고 쓰여 있었다. 송상현은 부하를 시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말을 큰 목패에 써서 성위에 세우고 포를 쏴댔다. 하지만 송상현이 충의기개의 열사였다고 하나 장수감이 아닌 학자선생이었다.

15일 아침에 일본군은 큰 인형을 만들어 동문 밖 광장에 세웠다. 높이가 100척에 달하는 인형을 본 성안 군사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일본군은 조총을 난사하며 운제(성을 공격할 때 썼던 높은 사다리)를 성 동북쪽에 걸고 개미떼처럼 넘어오며 칼을 휘둘렀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적군에게 붙들렸다. 일본군은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이언성을 앞세우고 성내의 길을 인도하라 하였다.

북문을 지키던 조방장 홍윤관은 적군이 동문을 무너뜨리고 성내로 들어와 남문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군사를 돌려 막았다. 홍윤관은 맹렬히 싸워 적에게 많은 타격을 입혔지만 결국 탄환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홍윤관의 군사가 전멸을 당한 뒤 일본군은 그 시체를 밟고 넘어 객사 앞으로 나왔다. 일본군의 무례함은 끝이 없다.

좌병사 이각 몰래 ‘도주’

일본군은 36장군의 대세력이 모두 모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자기 부하 2000명을 몰고 객사 앞에서 시가전을 시작해 단병접전을 펼쳤다. 하지만 적의 총알을 맞은 조영규는 비장하게 전사하고 부하들도 전멸이 되다시피 했다. 이제 남은 건 남문의 본진뿐이었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지만 동래부사 송장현은 비장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등과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성의 함락을 막지는 못했다. 송상현은 ‘죽더라도 나라의 신하되는 절개와 예의를 잃지 않으리라’고 말하며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껴입고 북향 사배한 뒤 호상(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아 최후까지 전투를 독려했다.

이윽고 일본군이 돌입해 송상현을 칼로 치려 했지만 송상현은 태연부동했다. 일본군 중에 평조신 등이 달려드는 군사를 물리치고 송상현에게 피신하기를 권고하였다. 이는 지난해 사신으로 왔을 때 송상현의 예의 밝은 후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송상현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들었던 부채에 글 몇구절을 써서 부친 송흥복宋興復에게 부쳤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에 갇힌 듯 적군에 포위됐는데 다른 진에서는 베개를 높이 하여 잠만 자고 있습니다. 군신의 의리가 무거우니 부자의 은정은 가벼이 해야겠습니다(孤城月暈 列鎭高枕 君臣義重 父子恩輕)”

 
부친에게 보내는 결별사였다. 송상현은 일본 장수의 칼을 빌려 동래성 남문루에서 순절하였다. 송상현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비장 송봉수, 김희수와 양리良吏 송백宋伯, 그리고 그 집 하인 신여노申汝櫓도 항복하지 아니하고 주장의 곁에서 전사했다. 일본 장수 종의지 평조신 등이 송상현의 시체를 거둬 동문밖에 매장하고 송상현의 소실 김섬金蟾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잡혀갔다. 동래성에서 순절한 충의 제공은 천곡 송상현,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규, 비장 송봉수, 김희수, 양리 송백, 하인 신여노의 무리였다.

그 무렵,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문(상호 간에 현안을 묻고 내용을 서로 통하기 위해 주고받는 공문서)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가덕加德첨사 전응린田應麟과 천성天城만호 황정黃珽의 급보를 접하건대 4월 12일 신시에 일본대선 90여척이 부산항을 향하여 나왔다. 세견선일지도 모르지만 90여척이 배가 함께 온다는 것은 그 연유를 알 수 없어 심상치 아니한 듯도 하다.”

좌수사 이순신은 이 관문을 보고 풍신수길이 출병을 했음을 직감했다. 곧 여러 장수에게 5읍6진에 군사와 병기 병선을 정돈할 것을 명하고, 즉각 출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라감사, 병사, 우수사 등 각처에 이 사실을 알릴 것을 지시했다. 4월 16일에 경상감사 김수의 관문이 순신에게 왔다. “금월 13일에 일본 병선 400여척이 부산포에 내박하였다.” 또 경상우수사 원균의 관문이 왔다. “부산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되고 병사 이각과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거느리고 동래성 뒤까지 왔다가 적을 겁내 회군하였다.” 4월 22일에 또 경상감사 김수의 관문이 왔다. “양산군도 함락이 되고 적군이 매우 강성하여 대적할 수가 없다. 영공은 전함을 인솔하고 와서 구원하라.”

풍신수길 출병 직감한 순신

이런 관문을 연속해서 받은 이순신은 마음이 답답하여 칼을 빼어 들고 서안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더구나 병사니 수사니 하는 무리들이 일도一道의 대장으로서 군사를 끌고 동래성 뒤까지 갔다가 적세의 치장(사나운 위세)을 보고 달아난 것이며 적이 상륙한 지 4~5일도 채 지나지 않아 동래, 양산, 김해金海 같은 거진이 무너진 것에 통분함을 금치 못했다.

순신은 곧 이런 내용의 장계를 써서 올렸다. “적세가 이처럼 치장하여 거진들이 연달아 함락되고 내지까지 범하게 되니 이렇게 통분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간담이 찢어지는 듯하여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하된 자가 누구나 마음과 힘을 다하여 국가의 수치를 씻기를 원치 않는 자 없으니 곧 경상도로 출전하여 함께 싸우라는 명령을 엎드려 기다립니다. 곧 출병하지 않으면 앉아서 기회만 잃어버릴 듯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 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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