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전략적 CSR 보고서

[일러스트=남동윤 화백․backgama1@naver.com]
[일러스트=남동윤 화백․backgama1@naver.com]

글로벌 화장품 기업 ‘로레알’. 이 영민한 기업은 화장품 포장지에 ‘점자’를 표기해 시각장애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에 전략을 심은 거다. 우리 기업들은 어떨까. 애먼 곳에서 생색이나 내고 있는 건 아닐까. 국내 30대 그룹의 ‘2014 CSR 보고서’를 공개한다. 그룹별 CSR 활동의 인지도ㆍ호감도ㆍ적합도를 평가했다. 코리아CSR컨설팅그룹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사례❶ | 프리드먼의 사익]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자유방임주의자’였던 그는 기업의 책임을 ‘이익 극대화’에서 찾았다. 주주가 아닌 이해관계자를 배려하는 기업활동을 파괴적으로 이해한 거다. 프리드먼의 눈에 비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활동은 쓸데없는 짓에 불과했다. 하지만 기업의 원형原形을 다르게 본 이도 있었다.

[사례❷ | 제이콥스의 공익] 시계추를 1896년으로 돌려보자. 프리드먼(1912년생)이 태어나기 16년 전이다. 당시 미국 뉴저지주엔 ‘에이 피 스미스’라는 회사가 있었다. ‘고압소화전 시리즈’로 이름을 날린 곳이었는데, 요즘 말로 ‘착한기업’이었다. 정기적 기부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기 때문이다.

골치 한번 안 썩었을 것 같은 이 회사도 곤경에 처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기부 때문이었다. 1951년 회사 이사회가 미 프린스턴대에 1500 달러를 기부한 것을 두고 주주들이 반기를 들었다. 프리드먼의 말처럼 “주주 돈을 왜 이익 극대화에 쓰지 않느냐”는 이유에서였다.

논란은 기업과 상아탑의 담장을 넘어 법원으로 튀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재판장 ‘제이콥스’는 승리를 확신한 주주들을 낙담케 하는 판결을 내렸다. “… 문제가 된 기부행위는 신성한 대학에 한 것이다. 금액이 적정할 뿐만 아니라 법적 테두리 안에 있다. 공공복리도 증진된다….”

제이콥스는 유명한 말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 역사적으로 기업이 등장한 이유는 공익에서였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변화를 거치면서 점차 사적 이익을 추구하게 됐다. 회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인식하고 장기적 안목으로 추진하는 행위를 (주주라 할지라도) 막아선 안 된다….” 기업의 원형은 공익公益이고, 이를 훼방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다.

 

멋진 말이지만 조금은 혼란스럽다. 기업의 원형이 공익이라면 사私기업과 공公기업의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다. 냉엄한 재계의 현실과도 간극이 있다. 현대 기업에서 ‘CEO직 유지’를 가늠하는 변수는 공익이 아니라 실적이다. 휴렛팩커드(HP) 전 CEO 칼리 피오리나(1999년 7월~2005년 1월)의 장기집권체제가 ‘실적악화’ 때문에 무너진 건 대표적 사례다.

이런 맥락에서 ‘기업의 원형은 공익’이라는 제이콥스의 말은 한갓지고, ‘기업의 목적은 이익 극대화’라는 프리드먼의 주장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말이 궤변이라는 건 아니다. 모두 일리가 있고, 설득력이 충분하다. 프리드먼의 말처럼 기업에 실적(이익)은 중요한 가치다. 제이콥스의 주장대로 기업은 공익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21세기 경제정글에서 살아남고 싶다면 실적과 공익, 이 두마리 토끼를 노련하게 붙잡을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실적공익을 동시에 좇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단순하게 말할지 모르겠다. “CSR? 뭐가 어려운가. 눈 한번 질끈 감고 매출의 일정 부분만 사회에 기부하면 끝 아닌가. 좋은 슬로건 하나만 있어도 대중은 속아 넘어간다.” 생색내기식 CSR 활동으로 충분하다는 거다.

“기업의 원형은 공익, 훼방 안 돼”

하지만 요즘 대중과 소비자는 생각보다 영민하고 눈치가 빠르다. 기업의 CSR 활동이 생색내기인지, 혹은 꼼수인지 금세 알아차린다. CSR에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 붓는 한국 대기업이 존경을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CSR 활동 상당수가 크고 작은 사건을 덮으려는 ‘무마용’이라서다.

이런 불신은 더스쿠프와 코리아CSR컨설팅그룹이 공동으로 실시한 ‘2014 CSR 서베이’ 결과에서도 잘 나타난다. 코리아CSR컨설팅그룹 연구원, 서울대 지속가능경영연구회 학생, 인하대 지속가능경영연구소 학생, 브랜드 컨설턴트, 스타트업 CEO 등 80명을 대상으로 7월 3일~9일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전체의 93.75%가 “CSR 활동은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의 CSR 활동이 충분하다”고 답한 이는 5%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20%는 “매우 부족하다”, 43.75%는 “부족한 편”이라고 속내를 밝혔다. 국내 대기업의 CSR 활동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얘기다.

더 놀라운 통계는 이제부터다. 이번 설문조사의 대상은 30대 그룹(공정거래위원회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2014년 4월 1일 기준)이었다. 더스쿠프는 30대 그룹 측에 ‘가장 잘했거나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하는 CSR 활동을 각각 2개씩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방식으로 CSR 활동 60개(30대 그룹×CSR활동 2개)를 수집했고, 온라인 서베이를 진행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30대 그룹이 자신있게 꺼낸 ‘CSR 카드’였지만 60개 활동의 평균 인지도는 16.50%에 불과했다. 10명 중 8명 이상은 이들의 CSR 활동을 전혀 몰랐다는 거다.

기업은 어찌해야 할까. 신강균 한세대(광고홍보학) 교수는 자신의 저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 10계명」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 지역이나 소비자에게 유익한 주제를 찾되, 반드시 자기 기업의 비전, 경영이념과 연관되는지를 짚어보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종혁 광운대(미디어영상학) 교수는 “기업의 CSR 활동은 지속가능한 이익창출과 연계되는 방향으로 전개해야 한다”며 “기업의 본질ㆍ철학에 적합한 CSR을 추진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10명 중 8명 모르는 대기업 CSR 활동

기업의 본질에 걸맞은 ‘전략적 CSR(적합도)’을 꾀하라는 말인데, 사례는 많다. 글로벌 화장품 기업 로레알이 스킨케어 제품의 포장지에 점자를 표기한 것, 인도은행 ICIC가 영세농민을 위해 ‘저가 마이크로 보험’을 개발한 것은 좋은 예다. 로레알과 ICIC는 이렇게 소소한 CSR을 통해 신규고객을 확보하고 틈새시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전략적 CSR이 사회문제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기업의 실적에도 도움을 준 셈이다.

 
▲ 전략적 CSR은 기업의 무형적 가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사진 왼쪽은 적합도 1위 CSR 활동에 오른 KT의 IT서포터즈. [사진=뉴시스] 화장품 기업 로레알은 점자 표기 방식으로 틈새시장을 발굴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적합도를 인정받은 CSR 활동은 대부분 인지도호감도가 높았다. 전략적 CSR이 기업의 무형적 가치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거다. 쪽방촌 거주자장애인 등 정보소외계층에 IT교육서비스를 제공하는 KT의 ‘IT서포터즈’는 60개 CSR 중 적합도 1위(88.75%)에 올랐는데, 인지도(38.75%3위)호감도(60%4위)에서도 좋은 점수를 받았다.

한 응답자는 “통신과 IT의 교집합을 잘 활용한 CSR 활동”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전력의 ‘전기요금 청구서 활용 미아찾기’는 적합도(81.25%2위)인지도(61.25%1위)호감도(40%4위)에서 고른 평점을 받았다. 1993년부터 시행한 이 CSR 활동은 고객에게 배달되는 전기요금 청구서에 미아사진을 게재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총 109명의 미아를 부모의 품에 돌려보내는 성과를 거뒀다. 

갈수록 넓어지는 CSR의 범위

그렇다고 모든 ‘전략적 CSR’이 대중에게 호감을 주는 건 아니다. 적합도는 높았지만 호감도가 시원치 않은 CSR 활동도 많았다. 코레일의 ‘해피트레인’이 대표적 사례다. 사회적 약자에게 기차여행을 제공하는 이 CSR 활동은 적합도(78.75%)에선 4위에 올랐지만 호감도(46.25%)에선 20위에 그쳤다. 민영화를 둘러싼 노사간 이전투구, 노동자 대량해고 등 악재가 호감도에 나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투명한 경영체제 구축’ ‘임직원의 노동권 보호’라는 CSR 활동에 실패한 게 부메랑으로 되돌아왔다는 얘기다.

이 결과는 전략적 CSR이 더 이상 ‘사회공헌’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투명한 경영체제 구축(3.91점), 윤리부패방지(4.23점), 하청업체와의 동반성장(3.95점), 임직원 인권노동권 보호(3.83점)에도 CSR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 괄호안의 숫자는 설문조사 응답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CSR의 가치를 ‘5점 만점’으로 환산한 것이다. 5점에 가까울수록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숱하게 많은 CSR 변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리스크를 쉽게 풀어 설명한 글이 있다. 사회책임투자 리서치 전문회사 ‘서스틴베스트’의 류영재 대표가 한 언론에 기고한 ‘기업 사회책임의 진영논리’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일부 내용을 훑어보자. “…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조업시간 저하, 출하량 감소를 야기하고 그것은 매출액 감소로 연결된다. 소비자로부터 대량 리콜요구가 발생하면 그것은 고객 이탈과 매출액 감소의 적신호다. 협력사를 쥐어짜서 납품가격을 낮추면 단기적으로는 매출이익률은 증가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납품불량으로 이어져 재앙의 부메랑이 될 수 있다. 환경사고를 남발하면 각종 입법규제로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 산재사고는 기업에 유무형적 손실을 가져다 준다. 이 모두가 CSR 이슈들이다. 이쯤 되고 보면 CSR 소홀은 곧 재무위험이자 기업가치 훼손이다….”

국내 기업, CSR 변수 제대로 통제해야

문제는 CSR 이슈를 컨트롤할 줄 아는 국내 기업이 드물다는 점이다. 이번 설문조사 결과를 봐도 그렇다. ‘30대 그룹이 CSR의 주요 가치들을 잘 이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평균 2.52점(5점 만점)을 줬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50.40점, 낙제점에 가깝다. 사회공헌(3.03점)만 3점을 넘었을 뿐 투명한 경영체제(2.76점), 환경보호관리(2.68점), 보건안전(2.40점), 윤리부패방지(2.31점), 임직원 인권노동권 보호(2.30점)는 시원치 않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하청업체와의 동반성장’은 가장 낮은 2.05점을 받는데 그쳤다. 최근 주춤하는 ‘경제민주화’의 기치를 다시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즘 기업, 어찌 됐든 어깨가 참 무겁다. 수익창출에 사회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전처럼 포장만 그럴싸하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억울할 것까지 있겠는가. 대중의 속을 썩이는 사회문제가 해결되면 시장에 활력이 감돌게 마련이다. 전략적 CSR에 투자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CSR의 ‘아름다운 선순환’, 이젠 기업이 만들어갈 때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윤찬ㆍ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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