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몽구 부전자전 DNA

▲ 지난해 9월 충남 당진시 현대제철에서 열린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제3고로 화입식’ 행사에 참석한 정몽구 회장이 제3고로의 첫 가동을 위해 불을 지피는 ‘화입火入’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몽구(76)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통 큰 베팅’이 연일 화제다. 서울 삼성동 한전 본사부지 입찰가로 10조5500억원이란 천문학적 숫자를 제시해 낙찰 받은 것을 두고 하는 말들이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랄까. 현대 창업자이자 정 회장의 선친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통 큰 결단 DNA’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9월 18일 한전 본사부지 입찰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낙찰가가 감정가(3조3346억원)의 3배, 입찰예상가(5조원 안팎)의 2배를 넘는 예상 밖의 큰 액수였기 때문. 경쟁자 삼성측은 오히려 조용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놀랐다’는 속내가 묻어났다. 잘못된 정보로 고가입찰을 유도한 현대차 입찰 관계자가 문책을 받을 것이란 얘기도 흘러 나왔다. 현대차 직원들마저 “너무 과한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낙찰 발표일(9월 18일) 현대차 주가가 9.17% 떨어져 투자자들의 속을 태웠다. 증권가 일부에서는 ‘승자의 저주가 걱정된다’며 고가 입찰에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정몽구 회장의 첫 반응에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랐다. 그는 정말 담대했다. “금액이 너무 많은 게 아니냐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렇지만 사기업이나 외국기업이 아니라 정부한테 사는 것이어서 (금액을) 결정하는 데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며 치고 나온 것. 입찰에 참여한 임직원들을 불러 “다들 고생이 많았다”고 격려한 뒤 한술 더 떠 “현대차의 100년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투자인 만큼 차질 없이 추진되도록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애초 수익성만을 따져 입찰에 참여한 게 아니라며 고가 매입 논란에 쐐기를 박은 셈. 현대차의 100년 후와 국가 전체가 누리게 될 경제적 부가가치 등을 종합해 결정한 만큼 금액으로 환산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식이였다.

일부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황제 경영자처럼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 이해관계자들에게 많은 누를 끼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재계 관계자는 현대가家 특유의 ‘통 큰 결단 DNA’를 이해해야만 이번 입찰 결과가 이해된다고 조언한다. 이번 일을 통해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기업인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통 큰 결단 DNA’가 아들 정몽구 회장에게 고스란히 이어진 것 같아 놀랍다는 반응마저 나오고 있다.

고가 입찰 논란에도 MK는 담대

부전자전임에 틀림없다는 얘기다. 알다시피 정주영 명예회장의 60년 기업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통상의 기업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길을 걸었다. 거침없었다고나 할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개척정신과 긍정적 마인드, 정ㆍ재계를 넘나든 그의 행보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당시 금기시됐던 북한을 넘나들고 옛 소련을 왔다 갔다 했다.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아들 정몽구 회장에게 ‘통 큰 결단 DNA’를 물려 준 정 명예회장의 사업 이력서에는 숱한 ‘대형 결단’케이스들이 올라 있다[그래픽 참조].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농부 집안의 6남2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1940년 아도서비스란 자동차 정비업소를 인수해 기업 경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한국 굴지의 기업군인 현대그룹을 축성하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 준 흉내 내기 힘든 ‘통 큰 결단’ 5가지를 사업 순으로 살펴본다. 전쟁 중이던 1952년(37세), 부산 UN군 묘지 단장 공사 수주에 얽힌 일화다. 당시 한겨울이었는데도 미군 측은 묘지를 푸른 잔디로 단장하는 조건을 달아 입찰에 부쳤다. 아이젠하워가 방한해 묘지를 둘러본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가 봐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 회장은 며칠 뒤 여러 대의 트럭에 새파랗게 자란 보리를 실어와 묘지를 단장하는 정면승부에 나서 이 일을 성사시킨다.

두번째는 1971년(56세) 일로 국내 기업들이 막 중공업에 투신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 그는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를 들고 유럽에 차관을 얻으려 다녔다. 조선소를 짓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영국 바클레이 은행 롱바톰 회장을 만나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 주며 설득해 차관을 얻어낸다. 세번째는 1984년(69세) 서산방조제 물막이 공사에 얽힌 결단이다. 당시 초속 8미터의 빠른 물살 때문에 마지막 300미터 구간을 남겨두고 공사가 멈춰 버린 것. 그는 해체해 쓰려고 사뒀던 폐유조선(길이 322미터)을 끌고 와 해당 구간을 틀어막은 채 공사를 끝내 국내외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나머지 두가지 사례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이었다. 1992년(77세) 그는 그룹 경영을 동생 고 정세영 회장과 전문경영인 이명박 사장(이상 당시 직함) 등에게 맡기고 정계에 투신한다.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제14대 국회의원(비례대표)에 당선된 데 이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도 출마한다. 3위로 낙선하지만 선거 내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경부고속도로를 2층으로 만들겠다’ ‘반값 아파트를 공급하겠다’는 등의 당시 구호가 떠오른다. 1998년(83세) 그는 한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굵직한 결단을 또 한번 내린다. 소떼(소위 통일소)를 몰고 판문점을 통해 두차례 방북 길에 오른 것이다. 6월에 500마리, 10월에 501마리를 몰고 가는 이벤트는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정일과 경협을 논의했고, 나아가 금강산 관광사업의 물꼬를 텄다.

정 명예회장은 슬하에 8남1녀를 두었다. 정몽구 회장은 그의 2남이다. 1982년 4월 당시 인천제철 사장이던 장남 몽필씨가 고속도로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2남 몽구 회장은 그동안 세인들에게 장남으로 비쳐 왔다. 정 회장은 아버지 정 명예회장이 한창 활동할 시기에는 주로 현대정공 경영을 맡아했다. 1996년~98년 사이 현대그룹 회장도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현대자동차그룹을 맡아 현대에서 분가해 16년째에 이른다.

아버지 빼닮은 공격경영

정 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선친 정주영 명예회장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시대상황이 다르고 부자지간이라 해도 스타일이 다를 수 있기 때문. 정 회장은 정공 시절만 해도 비교적 드러나지 않은 가운데 기업경영을 해온 것으로 비쳤다. 하지만 부친이 돌아가고 자동차그룹을 맡은 이래로는 기업주로서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내보여 왔다. 정공 시절과는 확연히 달랐다. 특히 ‘통 큰 결단’이란 면에서는 다른 형제들보다 선친의 DNA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평가됐다. 

1998년(60세) 법정관리 중이던 기아자동차를 인수한 일이 우선 꼽힌다. 현대차마저 부실해질 것이란 우려를 불식시키고 1년여 만에 흑자전환을 이뤄낸다. 이어 1999년(61세) 미국 시장 공략이란 승부수를 던졌다. ‘10년ㆍ10만 마일 무상보증’을 내걸고 미국 공략에 나섰던 것. 앨라배마 공장 건설을 밀어붙여 점유율 확대에도 성공한다. 2006년(68세) 꿈에도 그리던 일관제철소를 준공한다. 민간 최초였고 선친 때부터 학수고대했던 일을 자신이 비로소 이뤄내 자부심이 컸다. 2010년(72세)엔 현대家 모태기업인 현대건설을 인수한다. 건설경기 부진 속에서도 인수해 마침내 주요 계열사의 하나로 키워냈다. 현대家의 사실상 장남 지위를 되찾으려 했다고나 할까. 이번 한전 본사부지 낙찰건도 이들 부자의 통 큰 결단의 연속선상에서 보면 이해되고도 남을 일로 보인다.
김은경 더스쿠프 객원기자 kekisa@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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