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사면, 효과 있나

‘기업인 사면’ 논란이 뜨겁다. 죄를 지은 기업인의 형벌을 면제해주면 진짜 ‘경기회복’에 도움이 되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재벌총수 사면 후 고용을 늘린 기업은 극히 드물다. ‘기업인 사면’의 효과는 죄를 지은 기업인 스스로 잘못을 성찰하고, 그 죄를 씻는 차원에서 고용 등을 늘릴 때 나타난다. 철만 되면 추진하는 사면은 ‘특권의식’만 심어줄 뿐이다. 사면은 집권자가 주는 ‘선물’이 아니다. 죄를 없애주는 대신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하라는 국민의 엄중한 ‘경고’다. 기업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사면赦免’일까 ‘사면辭免(자리에서 물러남)’일까.

▲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기업인 사면 관련 발언을 하자, 정재계 안팎에선 청와대와 사전교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가 파다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대기업집단 총수일가의 불법ㆍ사익편취행위를 근절해 경제적 약자를 든든하게 지켜주고, 잘못된 시장 질서를 바로잡겠다. 총수 일가 불법행위에 대한 법집행이 국민의 법 감정과 형평성에 어긋나는 사례가 많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 등에 대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도록 형량을 강화하고, 대기업 지배주주ㆍ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해서는 사면권 행사를 엄격히 제한할 것이다. 일감몰아주기 등 총수일가의 부당내부거래 금지규정을 더욱 강화하고 부당내부거래로 인한 부당이익은 환수하겠다.” 2012년 12월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집 150쪽에 적힌 내용을 서술형만 덧붙여 그대로 옮긴 것이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공약집에서 밝힌 공약을 지키지 않은 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런 해명도 없이 지키지 않거나 재해석하거나 혹은 정책에서 빼버린 것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기업인 사면’이 실제로 이뤄져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기업인 사면’ 논란은 박 대통령의 손발이라 할 수 있는 황교안 법무부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입에서 “기업인들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비롯됐다. 황 장관은 지난 9월 24일 “기업인이라고 가석방 대상에서 배제하는 불이익을 줘선 안 된다”며 “불법 수익을 모두 환원하는 등 가석방 요건을 충족하고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에 공헌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는다면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최 부총리는 다음날 “황 장관의 발언에 공감한다”며 배턴을 이어받았다.

물론 그는 사면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한편에선 “사면이라는 말과 가석방은 다르다”며 “형법상 보장된 가석방 권리를 기업인이라고 해서 배제해선 안 된다는 건데 뭐가 문제인가”라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일반 수감자에겐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려운 가석방이나 사면의 권리를 기업인들은 때만 되면 누려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공연히 나오는 게 아니다. 최 부총리, 황 장관의 발언에 청와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핵심참모라는 이들이 박근혜의 복심腹心을 읽지 않은 채 이런 얘기를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실제로 정재계 안팎엔 청와대와 사전교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얘기가 파다하다. 

횡령ㆍ배임, 양형 기준에 미달한 판결

‘기업인 사면’ 논란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언젠가 한번은 튀어나올 주제였다. 이전 정부들도 철만 되면 기업인을 사면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더 이상 유야무야 넘겨선 안 된다. 더 이상 ‘법치의 잣대’가 흔들려선 안 된다는 공감대도 충분히 형성돼 있다. 박 대통령이 공약집을 통해 “재벌총수라고 봐주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많은 기업인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아왔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재벌총수들의 ‘형량공식’으로 받아들여졌을 정도다. 실제로 재벌총수들의 수감기간은 1년이 채 안 된다.

▲ 대기업 총수들의 범죄에 대해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건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다.[사진=뉴시스]
분식회계로 2006년 징역 2년6월을 선고받은 김윤규 전 현대건설 대표는 수감기간이 1개월 27일에 불과했다. 분식회계로 2008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2개월 18일 만에 사면됐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횡령과 배임 등으로 2008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2개월 13일 만에 풀려났다. 최근 최태원 회장이 대기업 총수로선 최장기간(10월 3일 기준 610일)을 복역하면서 공식이 깨졌을 뿐이다.

지난 2월 대검찰청이 발표한 ‘양형백서’를 봐도 마찬가지다. 이 백서에는 살인죄, 강도죄, 성범죄, 뇌물죄, 횡령ㆍ배임죄 ‘5대 범죄’에 대한 법원 선고 형량이 비교 분석돼 있다. 양형기준이 재판에 처음 적용된 2009년 7월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 선고된 1ㆍ2심 판결문 6000여건 중 양형기준 준수 비율은 살인죄(81.2%), 성범죄(70.9%), 강도죄(63.0%) 항목이 높았다. 반면 뇌물죄(9.0%), 횡령죄(32.0%), 배임죄(26.0%)의 준수 비율은 턱없이 낮았다. 말하자면 법이 ‘화이트칼라 범죄’를 저지르는 돈 있고, 뒷배경 있는 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더구나 대기업 총수들은 사면된 이후 ‘경영일선’에 아무렇지도 않게 복귀했다. 다시 죄를 지어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똑같이 받았다. 그들이 지은 죄가 ‘사면’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기업인 사면이 사회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역대 정부가 기업인 사면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도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통한 경제 살리기’였다. 하지만 대기업 총수의 사면ㆍ복권 이후 고용과 투자가 눈에 띄게 늘었는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재벌순위 톱3에 해당하는 삼성그롭, 현대차그룹, SK그룹의 사례를 검토해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세금포탈과 배임으로 2009년 8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가 같은해 12월에 특별사면됐다.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로, 정몽구 회장은 횡령ㆍ배임으로 2008년 5월과 6월에 똑같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그해 8월에 사면됐다. 세곳의 그룹 총수들이 사면된 후 고용은 얼마나 증가했을까.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사면 이듬해 고용을 1만명 늘렸을 뿐 다른 기업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SK는 되레 1000여명이 줄었다. 결국 ‘경제 살리기’는 기업인 사면을 위한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기업인 사면 이후 고용 늘지 않아

법 집행을 엄정하게 하는 것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기본이다. 이는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기는커녕 권력과 자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면 법치주의가 바로 서겠는가. ‘재벌총수 사면’의 정당성이 입증되려면 뼈아픈 자기반성과 경제효과가 분명히 나타나야 한다. 사면 직후 경영일선에 보란듯이 복귀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위세를 뽐내는 것도 법과 시스템으로 막아야 한다.
사면赦免의 사전적 정의는 ‘죄를 용서해 형벌을 면제하다’이다.

 
하지만 사면辭免의 뜻은 완전히 다르다. ‘맡아보던 일자리를 그만두고 물러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다. 지금 필요한 건 ‘기업인 사면’이 아니다. 재벌총수 또는 유력 CEO가 사면되면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는 경제학적으로 입증된 바 없다. 비리를 저지른 기업인 스스로 잘못을 성찰하고, 그 죄를 씻는 차원에서 고용 등을 자발적으로 늘릴 때 ‘기업인 사면’의 진짜 경제효과가 나타난다. 사면은 선물이 아니라 의무다. 지금 죄를 지은 기업인에게 필요한 건 ‘사면赦免’이 아니라 ‘사면辭免’일지 모른다.
김정덕ㆍ박용선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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