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㉞

옥포ㆍ적진포 등 각처에서 패전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은 분을 참지 못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상ㆍ전라ㆍ충청 삼도의 제해권을 얻으려 했다. 그게 패전의 수치와 원한을 갚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순신은 이런 수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참전해달라는 요청에도 순신은 군사만 정비했다.

 

일본군 배에서 죽을 뻔했다는 백련의 말을 듣고 순신은 눈물을 흘렸다. 이런 경험을 한 아이가 백련이 하나만 아닌 것 같아서였다. 순신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 아이 말을 들은즉 이렇게 불쌍한 아이가 얼마나 많을까 싶소”라고 물었다. 녹도만호 정운이 “죽기로 싸우려 하오”라고 소리 치자 제장들도 “우리는 죽기로 싸우기를 결심하였소”라고 화답했다.

순신은 제장에게 “공들의 성충보국하려는 마음이 이만하니 걱정 없소”라며 “맹세코 영남 해상의 적들을 소탕합시다”라고 말했다. 다시 나아가 싸우자는 뜻을 암시한 거였다. 그리고 백련이 외에 적에게 잡혀갔던 아이들을 순천ㆍ보성 등 각 수령에게 맡겨 잘 거두어 기르라고 분부하였다. 순신은 창원ㆍ웅천ㆍ거제ㆍ진해ㆍ칠원漆原ㆍ고성ㆍ사천泗川ㆍ진주ㆍ곤양ㆍ남해 등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아이를 이끌며 난을 피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싸움을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는 너희들을 안전한 지대로 옮겨 주마’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가슴을 조였다.  그러나 순신은 일개 수사. 백성을 도와줄 관권이 없었다. 그래서 전라감사 이광에게 통지해 양미를 보내어 이 많은 백성이 굶어 죽지 않도록 도와주길 간청했다. 순신이 조정에 올린 승전한 장계 중에도 이런 구절이 있었다.

“죽기도 많이 하고 노략 창탈도 많이 당해 살아남은 백성이 적습니다. 신臣이 연해로 돌아다녀 보니 지나는 산곡마다 피난하는 백성이 있고, 신의 군대를 울고 부르짖으며 따라오는 백성이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이는 적의 종적을 가르쳐 주는 이도 있어 그 측은함이 차마 두고 가기 어려웠습니다. 배에 태워 데리고 가고 싶으나 그런 백성이 많을뿐더러 병선에 백성을 많이 실어서 전쟁할 때에 불편이 있어 돌아오는 길에 데려갈 테니 각각 숨어 있으라고 달랬습니다.

그 뒤에 문득 들으니 성상이 한성을 버리시고 서관으로 몽진하셨단 놀라운 통기를 받고 급급히 돌아왔으니 그 애련한 정이 오히려 잊을 수 없습니다.” 순신은 농업ㆍ어업ㆍ목축ㆍ공업을 진흥시킬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관할 내에 있는 돌산도(전남 여수시 돌산읍)ㆍ거문도(전남 여수시 삼산면) 등지에 피난민을 옮겼다. 그렇게 순신이 군사를 더 모집하고 병기를 정돈하는 동안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적선이 왔으니 도와 달라”는 청병이 왔다.

백성의 처절한 삶에 눈물
 

순신은 출장을 미루고 군사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러나 순신은 원균의 말을 모두 믿지 않았다. 거짓말이 많은데다 약속을 지킨 일이 한번도 없음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원균의 헛된 경보를 곧이곧대로 믿고 군사를 출동시켰다가 적선이 없으면 군국대사를 그르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사또, 적선이 곤양까지 왔다 하오. 어서 행군합시다”라며 정운, 어영담 등 충용한 부하제장들이 간청할 때마다 순신은 이렇게 답했다. “풍신수길이 전날의 패배를 보복하기 위해 필연코 대함대를 보낼 것 같소. 군을 경솔히 움직여선 안 되며, 또 경거망동하면 신망을 잃는 것이오.”

그래서 순신은 탐보선을 내놓아 정탐만 했다. 순신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옥포ㆍ적진포 등 각처에서 패전 소식을 들은 풍신수길의 본영에서는 분을 참지 못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상ㆍ전라ㆍ충청 삼도의 제해권을 얻으려 했다. 그게 패전의 수치와 원한을 갚는 길이라 여긴 것이다. 원래 수길의 계획은 소서행장ㆍ가등청정ㆍ흑전장정을 선봉으로 삼아 한성ㆍ평양ㆍ함흥ㆍ경성을 차례로 공략하고, 구귀가륭ㆍ등당고호ㆍ가등가명ㆍ협판안치 등 수군제장으로 하여금 전선 500여 척과 수군 10만을 거느리고 수로작전으로 경상ㆍ전라ㆍ충청ㆍ경기ㆍ황해ㆍ평안의 연안을 공략하는 거였다.

이를테면 ‘수륙병진’으로 조선을 석권하고 명나라에 침입하자는 게 전략이었다.  육군은 수길의 계획대로 전과를 얻었다. 정발ㆍ송상현ㆍ박진ㆍ이일ㆍ신립ㆍ김명원 등 제군을 격파하고 무인지경같이 쳐들어가 한성ㆍ개성ㆍ평양ㆍ함흥ㆍ경성을 뜻대로 점령했다. 하지만 수군은 달랐다. 선봉ㆍ별동대가 옥포ㆍ적진포 등 각처에서 조선 수군의 명장 이순신의 솜씨에 부서지고 말았다. 수길이 “일본은 수국水國이거늘 수전水戰이 이순신에 미치지 못하다니”라며 탄식하면서 ‘이순신 격파’를 지시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순신도 적의 정세를 상세히 탐지한 결과, 수길의 심산을 알고 있었다. 순신이 “이번에 오는 싸움은 지난번처럼 단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다. 전일에 깨뜨린 적의 함대는 선봉대요, 이후에 오는 것은 주력함대라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옥포 등 싸움에서 손쉽게 승전한 장졸들은 적을 깔보는 마음이 생겨 싸우기만 재촉하는 이가 많았다. 순신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군사를 준비시킨 건 이 때문이다. 준비의 힘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이것을 아는 이는 이순신 한 사람뿐인 것 같았다.
 

▲ 순신은 출장을 미루고 군사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큰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측했기 때문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이 무렵, 일본 수군 소부대가 경상도 해안을 돌며 마을에 불을 놓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목적은 약탈이 아니었다. 이순신의 수군에게 도전적 행동을 취한 거였다. 원균은 졸지에 이 적의 소함대를 만나 피하려야 피할 수 없게 됐다. 부득불 이운룡, 기효근을 선봉을 삼아 막으려 했지만 기효근이 겁을 먹어 달아났다. 원균 역시 황급히 도주하였다.

독오른 풍신수길, 대반격 준비

이운룡ㆍ우치적ㆍ이영남의 무리가 고립된 군사로 싸웠지만 이내 후퇴했다. 혼자 힘으로 일본군을 당할 수 없었던 원균은 부하를 이끌고 노량으로 쫓겨 왔다. 이운룡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원균에게 간언하되 중위장 기효근이 싸우지 않고 먼저 도망한 죄를 군법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원균은 기효근을 두둔하기만 했고, 이운룡은 이를 마뜩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원균이 골을 내며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린아이가 어머니 젖줄 바라듯 이순신에게 수차례나 청병을 요청했지만 이순신이 종시 부동했다. 하지만 나는 상륙하여 상감을 모시고자 하노라.” 그러면서도 원균은 숨기를 반복했다. 이때 이순신은 원균으로부터 적선 10여척이 사천ㆍ곤양 등지에 출몰해 마을을 불사르고 재물을 약탈해 백성 피해가 무쌍하지만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출병하여 구원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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