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자 교수의 探스러운 소비

▲ 스타벅스에서 차를 마신다고 차도녀가 되는 건 아니다. 이미지에 돈을 지불하는 건 낭비다.[사진=뉴시스]
여기 고가의 명품가방이 있다. 그런데 남이 전혀 볼 기회가 없는 가방이다. 당신은 이 명품가방에 얼마를 지불하겠는가. 더 이상 ‘남을 위해’ 또는 ‘남이 보는 나를 위해’ 돈을 쓰지 말자. 이미지에 돈을 지불하는 것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방법으로 돈을 쓸 때가 많다. 시장에서 몇 푼 안되는 콩나물 값마저 깎는 주부들은 스타벅스에서는 서로 커피값을 내겠다며 싸운다. 대학생들은 교과서를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책을 복사하지만 그렇게 모은 돈으로 손바닥만한 명품지갑을 사거나 수입맥주를 마신다. 2000원 남짓한 학교식당 밥값이 비싸다는 대자보가 수시로 나붙지만 30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는 항상 만원이다. 왜 그럴까. 정답은 뻔하다. 그게 그들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소비가치와 소비동기를 추적하다 보면 우리나라 소비자는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쓴다는 걸 알게 된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비용보다 관계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소비할 정도다. 혼자 배고플 땐 된장찌개 한 그릇이면 되지만 데이트나 손님접대를 위해선 비싸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야 한다는 거다. 다른 사람과 성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내 이미지를 포장하는 건 중요하다. 우리는 원하는 이미지로 우리의 자아를 넓히기 위해 옷ㆍ화장품ㆍ자동차를 사고 남들의 눈에 비친 우아한 나를 상상하며 행복해한다. 후기산업사회에 들어선 국가라면 소비 대상의 기능보다 이미지가 소비된다. 이는 어느 문화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명한 문화심리학자인 홉스테드(Hofstede)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그 정도가 상대적으로 심하다.

우리 사회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고, 집단규범의 동조를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성인이 됐어도 개인 단위의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이들이 많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게임을 통해 자신을 묘사하면 우리 소비자 대부분은 “나는 누구의 딸이고 어디 출신이며 어느 회사와 교회에 다닌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나는 키가 크고 음악을 즐기며 비교적 상냥한 사람이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특질(trait)보다는 내가 속한 집단과 귀속적 지위를 자아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한 셈이다. 자아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집단과 일차적 환경, 다시 말해 외모ㆍ의복ㆍ주택ㆍ소유물이 곧 자아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래미안’에 사는 동수는 ‘얼굴이 희고 갸름하며 수학을 잘하는 아이’일 것 같고 ‘스타벅스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젊은 여성은 ‘세련되고 연애관계에서도 쿨한 차도녀’일 것 같다. 이러니 많은 소비자가 제품의 기능보다 그 제품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기꺼이 고가의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경기가 좋아지고 소득이 늘어나도 나 자신의 성장이나 정서를 고양시키기보다 남과의 관계나 남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그 돈을 쓴다면 행복할 수 없다. 고가의 명품가방을 살 때를 생각해보라. 남이 전혀 바라볼 기회가 없는 가방이라면 그 품질과 디자인에 얼마를 지불하겠는가. 새벽별 보며 출근해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해 번 돈을 ‘남을 위해’ 또는 ‘남이 보는 나를 위해’ 쓰지 말자. 내가 정녕 원하는 것,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것만을 살펴 소비하면 큰돈 벌지 않고도 행복할 수 있다. 사돈이 땅을 사도 배만 아프지 않으면 그만이다.
김경자 가톨릭대 소비자학과 교수 kimkj@catholic.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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