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의 유령실적

▲ 모뉴엘과 현대중공업의 유령같은 실적이 금융권과 증권가의 뒤통수를 쳤다.[사진=뉴시스]
최근 금융가와 증권가에 ‘애물단지 두 기업’이 생겼다. 모뉴엘과 현대중공업이다. 유령 같은 실적으로 금융가와 증권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어서다. 차이점은 모뉴엘은 실적을 부풀렸고, 현대중공업은 손실을 부풀렸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가 숨어 있는 걸까.

현대중공업이 올 3분기 사상 최대의 적자를 기록했다. 일부 증권가 연구원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고 평가할 정도로 충격적인 성적표다. 하지만 현대중공업의 실적 부진을 단순한 ‘쇼크’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회사의 부진이 최근 시장을 속여 논란을 일으킨 IT가전업체 모뉴엘과 닮아 있어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뉴엘은 실적을 부풀렸고, 현대중공업은 손실을 부풀린 것일 뿐이다.

먼저 모뉴엘은 10월 20일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혁신기업에서 깡통기업으로 전락했다. 연매출이 1조2000억원, 영업이익이 1100억원에 달하는 튼실한 강소기업이라는 건 전부 거짓말이었다. 박홍석 모뉴엘 대표는 제품가격을 뻥튀기해 외상으로 수출한 것처럼 서류를 꾸몄다. 가짜 수출 자료를 한국무역보험공사에 들고 가면 공사는 대출보증을 서줬고, 그 증거로 ‘보험증권’을 내줬다. 그리고 박홍석 대표가 이 보험증권을 시중은행에 가지고 가면 은행들은 수천억원을 그냥 빌려줬다. 그렇게 받은 대출금이 2009년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총 3330회에 걸쳐 3조2000억원에 달한다.

사기로 위장한 혁신기업 모뉴엘 

홍콩에는 위장 조립공장을 두고 은행이나 회계사무소의 실사가 있을 때만 현지인 30여명을 긴급 고용해 일을 하는 것처럼 꾸몄다. 모뉴엘의 주요 활동은 실적 부풀리기를 통해 돈을 빌리고, 그 돈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리는 게 전부였던 셈이다. 그중 일부(446억원)는 해외로 빼돌려 박 대표의 개인 용돈으로 썼다. 현재 모뉴엘이 농협은행ㆍ산업은행ㆍ기업은행 등 금융권에 물어야 할 돈만 6768억원(9월 말 기준)이다. 보험증권 하나만 보고 부실기업에 대출을 해주고 뒤통수를 맞은 은행 관계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모뉴엘이 실적을 부풀렸다면 반대로 현대중공업은 손실을 부풀렸다. 올해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실적을 죄다 마이너스로 만든 거다. 현대중공업의 1분기 매출은 13조5000억원이었지만, 영업이익은 마이너스 1889억원으로 적자전환했다. 당기순손실은 910억원이었다. 적자전환의 이유는 이랬다. “플랜트ㆍ정유ㆍ금융을 제외한 6개 사업부문의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감소, 조선ㆍ플랜트부문 일회성 손실 발생, 해양부문 공정 지연. 조선부문 드릴십 투입물량 감소, 자회사 대손반영과 공사손실충당금 1700억원 반영.”

2분기에는 매출 12조8120억원에 영업적자 1조1037억원, 당기순손실은 6166억원으로 1분기보다 확 늘었다. 사상 최대 적자였다. 전체 매출에서 42.4%를 차지하는 조선ㆍ해양ㆍ플랜트부문의 실적 부진과 공사손실충당금이 주요인으로 지목됐다. 충당금은 조선에서 2000억원, 플랜트에서 2000억원, 해양에서 1000억원으로 총 5000억원이었다. 그리고 3분기. 매출 12조4000억원에 영업적자 1조9346억원, 당기순손실 1조4606억원을 기록했다. 2분기 당시의 ‘사상 최대’라는 수식어를 몇달 만에 갈아치웠다. 이번 실적 부진의 이유는 뭐였을까. 조선ㆍ플랜트부문의 공사손실충당금 반영, 공정 지연에 따른 비용증가였다. 공사손실충당금은 총 1조858억원이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이 있다. 3분기 동안 반영된 총 1조7558억원의 대손충당금이다. 대손충당금은 향후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손실을 미리 당겨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중공업은 대손충당금을 너무 많이 당겨 반영했다. 조선업계 불황과 저가수주로 인한 영업적자, 공정 지연에 따른 비용증가 등을 모두 감안한다고 해도 올해 총 누적적자의 54.4%에 달하는 대손충당금은 상식적이지 않은 면이 많다. 많은 증권사 연구원들이 현대중공업의 어마어마한 실적 부진을 눈치채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현대중공업의 행위는 소위 ‘빅 배스(big bath)’로 불린다. ‘빅 배스’는 분식회계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손실이나 향후 잠재적 부실 요소를 미리 반영해 회계장부에서 한꺼번에 털어냄으로써 실적 부진의 책임을 전임자에게 넘기는 행위다. 그러면 이후 신임 CEO는 일하기가 훨씬 편해진다. 향후 실적을 부각시킬 수 있다. 따라서 ‘빅 베스’는 일종의 경영전략으로 통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손실 부풀리기다. 모뉴엘과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인위적으로 시장과 투자자들을 속인다는 점에서는 같은 셈이다. 

 
현대중공업이 인위적으로 손실을 부풀렸다는 정황은 또 있다. 대손충당금이 반영된 사업들 중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현대중공업이 업종 다변화를 위해 진출했던 해양플랜트 분야가 많다. 당연히 예상치 못한 공정 지연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부문은 다르다. 최근 5년간의 조선부문 계약 잔액을 보면 신규 수주 계약이 일정한 수준에서 계속 이뤄지고 있고, 수주액도 꾸준히 늘고 있어서다. 저가 수주를 해온 사실은 누구보다도 경영진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동안 흑자를 볼 때는 왜 대손충당금을 반영하지 않았느냐는 거다.

현대중공업이 올해 실적을 발표하면서 유난히 대손충당금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일부에서는 현대중공업이 인력 구조조정의 사전 포석을 깔아놓은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최근 실적 부진을 이유로 경영진을 교체했다. 조선 3사(현대중공업ㆍ현대미포조선ㆍ현대삼호중공업)의 임원 중 81명을 감축했다. 또 올해부터 명예퇴직 권고 대상을 정년보다 빠른 52세 이상 노동자들로 확대했다.
더구나 현대중공업 노동조합은 1995년 이후 지난해까지 19년간 사측에 우호적이던 집행부가 아닌 민주노조 집행부를 선택했다. 이에 따라 현대중공업 노조는 최근 2004년 탈퇴한 민주노총 재가입까지 검토하는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대중공업이 구조조정과 더불어 노조까지 잡겠다는 심사가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빅 배스’는 구조조정 위한 사전포석?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과거 쌍용차는 ‘유형자산 손상차손’이라는 항목을 들어 정리해고의 정당성을 꾀했고, 한국GM은 통상임금 이슈가 불거지자 회계장부를 들이대며 손익을 따졌다”며 “현대중공업에 민주노조가 들어서자마자 1년도 채 안 돼 3조원대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고 발표한 것을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꼬집었다.

현대중공업 측은 3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주주와 고객, 시장에 좋지 않은 결과를 보여드려 안타깝다. 전 사업부문에 걸쳐 예측 가능한 손실 요인을 모두 반영함으로써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마련되길 기대한다.” 마치 투명하게 모든 걸 공개해 신뢰를 얻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투명해야 할 장부에 ‘예상 수치’가 들어간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인다. 모뉴엘과 현대중공업의 실적 혹은 손실 부풀리기를 똑같은 거짓 장부 작성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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