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쇼생크 탈출 ③

▲ 브룩스는 가석방되지만 자유롭기는커녕 오히려 쇼생크를 그리워하다 목숨을 끊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쇼생크 탈출’의 영화 포스터는 매우 인상적이다. 장대비가 쏟아 붓는 캄캄한 밤하늘에 한줄기 번갯불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히고, 그 하늘을 향해 탈출에 성공한 주인공 앤디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자유의 감격에 전율한다.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고 방황하다 마침내 광명을 찾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종교집단의 부흥회 포스터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다.

포스터만이 아니다. ‘쇼생크 탈출’의 영어 원제목은 ‘Showshank Redemption’이다. ‘Redemption’은 구원ㆍ재생ㆍ속죄 등의 의미를 가진 매우 종교적인 어휘다. 또 영화를 구성하는 기본 내러티브(이야기ㆍ영상ㆍ음악 등 모든 요소를 포함한 서사성)의 상당 부분이 성경구절의 암시와 은유로 뒷받침된다. 원작자 스티븐 킹에게 소설의 영감을 제공한 것도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인 것 같다. 앤디는 감방 벽을 뚫는 데 쓴 한뼘 정도의 장도리를 성경책 안쪽을 파서 그 속에 숨겨놓는데, 그 첫 페이지가 출애굽기다.

사실 스티븐 킹이 아니더라도 출애굽기는 혁명가나 혁명이론가, 역사가들 사이에선 탈출과 해방에 관한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의 고전으로 통한다. 출애굽기는 모세와 그의 동생 아론이 이집트 파라오 통치하에서 노예상태에 시달리던 60만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 40년간 황야를 방황하다가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에 도달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애굽) 탈출기’인 출애굽기는 자유ㆍ해방ㆍ혁명의 영원한 텍스트이자 그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을 제공하는 오아시스다.

탈출 이후의 ‘새 삶’이 진정한 해방

영화가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엑소더스(탈출ㆍ출애굽기의 탈출을 의미)’를 이해하면 영화의 원제목이 왜 ‘탈출(escape)’이 아닌 ‘구원(Redemption)’인지도 이해하기 쉽다. ‘탈출’이 ‘벗어남’만을 의미하는 소극적 의미라면 ‘구원’은 ‘새 삶, 새 세상’의 쟁취와 완성의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탈출’은 어둠과 억압 속에서 빠져나오는 그 자체만을 의미하지, 탈출 이후에 얻은 삶이 탈출 본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탈출을 소재로 한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탈출은 소극적인 범주에 속한다. 때문에 탈출에 성공하면 영화도 곧 끝이다. 이후 주인공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는 관심이 없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영화 중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십계명’에서 재현되는 출애굽기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다. 이 영화는 모세가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의 탈출을 돕는 순간까지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어서다. 탈출만 조명할 뿐, 탈출 이후의 얘기는 생략했다. 어쩌면 가장 전형적인 탈출 영화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진정한 의미는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는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탈출 이후, 40년간에 걸쳐 고난하며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과정에 있다. 탈출 자체는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화끈한 기적 한방’으로 가능했지만, 새로운 땅을 찾아가는 고난과 방황의 과정에는 기적이 없고, 가장 인간적인 고민과 현실의 문제로 점철된다. 혁명 이론가들이 출애굽기를 연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쇼생크 탈출’은 탈출과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탈출을 통해 진정 ‘새 삶’을 찾았는지의 문제지, 탈출 자체가 아니다. 영화는 50년간 쇼생크에서 복역한 ‘브룩스(Brooks)’라는 한 수감자를 통해 바로 그 문제를 제기한다. 브룩스 영감에게 ‘느닷없이’ 가석방이 결정된다. 하지만 브룩스 영감은 기뻐하기는커녕 절망에 빠지고, 고민 끝에 칼을 들고 동료 죄수의 목을 겨누는 난동을 부린다.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돌발 상황이다. 브룩스 영감은 그런 사고를 쳐서라도 가석방의 결정이 취소돼 교도소에 남길 원한다. 그러나 영감의 눈물겨운 노력도 무위로 끝나고, 결국 가석방된다. 50년 만에 아무런 준비 없이 ‘자유의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브룩스에게 ‘자유’란 ‘고통과 불안’일 뿐이다.

쇼생크의 담장 속에서 브룩스는 모든 것에 익숙했다. 도서관 사서로서 나름대로 자신의 ‘존재 의미’도 있었다. 그러나 담장 밖 세상에서 브룩스가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초라한 방 한 칸에 기거하며 슈퍼마켓에서 쇼핑백에 물건을 담는 일이 전부다. 그 일도 열심히 해야만 한다. 교도소에서처럼 대강 시간을 때워서는 먹고살기 힘들다. 모든 게 서툴고 모든 것이 두려울 뿐이다.

브룩스는 슈퍼마켓 주인을 살해해서라도 다시 ‘따뜻하고 편한’ 쇼생크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미 그럴 만한 기력도 상실한 브룩스 영감은 마침내 목을 매 자살하는 길을 택한다. 브룩스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나는 이곳이 싫다. 두려움에 떨기도 이제는 지쳤다. 이제는 떠날 생각이다.” 브룩스가 그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한 ‘쇼생크의 현자’ 레드는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 독백한다.

 
“브룩스는 쇼생크에서 50년간 길들여졌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이곳밖에 없다. 그는 이곳에서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유식한 인물이었다. 바깥 세상? 그곳에서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교도소 담장이란 웃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것을 증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에 익숙해진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그것에 의지하게 되고 만다. 그것이 바로 길들여진다는 의미다….” ‘자유로운(?)’ 세상으로 풀려난 브룩스의 자살, 브룩스의 자살에 대한 레드의 해석이 ‘쇼생크 탈출’이 제시하는 기본 메시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시 출애굽기 얘기를 해보자.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순간에는 환호하지만, ‘새로운 세상’을 찾아가면서 동요한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자유를 얻었지만 그 순간부터 그들 자신의 ‘새로운 법’이 필요했다. 하지만 ‘새로운 법’은 ‘파라오의 법’과 똑같이 그들을 불편하게 했고, 더 많은 의무와 계율을 요구했다. “차라리 이집트로 되돌아가겠다”는 무리들이 늘어갔고, “파라오 밑에서는 최소한 먹을 것이라도 보장됐다”며 그들이 목숨 걸고 탈출한 이집트와 파라오를 그리워했다. 이집트만 탈출하면 자유가 보장되리라고 막연히 상상했지만, 이집트 밖에도 자유는 없었다. 

자유로운 세상의 이상한 억압

‘쇼생크 탈출’도 이와 비슷하다. 교도소 담장만 벗어나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바깥세상을 그리워하지만, 교도소에 ‘교도소의 규칙’이 있듯이 바깥세상에는 ‘바깥세상의 법’이 기다릴 뿐이다. 브룩스 영감은 그 이치를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브룩스 영감의 두려움은 현실이 됐고, 바깥의 법에 적응하지 못한 채 쇼생크의 품을 그리워하다 생을 마감한다. 쇼생크나 바깥세상이나 자유를 구속하는 법이 있어야 하는 게 마찬가지라면 브룩스로선 자신에게 더 익숙한 법이 적용되는 쇼생크가 낙원인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김상회 한국폴리텍대학 안성캠퍼스 학장 sahngwhe@kopo.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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