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㊷

순신은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병선을 더 짓는 한편 묵은 것은 수선했다. 그 결과, 순신의 배는 30척으로 늘어났다. 그렇다고 전투준비에만 매달렸던 건 아니다. 백성의 삶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수신의 부대를 따라오기를 원한 200여 가구는 농토가 많고 해산물과 땔감이 풍부한 여수 장생포 근처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이순신 군대는 6월 10일 남해 미조항에 도착했다. 원균은 물에 떨어져 죽은 적의 목 200여급을 경상우수영으로 가져갔다. 이억기도 전승한 수급이 200여급이 넘었다. 조선군의 피해도 있었다. 사천ㆍ당포싸움을 시작으로 큰 싸움이 3~4차에 달한 탓에 죽은 군사는 13명이나 됐다.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10명, 화살에 맞아 사망한 이는 3명이었다.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한 사람은 이순신ㆍ나대용ㆍ이설 외 16명이요, 화살에 맞아 상한 사람은 21명이었다.

전사한 사졸은 순신이 친히 제문을 지어 충혼을 추도하고, 지방 태수의 호상護喪으로 장례를 장엄하게 거행했다. 전사자의 유족은 지방관청으로부터 구휼을 받았고, 부상자들은 순신이 친히 그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등 특별히 치료를 했다. 순신은 제장을 보낼 때 연회를 열고 술과 안주를 나누어 석별의 정을 표시했다. 그동안 나라를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충용을 다해 싸운 걸 찬양하면서도 당부를 잊지 않았다.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니요. 적이 2번이나 우리에게 패했으니 복수하러 올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일본군은 황해ㆍ평안 양도로 가는 수로水路를 장악하지 못하면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오. 이 때문에 일본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울 작정을 할 것이오. 이런 적을 때려부술 자는 오직 우리 수군뿐이니 (우리가) 적을 막지 못하면 의주 행재소를 범할 게 명약관화요. 적이 여세를 몰아 요동을 거쳐 명나라 톈진天津ㆍ산하이관山海關ㆍ베이징北京까지 들이친다면 우리 조선은 영영 없어지고 말 것이오. 이를 감안할 때 우리는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를 갚을 생각을 해야 할 것이오.” 순신의 태도와 어조는 강개 비분하였다. 이 연설을 듣는 제장들도 순신의 열렬한 장광설 사자후에 감동을 받아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 율포해전에서 승리한 순신은 부산공략에 신중을 기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순신은 이번 싸움의 공을 정해 1등부터 3등까지 일일이 발표하였다. 1등은 권준, 이순신李純信, 어영담, 배흥립, 신호, 정운, 김득광, 김완, 이기남李奇男, 이언량, 이몽구, 김인영, 가안책賈安策, 변존서, 나대용, 송희립, 이설, 신영해申榮海, 김효성, 배흥록, 이봉수 등이었다. 순신은 적의 수급을 벤 수를 감안하지 않고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두고 판단했다. 순신은 스스로 진행한 논공행상 자료를 선조에게 보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전장에서 피난민을 구휼

“행재소가 멀리 떠나 있고 길이 막혀서 통행하기 어려운데 적병은 아직 물러가지 아니했습니다. 논공행상하는 일을 조정에 보고한 후 회답을 기다려 발표한다면 왕복하는 동안에 시일이 늦어질 것입니다. 군중 상벌은 때를 넘길 것이 못되오니 공로를 참작하여 일ㆍ이ㆍ삼등에 나누어 보고합니다.”

순신은 병선을 더 짓고 묵은 것은 수선했다. 그 결과, 순신의 배는 30척으로 늘어났다. 순신의 함대는 사환선(명령을 전하거나 심부름을 하는 배)을 시켜 호남ㆍ영남 양도 연안에 피난해 굶주린 백성들에게 양미와 필목을 나눠줬다. 순신의 부대를 따라오기를 원한 200여 가구는 농토가 많고 해산물과 땔감이 풍부한 여수 장생포 근처에 머물게 했다.

싸움에 나아갈 때마다 순신은 휘하 제장에게 당부해 적군에게 붙들린 우리나라 사람을 힘써 구하도록 했다. 적선을 불지르거나 적군을 무찌를 때에도 각별히 탐사해 한 사람이라도 죽이지 말라고 분부했다. 또한 적에게 납치됐던 사람 하나를 되찾아 오는 공은 적의 수급 하나를 베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래서 모든 장졸은 혹시나 우리나라 사람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해 적선을 점령할 때 “이 배에 조선 사람이 있거든 나서라, 우리 사또께서 조선 사람은 살리라신다”며 크게 외치곤 했다.

이렇게 찾은 조선 사람이 각처 싸움에 남녀 도합 6인이었다. 대부분은 나이가 어려 말을 하지 못했다. 녹도만호 정운이 당항포 싸움에서 사로잡은 동래 사노 억만년億萬年이라는 13세 된 아이 하나만 묻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억만년은 순신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동래부 동문 밖 연지동蓮池洞에 살고 나이는 13세입니다. 부산에서 난리가 났다고 해 부모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때 수많은 일본 군사가 부산성을 다섯겹이나 에워쌌는데 그중 100여명이 성을 넘어 들어왔어요. 성 안에 있던 우리 조선 군사들은 대부분 죽었습니다. 소인은 친형을 잃고 갈 바를 몰라서 우는데 어떤 일본군사가 소인을 붙잡아 부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로부터 5~6일이 지났을 무렵 배에 실렸는데, 소인을 데리고 가던 사람이 저를 배 밑에 숨겼습죠.”

백성을 끔찍이 아끼는 순신

이 말을 다 들은 순신은 제장을 돌아보며 “어린 것이 어버이를 잃고 불쌍하니 우리 제장들이 보살피다가 난이 평정된 뒤 제 고향으로 보내도록 하라”고 말했다. 이순신은 동양의 신무(신과 같은 무인)일 뿐만 아니라 남쪽 백성들의 활불(생불)이며 구세주였다. 의탁할 곳 없는 피난민에게 밥을 주고 옷을 주고 살 곳을 주고 또 포로가 되었던 아이들을 돌봤기 때문이다. 이러니 삼남의 후인들이 이순신을 향해 품고 있는 영감(부모가 죽어서 느끼는 영원한 슬픔)과 추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순신의 함대는 6월 11일 본영인 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순신이 돌아오자 포구마다 도서 연안마다 백성들이 장군의 풍채를 보려고 애를 썼다. 백성들은 순신을 오방신장(다섯 방위를 관장하여 지키는 수호신)과 팔방뇌공(우레의 신)을 지휘할 정도로 용맹한 장군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적군들도 그렇게 생각해 어린 아이들이 밤에 울다가도 이순신 장군이 온다고 하면 울음을 그쳤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대표 cvo@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