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이순신공세가 ㊸

일본군이 한양을 점령했다. 개성에 있던 선조 무리들은 당황했다. 혹자는 평양으로, 혹자는 함경도로 도망치자 했다. 하지만 함경도로 가면 답이 없었다. 그곳에서 적을 만나면 꼼짝 없이 잡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신들은 왜 함경도행行을 권한 걸까. 자기네의 식구들을 먼저 함경도로 보냈으니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에서였다. 


개성에 주필(임금이 행차하는 도중 잠시 머무르거나 묵는 일)한 선조는 한양이 함락됐다는 소문을 듣고 전략상 임진강을 지키는 게 급선무라고 여겼다. 한강이라는 요해를 잃었으니 다음에 지킬 것은 임진이었다. 만일 임진에서도 적병을 막지 못한다면 그다음엔 대동강을 앞에 둔 평양이 위험했다. 그런데 만일 평양까지 잃어버린다면 몽진의 길은 의주로 갈 수밖에 없다. 명나라 황제에게 ‘살려 달라’고 구원을 청하는 게 최상책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조정의 무리들은 당파싸움을 거듭했고, 임금과 나라의 앞길은 뒷전이었다.

서인이니 동인이니 하며 편 가르기 싸움을 제일 잘하는 무리들, 전쟁에서는 달아날 것만 꿈꾸는 3정승6판서는 선조와 함께 이 쫓기는 길을 떠났다. 대신들 중에는 함경도로 가자는 작자가 많았으나 유성룡(전 영의정)이 반대했다. 상당수 대신의 함경도행行 이유는 다른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네 식구들을 함경도로 피난길을 보냈으니 한번 만나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유성룡은 함경도로 갔다가 적병을 만나면 더 갈 데가 없다는 이유로 평양행을 택했다. 평양에서 위험을 만나면 의주, 의주에서도 못 배기면 명나라로 넘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성룡이 믿는 것은 명나라의 구원병이요, 이항복의 무리가 믿는 것은 명나라로 도망쳐 회복의 방책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선조의 행차가 평산平山ㆍ봉산鳳山ㆍ황주黃州ㆍ중화中和 등지를 지나 대동강을 건너 4일만에 평양에 들어갔다[※참고: 1592년 5월 3일 개성 출발, 당일 한양성 점령, 5월 7일 평양 도착].

그렇다고 뾰족한 방책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선조를 쫓아오는 적병의 수가 얼마인지, 병기는 또 어떤 것을 갖고 있는지를 따지는 이는 없었다. 만일 있다 하면 유성룡 하나 정도일까. 당파의 이해, 목전의 이욕을 위해 준동하는 이들뿐이었다. 그래서 전쟁 중에도 음모ㆍ음해ㆍ암상暗傷ㆍ중상의 비열한 수단이 판을 쳤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장래를 결정하는 유성룡은 여러 등쌀에 미움을 받았다.

적병 피해 개성 떠나는 선조

선조가 개성을 떠날 때에 어의 동지사同知事 양예수楊禮壽가 보행步行으로 따라왔다. 양예수는 당대 명의로 이름이 높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만년에 각기병脚氣病(팔ㆍ다리에 신경염이 생겨 통증이 심하고 붓는 질환)이 있었다. 그래서 보행으론 왕진하길 마다하던 인물이었다. 도승지 이항복이 선조의 곁에서 양예수를 가리켜 “양동지사의 각기에는 난리탕이 제일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선조는 오랜만에 근심을 털고 크게 웃었다. 군신들도 따라 웃었다. 선조가 “말을 주어 타게 하라”고 명을 내리자 양예수는 비로서 말에 올라탈 수 있었다.

▲ 선조는 개성을 떠난지 4일 만에 평양에 들어갔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 무렵,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에서 패했다. 사실 졌다기보단 적군이 무서워 패랭이를 쓰고 임진강으로 달아난 거였다. 하지만 개성으로는 올 면목도, 용기도 없었다. 그런 김명원이 임진에 머물면서 패한 이유를 장계하고 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장계를 본 조정 대관들은 크게 흥분해 김명원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그러나 그와 친한 우의정 유홍의 주선으로 김명원은 패전 죄를 용서 받고, 도원수라는 병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경기ㆍ황해ㆍ평안 제도의 병마를 거두어 임진강을 지키라는 왕명王命을 받았다.

그렇지만 선조는 패군지장인 김명원을 신임할 수는 없어 전 북병사 신할申硈에게도 통어사統御使라는 벼슬을 주면서 임진을 지키라는 명을 내렸다. 또한 일전에 죽령을 지키라는 명을 받았던 조방장 유극량도 죽령에서 퇴각해 군사를 이끌고 임진으로 왔다. 이런 제장이 협력해 임진강을 지키게 된 것이다.
선조는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됐다. 명나라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한응인을 제도순찰사로 삼아 평안도 압록강변에서 국경을 지키던 병사 ‘강변정병 3000인’을 줘 임진강에서 적병을 막을 것을 명했다. 그러면서 “무능한 도원수 김명원의 절제를 받지 말라”고 하명했다.

강변정병 3000명이라면 자고로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강병强兵이었다. 또한 수년간 국경을 지켰기 때문에 강물에 익숙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임진강을 지키는 데 제격이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장수가 장수감이 아니니 어찌 하리오. 장재(장수가 될 만한 훌륭한 인재)를 논한다면 유극량이 첫째, 그다음은 김명원, 또 그다음은 신할이요, 한응인은 최하였다. 명령 체계가 거꾸로 놓여 있었던 것인데, 이는 낭패의 서막이었다.

별 볼 것 없던 한응인이 이렇게 좋은 직제를 받은 건 명나라에 다녀왔다는 권위 덕이었다. 평안도 강변정병을 한응인에게 줄 정도로 선조는 그를 믿었다. 좌의정 윤두수는 “한응인의 얼굴에 복기福氣가 있으니 반드시 복장福將이 되어 성공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장수를 전장戰場에 보낼 때에 재략은 말하지 않고 복기 등 관상을 말하는 건 당시로서도 웃음거리였다. 그만큼 윤두수는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인물이었다.

난중에도 병권 다툼

어찌됐든 여러 장수가 임진강을 함께 지키게 됐는데, 김명원ㆍ신할ㆍ한응인 세 장수가 각자 대장이다. 신할은 큰소리치되 “대장이 어찌 남의 절제를 받으랴”고 한다. 김명원은 한강에서 싸우지도 아니하고 도망한 위인이라서 부하에게 신임을 받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한응인은 “나는 그 누구의 명령도 받지 말라는 어명御命까지 받은 당당한 장사 아니냐”고 뻐기고 있었다. 세명의 장수가 반목하여 병권을 다투는 꼴이 된 거였다. 이때 임진강 남쪽까지 쫓아온 적병은 진을 치고 건너올 계획을 하고 있었다.

김명원은 강 북안에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각 여울목을 지키게 했다. 또 강중江中에 있는 선박을 모조리 거둬 적병이 타고 건널 도리가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임진강 방어를 10여일간 했는데, 그동안 선조는 무사히 평양에 도착했다. <다음호에 계속>
정리 | 이남석 더스쿠프 대표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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